공식 칭호가 "섬다잇 쁘레아 마하 고사난다"(Samdech Preah Maha Ghosananda, សម្ដចព្រះមហាឃោសានន្ទ)인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1929-2007.3.12) 스님은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대단히 존경을 받고있는, 캄보디아 출신 승려이다. "캄보디아의 간디"로도 불리는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 시대와 전후 이행기에서 캄보디아 불교의 승왕(성까리엇, Sangharaja)으로도 봉직했다. 빨리어로 된 그의 법명 "마하 고사난다"는 "위대한 환희의 선언자"란 의미이다.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1929년 따께우(Takéo) 도 메콩 삼각주 평원에 거주하던 농민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8세 때부터 사찰(와트)의 동자승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스승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14세 되던 해에 비구계(정식승려자격)를 받았다. 그는 지역의 사원 고교를 다니며 빨리어 경전을 공부한 후, 프놈펜과 밧덤벙에 있던 승원 대학에서 학업을 마무리했다. 이후 인도 비하르(Bihar) 주에 있는 날란다 대학(Nalanda University)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빨리어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 교 육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일본의 후지이 니치다츠(藤井日達, Nichidatsu Fujii) 큰스님(上人: 쇼닌)과 캄보디아의 쭈언 낫(Chuon Nath) 승왕 등 자신의 당대에서 만날 수 있었던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65년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태국 남부의 나콘 시 탐마랏(นครศรีธรรมราช, Nakorn Sri Dhammaraj) 근처의 숲속 사원(Thai Forest Tradition)에서 은둔 주석 중이던, 위대한 고행승 아짠 리 탐마타로(Ajahn Lee Dhammadharo) 스님 문하에서 명상수행을 하기 위해 인도를 떠났다. 그가 태국에서 탐마타로 스님의 숲속 사원에서 명상수행을 한지 4년이 지났을 무렵, 베트남전쟁의 와중에 있던 미국이 북-베트남이 사용하던 호치민루트를 끊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공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는 내전과 분열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3. 크메르루즈 시대
1975년 4월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으면서 불교도들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는 불교의 승원에 머물며 공부하기도 했던 폴 포트(Pol Pot)였지만, 그는 승려들을 쓸모없는 집단으로 여겼고 과거 봉건주의적 권력구조의 일부라고 판단했다. 승려들은 지식계급의 일부로서 의심과 경멸을 받았고, 특별한 "재교육" 대상으로 여겨져 더욱 탄압을 받았다.
크메르루즈의 가공할만한 영년(零年, Year Zero) 사업이 시작되면서, 승려들은 체계적으로 승원에서 끌려나와 체탈도첩(강제환속)된 후 농민으로 변하거나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다. 일부 승려들은 총구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바꾸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했을 때, 캄보디아 내에서 살아남은 승려는 거의 없었고 사찰들도 거의 다 파괴되었다. 이 사이 저마다 가공할만한 만행과 믿을수 없을만치 끔찍한 사연을 지닌 난민들이 캄보디아를 탈출해 태국 국경의 난민촌으로 몰려들었다.
1978년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태국의 은둔 수행처를 나와 태국-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촌으로 갔다. 그리고 국경으로 몰려든 초창기 난민들을 지도하고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야만적인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한 후 살아남은 극소수 승려에 속했다.
수년 동안 승려들을 만나보지 못했던 난민촌에 마하 고사난다 스님이 출현하자,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마하 고사난다 스님이 크메르루즈의 "영년" 이전 시대에 캄보디아 전통문화의 토대를 이루던 고대의 친숙한 경전들을 독경해나갈 때마다, 난민들은 종종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곤 했다. 그는 지친 영혼의 난민들에게 경전 복사본들을 나눠주며 용기와 삶의 희망을 북돋아주었다.
그의 모든 가족과 수많은 친구와 제자들도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모두 사망했다.
4. 새로운 재건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크메르루즈 정권 이후 캄보디아 불교를 부활시키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핵심적 인물이었다. 1979년 폴 포트 정권이 붕괴하자, 그는 1980년에 해외 캄보디아 망명자를 위한 UN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1975년 크메르루즈 정권 이전에 캄보디아에는 60,000명 정도의 승려들이 있었지만, 이 정권이 붕괴한 후에는 3,000명 정도가 살아남았다.
1988년 당시 파리에 모여있던 망명 승려들은 마하 고사난다 스님을 승왕(성까리엇)으로 추대했다.(주1) 그는 "캄보디아 내에 완전하고 독립적인 승단질서가 확립될 때까지만"이란 단서를 붙여 이 추대를 허락했다.(주2)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베트남이 수립한 위성정권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뗍 웡(Tep Vong, 텝봉) 스님을 통합종단 승왕으로 임명해둔 상태였다.(주3)
(주1) Ian Harris(2001년 8월), "Sangha Groupings in Cambodia", Buddhist Studies Review (UK Association for Buddhist Studies) 18 (I): 65–72, p.70.
1991년 유엔의 지원 하에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어 캄보디아에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1992년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캄보디아 국민들의 정신적 희망을 복원시키기 위한 평화의 순례행진으로서, 그 첫번째 "텀마 위어뜨라"(Dhammayietra: 빨리어-담마야뜨라[Dhamma-yatra], 진리의 순례) 행진을 펼쳤다. 총 16일간 125마일(약200km)에 걸친 이 행진은 아직도 크메르루즈 반군이 점령 중이던 지역까지 이어졌다. 이후 그는 더 많은 평화행진들을 시도했고,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 행진에 동참하고자 사람들이 찾아와 어떤 때엔 그 행렬이 200명 정도 규모에 이르기도 했다.
(동영상) 텀마 위어뜨라 행렬에 관한 기록 필름. 이 동영상에서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당시 빠일른을 장악하고 있던 크메르루주 전직 외무부장관 이엥 사리 부부의 영접을 받는다.
(동영상) 텀마 위어뜨라 행진에 관한 기록필름.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캄보디아의 간디"라고도 불린다.(주1)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클레이본 펠(Claiborne Pell) 위원장은 마하 고사난다 스님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스님은 캄보디아 평화를 일해 노력한 공로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연속으로 후보에 올랐다.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국제단체인 "불교평화우의회"(Buddhist Peace Fellowship: BPF) 자문위원과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빨랄라이"(Palalai) 사원의 비상근 주지를 겸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3월 12일 미국 메사추세츠 주, 노샘프턴(Northampton) 시에서 입적(사망)했다.
첫댓글이 어르신은 성철 스님의 수행법력과 만해 한용운 스님의 학식과 행동력을 함께 간직하신.. 성자시구만요... 일부에서는 달라이라마 스님과 함께 이 분을 20세기 동양의 4대 성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최근 뗍 웡(텝봉) 승왕을 공부하고 나서 착잡하던 마음이 좀 위안이 되네요... 캄보디아 불교의 힘이 역시 만만치 않구만요...
마지막에 장례식을 보도한 <템플뉴스 TV>는 미국과 캄보디아에서 방송되는 크메르계 불교방송국인데, 캄보디아 사람들이 북미권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가졌는지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이거 훈 센 정부가 더 민주적으로 변하면, 이런 해외 교포들이 많이들 지원할텐데,.... 실제로 1990년대에는 교포들이 많이들 돌와왔고, 경제적 도움도 줬습니다만.... 요즘 정권이 하도 막나가서... 좀 시들한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이 어르신은 성철 스님의 수행법력과 만해 한용운 스님의 학식과 행동력을 함께 간직하신.. 성자시구만요... 일부에서는 달라이라마 스님과 함께 이 분을 20세기 동양의 4대 성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최근 뗍 웡(텝봉) 승왕을 공부하고 나서 착잡하던 마음이 좀 위안이 되네요... 캄보디아 불교의 힘이 역시 만만치 않구만요...
이 어른이 받으신 상 중에 .... 그놈의 개나 소나 다 받는 캄보디아 정부 훈장은 없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 게시물을 끝으로, 캄보디아 불교에 대한 기초연구 단계가 끝났음을 알려드립니다~~
마지막에 장례식을 보도한 <템플뉴스 TV>는 미국과 캄보디아에서 방송되는 크메르계 불교방송국인데, 캄보디아 사람들이 북미권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가졌는지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이거 훈 센 정부가 더 민주적으로 변하면, 이런 해외 교포들이 많이들 지원할텐데,.... 실제로 1990년대에는 교포들이 많이들 돌와왔고, 경제적 도움도 줬습니다만.... 요즘 정권이 하도 막나가서... 좀 시들한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성자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된 듯 편안하고 따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