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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꽃밭 하나
- 전재욱의 시세계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전재욱 시인은 구한말 전북 부안 계화도에서 정통 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遇)선생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낙향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조선 최후의 대 유학자였다.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인지 전 시인은 공무원으로 정년을 마친 후 곧바로 서실(書室)을 마련하고 서예에 열중하면서 후반기 인생을 묵향 속에서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주시민대학 문예창작반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서예에 일가견을 가진 중견 작가로서 서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나이에 또 시를 배우겠다니 좀 남달라 보였다. 하지만 몇 년 전 시인이 등단할 때 쓴 당선 소감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다소 알게 되었다.
때론 푸른 창공을 높이 날아보고 싶었고, 파도 넘실대는 드넓은 바다에서 고래가 되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다.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에 고운 얼굴은 찾아볼 수 없이 되고, 기로(耆老)에 접어든 인생은 살포시 후회를 품어, - 평소 마음 속 깊이 맺혀 있던 사연들을 아름답게 한번 표현해 보고 싶었다. -
무언가 마음속에 맺힌 게 있어 그것을 이젠 글로써 한 번 아름답게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내용을 좀더 간추려 보면 ‘맺혀 있던 사연들을 아름답게 한 번 표현해 보고 싶었다.’로 요약된다. 본인의 말마따나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그동안의 삶이 마음처럼 아름답지 못한 삶이 되었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제 남은 인생이나마 ‘보다 아름답게’ 가다듬어 가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무언가 ‘맺힌 게’ 있고 , 또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 해 보고 싶다는 욕구와 남다른 미적(美的) 욕망에서 그의 시는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서시(序詩)- 「민들레」-에서도 ‘너는, 길가/ 한 쪽 구석에서/ 안질뱅이로 태어나// 때로는 / 짓밟히기도/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다가도 때가되면 ‘초롱한 눈빛으로/ 詩라는 푸른 창을 / 열고 날아// 무지개 꿈을 세우는 /너는, 나의 분신’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지난날의 소외와 억압이라는 - 무의식의 저변에 아직도 잠재되어 있는 -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한 방법으로써 시를 선택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닌 성 싶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생존의 경쟁에 밀려 저 무의식의 한쪽 구석에 내몰려 있던 잠재의식들을 언젠가 한번 끄집어 올려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면 울화병이 생기듯 지나친 감정의 통제는 마음을 병들게 한다. 그러기에 ‘하고 싶었던 말’ 그 말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하면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내면(內面)을 들여다보면서 멈출 수 없는 생존의 현장에서 흩어지고 망가진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고 가다듬어 가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그간 어떻게 살아 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끝없이 되물어 가는 자신과의 대화이며, 자기 정화(淨化)와 위안의 길이 곧 시(詩)의 길이기도 하다.
1. 의미를 넘는 존재의 미학
러시아의 형식주의자(formalist) 쉬글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글에서 ‘예술은 이미지들에 의한 사고’라는 명제를 내세워 ‘시적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규명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시의 작법’이란 결국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A poem should not mean, but be)’라고 말한 바 있다. 의미를 버리고 사물이라고 하는 존재(be) 그 자체가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시인들은 진술이나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그 말의 의미를 대상(象:object), 곧 이미지 속에 응축시켜 날(生:be)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깃줄이
뻐꾸기를 붙들고 있다
봄을 노래하는
방울들이
촉촉이 목을 가다듬으며
뻐국 뻐뻐꾹
겨울 발걸음 잠시 멈추고
산사의 고요를
머금고 있다.
이슬에 버물은
구슬
오물거리며
대롱 대롱
공중에 매달려 있다.
-「아침 이슬 」전문
제목이 「아침 이슬」이다. 고요한 산사의 요사채 안마당 전깃줄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는 이슬방울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이른 봄, 그것도 동이 터 햇살이 막 퍼져가는 아침 풍경인 것으로 보인다. 간밤, 산사(山寺)의 차가운 밤공기가 전깃줄에 하얀 서리로 얼어붙어 있다가 봄기운을 머금고 햇살이 떠오르자 그것들이 녹아 툼벙 툼벙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모습을 보고 쓴 이미지풍의 상큼한 동시다.
이를 시인은 예사로 보지 않고 ‘전깃줄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마치 ‘뻐꾸기들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볼록 볼록한 물방울들의 형상이나 또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에서 뻐꾸기의 볼록한 부리와 울음소리를 연상하여 ‘전깃줄이/ 뻐꾸기를 붙들고 있다’는 경이로운 시적 사유의 은유를 창작하게 된 것이다.
이는 창조적 사유의 발견이다. 시인 박형준은 이런 경우를 두고 ‘시란 있는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언제나 더(plus) 있음을 말하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냥 전깃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자세히 보니 그것은 꽁꽁 얼어있던 겨울을 녹여 봄을 몰고 오는 ‘뻐꾸기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고 하는 ‘+알파(α)’의 발견, 곧 시적 발상으로의 변모다. 이러한 발견과 은유적 인식에서 시인은 자기가 전달하고 싶었던 생각이나 느낌을 잡다한 설명이나 진술에 의존하지 않고, ‘봄= 물방울= 뻐꾸기’라는 이미지(대상물)로서 이른 봄날 아침의 분위기를 대신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얀 눈이
천지를 덮었다.
천사의 몸짓이다.
기다림도 고통도
슬픔도 모두 묻었다.
그래서 산새도 다람쥐도
널 좋아하나보다.
때로는 물로 얼음으로
제 몸을 통째로 내어 줘
만인의 사랑을 받는
넌, 하늘의 꽃이다.
- 「눈 1」 전문
시상이 참 맑고 깨끗하다. 그리고 간결하다. ‘눈(雪)’을 ‘천사의 몸짓’, ‘하늘의 꽃’이라고 표현하다니......, 눈이 ‘천사의 몸짓’이 되고, ‘하늘의 꽃’이 되기까지에는 ‘기다림도 고통도/ 슬픔도 모두 묻고’ 그걸 감내하는 인고(忍苦)와, ‘때로는 물로 / 얼음으로/ 제 몸을 통째로 내어주는’ 자기 헌신(獻身)과 희생의 세월이 뒤따르고 있었음을 이 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시인은 먼저 아상(我相)을 비워내고 있다. 하얀 눈이 천지를 덮듯, 나를 이제껏 억누르던 ‘고통도/ 슬픔도 모두 묻었다.’가 그것이다. 알몸이 되어 나를 다 내주고 나니 비로소 이것과 저것의 실상이 보이고, 다람쥐도 산새도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눈(雪)’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눈(雪)’이라는 자연 경물, 곧 대상물 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이치를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다. 형상(象)을 세워 뜻(意)을 전하는 이러한 입상진의(立象盡意) 시작법은 아마도 시인이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접해온 한시(漢詩)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동이 트는 아침
풀잎에 이슬 맺혔다.
산책길을 걷노라니
아직 피우지 못해
미만(未滿)스러운 벚꽃들이
저마다 창(窓)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데
목마른 산새 한 마리
꽃물을
햇살 부리에 쪼아대고 있다.
가지에서 가지로
봄이 아장거린다.
-「봄이 아장아장」 전문
봄을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침’, ‘풀잎’, ‘창를 열고(開) ‘꽃물’, ‘햇살 부리’, ‘아장거린다’등 온통 봄의 이미저리가 선명한 시적 감각으로 봄의 흥취를 불러일으키는데 상승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꽃이 만개한 중춘(仲春)의 화사한 봄날의 풍경이 아니고 막 봄이 시작되어 한 두가지에서 꽃이 피기 시작한 이른 봄날 아침의 풍경이다. ‘가지에서 가지로/ 봄이 아장거리’며 뛰어 다닌다가 더욱 그렇다.
그리고 특히 ‘목마른 산새 한 마리/ 꽃물을 / 햇살 부리에 - 쪼아대고 있다.’거나, 봄이 ‘가지에서/ 가지로 / 아장거린다.’와 같은 황홀하고도 신선한 표현은 속인들이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참신하고도 산뜻한 은유의 비경(秘境)이 아닐 수 없다.
2. 길에서 길을 찾다.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여, 이것을 버리고 고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자각하고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이 중도의 이치였다고 한다.
‘중도(中道)’에서의 ‘중(中)’은 물리적 공간의 중이 아니라, 양 극단을 뛰어 넘는 탄력적 포용의 정신적 공간이다. ‘중(中)’은 존재론적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空)’의 다른 이름이요, 참(眞)과 거짓(僞)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正)’의 개념이다.
모든 존재가 원인과 조건에 의해 관계 지어진 결과물이기에 때로는 없음(無)의 있음(有)이요, 비실체의 실체, 비연속의 연속으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관장하는 마음의 밭, 곧 길 아닌 길에서의 길이 되기도 한다.
이 중도의 길은 막히고 끊어지고 분별하는 대립과 갈등의 길이 아니라 양 극단을 벗어나 더 크게 아우르는 상생의 길이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과 도 다르지 않다. 서로 어긋나 보이는 이쟁(異諍)들이 하나로 서로 모여서 소통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원융회통(圓融會通)이다.
토끼와 다람쥐가
시소를 즐긴다.
밥상에는
고기와 야채, 나물
평형을 유지하는
중심점이라는 국도 있다.
모습이 다른 것들이
이룩한
묵언의 풍성한 밥상
빛과 어둠
말과 침묵 사이
평형의 시소는
상생의 밥상이다.
-「중심 1」 전문
시의 제목을 ‘시소’가 아니라 ‘중심’이라고 하였다. 굳이 시의 소재(素材)인 ‘시소’가 아니라 ‘중심’이라고 하는 데는 평소 시인이 산사(山寺)를 잘 찾는 것으로 보아 마음의 중심, 곧 ‘중도(中道)’를 일컫고 있음을 넌지시 간취(看取)할 수 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토끼와 다람쥐가 즐겁게 시소를 타고 있다. 이렇게 즐겁게 시소(seesaw)를 탈 수 있는 것은 평형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중심의 축(lever), 곧 지렛대가 올라갈 때 ‘보이고(see)’ 내려올 때 ‘보였던(saw)'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발 앞으로 때로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주면서 무게와 속도를 조절해 주는 양보와 배려의 길, 이는 아름다운 조화요 상생의 길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말 하고 싶어 시(詩) 속에 시소를 끌어들여 입상진의하고 있다.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그럴 때마다 시소 지렛대의 중심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중심점이 있어 균형을 잘 잡아 주어야 함을 밥상에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토끼가 되었든, 다람쥐가 되었든, 그리고 고기반찬이 되었든, 나물반찬이 되었든, 서로의 모습들은 달라도 마치 천하의 강물들이 모여 바다의 일미(一味)가 되듯, 각기 다른 음식들이 내 몸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배려하여야 한다고......,
이러고 보니 팔만대장경만이 법문이 아니라 삼라만상, 온갖 물상이 다 부처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실로 전재욱 시인은 시소의 모습을 보며 그와 같은 이치를 깨닫고 마음의 눈을 떠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무정 설법(無情說法)을 시소에게서 들은 셈이다.
‘평형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중심점’과 ‘묵언’(黙言), 그래야만이 인생의 시소를 ‘즐겁게 탈 수’ 있다는 시인의 중도론(中道論), 이는 일찍이 원효가 그의 『열반종요』에서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잊어버리고, 이름과 뜻이 아주 끊어지게 되면 비로소 ‘열반의 그윽한 상태’(斯卽理·智都忘: 名·義斯絶, 是謂涅槃之玄旨也)가 된다고 하는 열반론에 다름 아니다.
봄비가 내리는 날
겨울 나그네
음지에서
아직 헐떡거리는데
산사의 풍경 소리
푸른 노간주 이파리에 걸려 있고
보살의 눈동자
개나리의 노란 꽃잎을
파고든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의 염불 소리
석가모니의 설법인가
내 가슴에서 진동한다.
니르바나.....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 「봄, 들려오는데」 전문
천지에는 어느새 봄이 들려오는데, 나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음지에서 헐떡거리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또 산사(山寺)를 찾은 모양이다. 봄이 오는 길목, 거기에서 부처를 만난다. 산사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혹한의 겨울 속에서도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감도는 노간주나무의 푸릇한 잎을 보고, 또 그 옆 노오랗게 꽃망울을 피워 올린 개나리를 보면서 그의 마음에도 어느새 보살의 눈동자가 고이고, 부처님의 설법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은(佛恩)이로다. 부처는 우리 모두에게 이처럼 대자대비심을 고루 베풀고 계시건만 미혹한 중생들이 다만 그것을 깨치지 못해 번뇌 망상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어느새 천지에 ‘봄, 들려오는데’ 음지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가 산사에 들러 자연이 들려 준 무정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시인은 평정심을 얻게 된다.
‘겨울의 음지’에서도 ‘노란 새싹’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음을 보았고, ‘개구리 울음’ 속에서 마음이 진정되어 가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이미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물화(物化)의 세계다. 그게 자연과의 융화요, 너와 나, 이것과 저것의 분별심에서 빚어진 고통과 대립이 소멸된 원융무애의 경지다. ‘겨울’ 속에서 ‘봄’이 오는 그것은 유생어무(有生於無)의 변화와, 모든 것은 서로 연기되어 있다는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값진 깨달음의 세계다. 그것은 니르바나의 세계이며, 무엇보다도 그에게 찾아온 ‘봄’이라는 선물이 아니었든가 한다.
3. 사라지는 것들의 그늘
영국의 방랑 시인 데이비스는 ‘인생은 꿈을 낚는 어부’라 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우리는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낚으려고 한다. 누구는 권세를 낚았고, 누구는 부귀를 낚았고, 누구는 사랑을 낚았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아무 것도 낚은 것이 없다고 한다.
시간은 인생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또 빼앗아 간다. 그러다가도 때가 되면 떨어진 낙엽처럼, 시인의 말마따나 ‘지하철 선반 위에서 떨어져 내린 신문지처럼’ 세상으로부터 조용히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서 헤세의 싯구처럼 우리에게 속삭인다. ‘끈기 있게 조용하거라. 거역하지 마라. 바람이 너를 데리고 사라질 때까지......,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도 나를 사랑했지만 세월은 남 몰래 소리도 없이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으며 조용히 사라지라고 한다.
지팡이가 힘에 겨운지
꼬부랑 할머니의 등에 업혀 보기도 하고
지하철 선반에 올려진 신문처럼
바닥에 툭 떨어져 보기도 하는데
때로는 휴지처럼 가방에
숨고 싶을 때도 있다.
- 「지팡이」 일부
‘지팡이’, ‘헌 신문’, ‘휴지’는 시인의 또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니다. 노경(老境)의 모습, 곧 지팡이의 모습을 퍽 쓸쓸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자연을 큰 ‘흐름’ 속에서 보면 세상에 흘러가지 않고, 변하지 않은 형상들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무상, 이는 자연 현상이요, 무상(無常) 자체가 인생이요 세상이기에 이를 받아들여 그 흐름에 내가 하나가 되어 스며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가을 날 감나무 잎처럼 - 햇살에 스며드는 일’(이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라지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가을을 저토록 화려한 물감으로 물들여 놓고 가는 낙엽도 아름답고, 저녁 하늘을 저리도 붉게 물들여 놓고 사라지고 마는 해(태양)도 아름답다. 왜 우리는 그 사람이 떠나간 후에야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푸쉬킨의 말처럼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 다시 그리워지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리운 존재들이었다.
꽃도 시들어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시들어 죽지 않는 꽃은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화에 불과하다. 그 아름답게 뽐내던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 가지만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새 생명의 씨앗이 잉태돼 맺히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노년의 사랑도 읽다가 버린 신문지처럼 쓸모없는 마침표가 아니다. 다만 쉼표이며 말없음 표로 남아 숨 쉬고 있는 또 다른 생명의 미학인 것이다.
한 때 내가 가린 태양으로 누군가에게 안겨 주었을 그늘을 미안해하며 사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사라져야 할 것과 그때를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더 높은 데 있는 사람,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그늘을 던지게 되었던 것을 새삼 깨달아 가면서 다음 세대에 아름다운 눈빛으로 바톤을 넘겨주는 사람. 그러기에 소멸은 아름다운 것이다.
4. 마음속의 꽃밭 하나
시인은 ‘길가 외진 곳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나 - 짓밟히기도/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렵게’ 살아 왔다고 했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갇혀 있던 ‘창을 열고 날아 세상에 아름다운 꽃밭 하나 이루고 싶다’고 하였을 것이다.
내 안에 꽃 피울
작은 밭 하나 있다면
들이 쉬는 숨
한 모금으로
우주를 들이키겠네.
-「나의 집」전문
‘작은 밭 = 나의 집 = 우주’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나의 집 밭’에는 아직 꽃이 피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 나의 ‘우주’를 만나지 못해 허전하다는 속내를 비치고 있다..
세상에는 꽃처럼 고운 날도 있지만 그늘진 날도 많다. 하지만 비바람 속에서도,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땅에 묻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마음에 중심을 잡고 보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쟁(異諍)을 넘는 화쟁(和諍)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비바람치고 별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스스로 별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날도 있는 것이다.
빈 집
울안이 너무도 조용하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쏘옥 내 품에 안기는 따스한 숨결
빨래줄에 걸려 있는 옷가지며
화단의 문주란, 철쭉, 소철
양란까지도
청초해 보이는 아침
바다를 슬쩍 넘어온
포근한 미소......
눈에 어른거린다.
숨결 되살아나는
빈 집의 저 꽃들이여
-「숨결」 전문
바다를 건너 들려오는 전화 한 통화에도 이처럼 마음이 환해지다니......,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더니 천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가꾸고 싶었던 세상의 꽃밭, 창을 열고 나가 세상에 아름다운 ‘꽃밭 하나’를 이루어 보고 싶었던 민들레의 꿈, 곧 그의 꽃밭은, 알록 달록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 있어서 아름다운 꽃밭이 아니라, 이처럼 마음에 꽃이 피면 아름다운 꽃밭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바다를 건너 온 - 포근한 미소’ 그게 아마 사랑스런 손주들의 전화 혹은 가족들의 다정한 목소리 아님 그 어떤 기쁜 소식의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이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인해 ‘빈 집안’이 이토록 환해지고 마음이 그 어떤 충만감으로 가득해 지다니......, 썰렁해 보이던 ‘빨랫줄의 옷가지도’, ‘양란까지도/청초해 보이는 아침’이라고 시인은 행복해 한다. 마치 긴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그네, 아니 선객(禪客)처럼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마음 속 꽃밭에서 꽃이 피어 벌·나비를 부르게 된 것이다.
5. 시의 구원
시의 구원은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의 근심을 없애는 일이요,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기쁘고 감사한 일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아상(我相)을 비워야 한다. 시는 아상을 비워 ‘참나’를 찾는 일이요, 세속의 판단과 가치에 의해 매몰되고 가려져 있는 일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지켜가고 길러가는 일이기도 하다.
행복한 자는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자는 없는 것을 사랑한다고
행복은 기성복이 아니라고
물질, 지위, 명예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라고
뭔가 성취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그러나 행복은 창가에 머물지 않는다고
100℃로 끓게 되면 기화해서
무한으로 사라지는 행복
그 걸 알고 현재 내 앞에 있는 것
그게 무엇이든 그걸 사랑하라고
타오르는 가슴 속의
불을 끄고
조용히 내 안에서
나를 비추는 촛불 하나
내 가슴 속에 켜 보는 일이라고
-「촛불의 행복」 전문
참,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의 시는 이처럼 한 편의 법문처럼 색(色)의 행복에서 공(空)의 행복, 곧 물리적 대상의 꽃밭에서 마음속의 행복과 감사의 꽃밭으로 관점이 이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물질과 속도, 편리와 경쟁의 ‘기성복 문화’에서,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고 상생하는 ‘아날로그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마음속에 촛불을 켜고 나의 욕망과 아상을 잠재우는 관조와 성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결국 부도 명예도 아닐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서로 사랑을 나누다가 때가 되면 가볍게 세상을 떠나는 것일 게다. 가족 간의 사랑, 이웃 간의 사랑, 용서하고, 베풀고 나누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위로와 감사의 삶만이, 삶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상처 입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묘약일 것이다.
이 사랑의 묘약으로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욕망의 불꽃을 진정시켜 가면서 소멸되고 훼손된 우리의 삶을 정화시켜 간다면 변화와 혼돈의 디지털 속에서도 또 하나의 꽃밭이 되어가지 않을까 한다.
시를 쓰든, 서예를 하든, 예술적 창조와 미적 관조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가슴 속에 철옹성처럼 굳게 박혀 있는 아집의 성(城)을 비우게 되면, 비로소 이것과 저것의 실상(實相)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 도(道)는 텅 빈 곳에 모여든다고 한다. 때문에 허정의 상태를 굳게 지키면 만물은 일제히 일어나 생동하게 된다(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는 장자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시인의 앞날에 촛불의 서광이 깃들기를 축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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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하하! 전재욱시인! 대단한 신인을 발탁하셨네요! 고맙습니다.
이런 시인을 대할 때면 제 마음도 두둥실 함께 희열에 들뜹니다.
특히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여,
이것을 버리고 고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자각하고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이 중도의 이치였다고 한다.> 는
중도사상의 설파는 압권입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왜 모르고 극단에 흐를까요?
전재욱 시인께서 간재 가문이라고 하시니 어릴적 들었던 할아버지께서 간재문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글을 읽는 동안 내내 감동의 물결입니다, 동서고금의 경전을 읽는듯한 감동에 휩싸입니다,
싯귀 하나하나가 생명이 되어 생명으로 다가오는군요.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것처럼 경이 자체입니다,
시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심금을 울리는 공명장을 형성합니다, 이게 바로 시라는걸 알게 됩니다,
각기 다른 표현의 싯귀마다 새생명의 감동을 자아 내는군요.
싯귀 하나하나가 펄펄 살아 있는 생명이란걸 알게 되었습니다,
전재욱 시인의 시들을 읽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난다> 선생님, 전재욱 선생님게 말씀드려 덕산선생님께 몇 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주소도 댓글란에 올려 주시지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귀한 시집을 받는다는게 가슴 두근거립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전재욱님이 여행 중이시니 돌아오신대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교수님. 제게 재능기부의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과 시로 우리문단의 등불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글 쓰겠습니다.
오늘 시집 잘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