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장독대란 무엇인가?
내가 어렸을적 살았던 초갓집 뒤 에는 항아리들로 가득찬 장독대가 있었다. 그 곳에는 똑 같은 색깔의 가족인 아기 항아리 누나 항아리 어머니 항아리 할머니 항아리들이 질서 정연하게 있었다.
장독대 주위에는 온갖 맨드라미 봉선화 접시꽃 나팔꽃 분꽃 채송화 들로 치장 되어 있었다.
고달픈 살림살이 훈장이라도 단 듯 큰 감나무 옆에서 위치한 장독대에는 투박함 세월을 흐르 듯 해 질녘의 그림자가 잠시 쉬어 가곤 했었다.
나는 학교를 파하고 가장 먼저 달려 가는 곳이 장독대였다. 장독대가 건강해야 장 맛이 좋아진다 하였다. 그 장독대에는 사시 사철 먹을 거리가 가득 채워 있었다. 된장 단지, 김치 단지, 고추장 단지, 깨잎 단지, 게장 단지, 열무김치 단지, 청국장 단지, 갖가지 젓단지, 묵은지 단지등이 나의 허기를 달래 주고도 남을 사연들이 깃 든 나의 고향 장독대 였다.
된장 단지에는 감나무꽃이 묵어 익어 갈때 꽃 벌들이 감나무의 꽃의 꿀을 뭍혀서 된장 위에 쉬었다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러한지 우리집 된장은 다른 집에서 느끼지 못하는 구수하고 향기로운 맛을 풍겼다.
할머니 항아리에 겨우내 잠자고 있던 톡 쏘는 겨울 동치미를 꺼내어 물고구마와 함께 먹 었던 그 맛 지금도 어찌 잊겠는가. 한마디로 허기찬 세월의 가난을 하얀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머금고 한입 덮썩 깨물어 먹었던 나의 고향 장독대였다. 가난이 아파 눈물을 흘리면서 먹 었던 동치미에는 온갖 것들로 가득 했다. 그 무우 동치미에는 열무, 대추, 미나리, 양파, 삭힌 고추, 생강, 마늘, 당근, 대파. 사과, 배, 소금물을 넣어 어머니의 사랑이 깃든 것이었다.
큰 장독대에 간장 고추장 된장 젓갈등을 넉넉하게 채워 놓지 못할때 어려운 살림에 어머님의 마음은 얼마나 허허 했을까를 생각해본다.
닭장 가까이애는 속이 텅 비어 있는 항아리가 한개 있었다. 그안에는 어머니의 한, 가난, 남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온갖 서러움을 담아 두었다가 소낙비가 오기전 어머니는 그 항아리를 뚜껑을 열어 놓았다. 어머니는 소나기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면 뚜껑을 열어 그 속에 담아 놓았던 어머님의 한이 서린 응어리를 하늘로 솟아 오르게 하는 것을 나는 목격 할 수 있었다.
우리집 부뚜막 한 구석에는 부엌밑에 장독을 묻고 그곳에 쌀과 물을 채웠다. 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날때는 커다란 항아리에 쌀을 가득 담아 보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한 숨 짓는 모습도 훔쳐 보았다.
한편으론 한 구석의 항아리에 흔한 물이라도 철렁 철렁하게 채워 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심정였으리라.
난 아랫집에 가서 펌풋질을하여 물동이에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다른 물동이 다른 손에는 머리의 물동이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기 위하여 물동이 태의 물을 손으로 재빠른 동작으로 물을 훔쳐 땅으로 내 팽겨쳐야 했다.
머시매가 아낙내들처럼 별개 다한다고 애들이 놀려대도 나는 부엌 장독대에 물이라도 철렁철렁거리게 하여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안을 해 주고 싶었다.
나의 집 뒷간에 가면 큰 장독을 땅에 묻힌 후 그곳에서 판자 두개를 올려 놓아 일을 보게 하였다. 하루는 나는 뒷간을 유리 호롱불을 들고 갔다. 난 그 호롱불을 바로 앞에 두고 일 보고 있었는데 어렷을적 쉬하는 소리도 크지만 힘이 어찌나 쎄던지 그만 나의 쉬가 호롱불 유리에 튀겨서 호롱불 유리가 박살 나 버렸다. 어머님께 꾸주랑을 받을 것에 당황이 엄습했는데 어머니는 그저 대소박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의 웃음이 의미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 해 보니 내 스스로 웃음이 내 입가를 스쳐 가는 것을 느낀다.
우린 장독 뒤에서 술래 잡기를 마다 하지 아니 했다. 가끔 장독안에 숨어 있다가 어른신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지만 소낙비가 오면 장독 뚜껑들을 덮혀 두면 어르신들께서 칭찬도 들었다. 장을 담은 장독에는 빨간 고추, 대추와 숫덩어리를 둥둥 뛰우고 솔가지를 곁들인 새끼줄을 장독 허리띠를 둘러 매야 장맛이 난다고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름에는 소낙비로 멱을 감고나서 햋볕에 제빨리 몸을 말리는 항아리 였다. 겨울에는 하얀 눈 모자를 뒤접어 쓰고 얼음을 안은채 알몸으로 추위를 견뎌내는 장독대 였다.
밤이면 달님을 벗삼아 도란 도란 아기 항아리 할머니 항아리 장독 식구들이 오손 도손 정다움을 나누곤 했다
고향을 잊지 못해 꿈꾸며 그렸던 고향집 모습…
마치 연어가 저 태어난 냇물의 냄새를 찾아 오 듯 부모형제 친구들이 아늑한 추억의 공간에 머물고 싶어 찾아 왔건만 이제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장독대는 냉장고에 밀려 대부분 사라지고 절에서만 볼 수가 있다.
비록 속은 텅 비었어도 늘 블록하게 뛰어나온 넉넉한 모습의 장독들을 본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면서 장독의 항아리처럼 내 마음도 덩달아 넉넉 하고 싶다.
철모른던 그 시절 장독을 스치고 지나가는 봄 바람 소리에 나의 어머니의 가슴에도 따뜻하고 포근한 봄기운이 돋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향보다 먼 내 고향, 꿈에도 그리던 어릴적 내 고향, 지금도 찾아가면 고향의 아련한 어릴적 추억을 마음에 담았던 것을 잠시 풀어넣고 나비가 되어 이곳 저곳을 흩어보지만 그때의 고향은 이제없다. 비가 쏟아지면 새끼 병아리들이 비에 젖을 까봐 어미 닭은 모든 병아리를 자신의 깃털에 감싸주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스런 감정을 난 언제 다시 느껴 볼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