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프러제트』
박태식 신부 / 영화평론가, 성공회신부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 사라 가브론 감독, 극영화/인권, 영국, 2015년, 107분)는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이었다. 총 118편의 영화가 출품되었고 다른 어느 해보다 알찬 영화제가 되었다는 총평이 있었다. 특히 개막작은 그 작품성이나 주제의식을 볼 때 탁월한 작품으로 보인다. 여성 참정권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투표권에 대한 논의가 영국에서 불이 붙었던 1912년에서, 드디어 투표권이 주어진 1916년까지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고 그 사이에 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갔던 여성들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그 여성운동가들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영화의 제목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이다.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는 런던의 어느 세탁공장 노동자이다. 그녀는 남편 소니(벤 위쇼)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 하루하루 힘은 들지만 직장에서는 작업반장이고 가정도 안정되어 있어 그런대로 평온한 삶을 꾸려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이올렛(앤 메리 더프)이 12살 딸과 함께 공장에 취직했고 그녀가 여성운동가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이올렛을 따라 여기저기 집회에 참석하면서 모드는 여성 참정권에 눈을 떴고 마침내 남편에게 얻어맞아 몰골이 형편없어진 바이올렛을 대신해 국회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한다. 청문회의 외견적 분위기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곧 법안이 상정될 것으로 보였다. 여성 투표권에 대한 법안 말이다. 그러나 법안 상정은 거부되었고 여성운동가들의 투쟁은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폭동으로 규정되고 만다.
<서프러제트>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성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나와 있다. 가히 악마적이라고 해도 좋을 법했다. 행진을 막기 위해 기마경찰이 출동해 몽둥이를 휘두르고,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의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를 잡으려 도시를 봉쇄하고, 남편들을 회유해 운동에 나선 아내들을 집에서 내쫓게 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남에 집에 입양하도록 조건을 만들며, 경찰 프락치로 삼아 정보를 빼내려하고, 결국 여성운동 자체를 괴멸시키려 한다. 남성에게 버릇없이 도전한 여성들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작전을 진두지휘는 스티드 경감(베네딕트 글리슨)이 맡았다.
영화는 이렇다 할 문제의식 없이 살았던 평범한 여인이 의식화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모드는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돌이켜볼 기회를 가졌고 불합리한 권력에 대항하는 게 무엇인지 마음으로부터 깨닫는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서프러제트’로 거듭난 것이다. 그녀에게 언제나 용기를 주었던 에디스(헬레나 본햄 카터)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이다.
영화에 표현된 여성들의 투쟁은 언제나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극단적 형태를 띤다. 여성의 권리는 여성이 쟁취하는 것이지 남성들의 선처를 기다리다가는 한도 끝도 없이 허송세월만 보낼 뿐이다. 그래서 벽돌을 들어 유리창을 깨고 기마경찰에 맞서 스크럼을 짜고 앨리스(나탈리 프레스)는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 앞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그런 식의 치열한 투쟁으로 여성들은 투표권을 쟁취해낸다.
남성들은 여성 투표권에 대해 “여성은 감정 조절을 잘 못하고 균형 감각이 없어서 정치적인 일을 판단해낼 수 없다.”, “일단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이를 멈추는 건 가능하지 않다. 여성들은 국회의원, 정부 관료, 판사를 요구할 것이다.” 남성들이 만들어낸 억압적 선언은 그 자체로 폭력인 셈이다. 실제로 남성 정치가들 주도의 청문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멋진 배우들이 나와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다들 영화의 주제에 공감하는 배우들일 것이다. 영화의 압권은 에밀리의 장례식과 에필로그였다. 특히 엔딩 크레딧은 각 나라에서 여성 투표권이 처음으로 주어진 연도들이 장식한다. 한 나라씩 짚어가며 올라가는 화면을 보니, 몇몇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여성투표권을 위해 여전히 투쟁 중이었다. 그 나라들에도 엄연히 존재할 ‘서프러제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