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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입: 성도의 특권(인도)야구는 9회 말까지 있습니다. 미 프로 야구에서는 7회초가 끝나면 「Take me out to the ball game」"야구장으로 나를 데려다 주오." 란 노래를 모든 야구팬들이 일어나 합창을 합니다. 귀화 시험에도 나오는 이 노래엔 유래가 있습니다.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Take me out to the ball game,Take me out with the crowd; Buy me some peanuts and Cracker JackI don't care if I never get back.Let me root, root, root for the home team,If they don't win, it's a shame.For it's one, two, three strikes, you're out,At the old ball game.
Katie Casey was baseball mad,Had the fever and had it bad,Just to root for the home town crew,Ev'ry sou Katie blew.On a Saturday her young beauCalled to see if she'd like to goTo see a show, but Miss Kate saidNo, I'll tell you what you can do
Katie Casey saw all the games,Knew the players by their first names,Told the umpire he was wrong,All along, Good and strong.When the score was just two to two,Katie Casey knew what to do,Just to cheer up the boys she knew,She made the gang sing this song.
날 야구장에 데려가 주세요.관중들 속에 있고 싶어요.땅콩과 크래커 잭도 사주시구요. 집에 가지 않아도 좋아요.같이 응원해요, 우리 홈팀을. 오래된 야구장에서원, 투,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이 되어도, 지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야구장의 국가이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3대 팝송'으로 꼽히는 야구장으로 나를 데려다주오(Take Me Out to the Ball Game, 이하 TMOTB)'가 그 경쾌한 화음을 세상에 드러낸 지 올해로 100주년이 됐다.
한 세기 동안 이 노래를 앨범에 담은 가수는 무려 400여명. 프랭크 시나트라부터 프랭크 자파까지 온갖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앞다퉈 야구장의 '찬가'를 녹음했다. 음반화된 회수는 600회 이상. 록그룹 펄잼과 헤비메탈 보컬리스트 오지 오스번에서 풋볼코치 마이크 딧카와 영원한 '컵스의 상징' 해리 캐레이까지. 야구장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인물의 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TMOTB는 1908년 낵 노워스라는 작곡자가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도중 만들어졌다. 지금은 없어진 폴로그라운드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 경기를 지켜본 그는 경기장의 한 광고판에서 영감을 얻어 단숨에 작사를 한 뒤 곡을 써내려갔다.
차체가 심하게 떨리는 20세기 초반 뉴욕 지하철에서 쓴 곡이라기에는 글씨가 너무 선명하고 깨끗하다는 이유로 노워스 스토리는 '조작'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 노래의 인기는 미국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케이티 케이시라는 여성 팬이 남자 친구에게 "나를 야구장에 데려가서 땅콩과 크래커를 사달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 무엇보다 후렴구가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구성돼 있어 따라부르기 쉬운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모르는 미국인은 없으며, AP의 보도에 따르면 '생일축하곡(Happy Birthday)'과 '미국국가(The Star-Spangled Banner)'에 이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불리워진 3번째 노래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TMOTB이지만 야구장의 '비공식 국가'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곡이 처음 발표된 1908년 당시 3명의 가수가 이 노래를 불러 3차례나 '톱10'에 오르기는 했지만 1934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 가서야 처음으로 야구장에서 울려 퍼졌다.
1936년부터 1956년까지 메이저 리그 최고 우완으로 명성을 떨친 밥 펠러(당시 클리블랜드)에 회고에 따르면 팬들은 장내 아나운서나 요즘 같은 비디오 보드의 지시 없이도 흥에 겨우면 알아서 노래를 불렀다. 홈팀이 이기거나 분위기가 좋으면 이 노래를 합창했다. 당시만 해도 '어쩌다 한 번' 함께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요즘 메이저 리그 경기장에선 이 노래를 매일 들을 수 있다. 매 경기 7회초가 끝난 뒤 모든 관중은 기립해 일제히 이 노래를 합창한다. 하지만 이런 풍습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76년 당시 시카고 화이트 삭스 오너였던 '괴짜 구단주' 빌 벡은 관중을 위한 이벤트를 궁리하던 도중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구단 전속 아나운서인 캐레이가 중계 도중 광고 시간이면 노래를 흥얼거리는 점에 착안, 경기 도중 마이크를 잡고 관중 앞에서 공개 공연을 연다는 계획이었다. 캐레이는 소문난 '음치'. 이런 캐레이가 노래를 부르면 관중은 일제히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면서 '당신보다 내가 더 잘한다.'고 과시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그림'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계획은 대성공을 이루었고, 캐레이가 6년 뒤 시카고 컵스로 옮긴 뒤에도 전통으로 이어졌다. 리글리 필드의 컵스 홈경기 7회초가 끝난 뒤에는 언제나 마이크를 잡고 "컵스를 응원해주세요(Root, root, root for the cubbie)"라며 노래하는 노 아나운서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컵스의 경기는 구단 모기업인 트리뷴 컴퍼니의 자회사이자 케이블채널인 WGN을 통해서 미 전역에 중계됐는데, 각 구단이 이를 따라하면서 7회초와 7회말 사이의 공수 교대 기간은 'TMOTB 시간'으로 굳어졌다.
캐레이가 지난 98년 사망하자 컵스는 매 경기 게스트를 초청, TMOTB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토미 라소다 LA 다저스 부사장 등 야구인은 물론, 유력 정치인, 연예인들이 만원 관중 앞에서 '라이브 공연'을 실시했다.시원한 여름밤, 푸른 잔디를 바라보며 합창하는 수만 관중의 모습. 메이저 리그가 존속하는 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이 노래의 인기는 이어질 것 같다.
아나운서의 허물을 관중이 함께 하므로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약점을 덮어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 일일까요? 하물며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천지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나 구경만 하는 분이 아니라 친히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저놈이 구원을 잘 지키나 보자' 하고 관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래전 조크이긴 합니다만 69번 버스가 달려가다가 큰 사고를 만나서 모든 사람이 죽었답니다. 그 죽은 사람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이 누구인가? 살펴보았더니, ① 버스가 출발했는데 꽁무리를 두드리며 "아저씨~" 불러 세워 탄 사람.② 지난 정류장, 사고나기 전에 내려야 되는데 그만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다가 사고를 만난 사람.③ 69번스를 96번 인줄 알고 잘못 타고 가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하나님의 도움과 간섭이 없으면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다는데 오늘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택시를 타고 김포 공항으로 달려가는데 그날따라 길이 막히더랍니다.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타기로 예정되어있던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사고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누리는 많은 특권이 있지만 그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영 -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 8, 14)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주님 내가 험한 길 인생사 살아갈 때에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은 내 손 붙들고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3절에 보면 “이전에 나를 인도하신 주 장래에도 내 앞에 험산준령 당할 때 도우소서. 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나리.” 지금까지 여러분을 인도하신 하나님 어떤 어려움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 가장 구체적인 성경적 사건이 있습니다.
낮엔 구름으로 인도하시고
밤엔 불기둥으로 지키셨네
주께 맡긴 나의 삶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II.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400년 동안 노예의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탈출을 합니다. 이름하여 출애굽입니다.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은 정치, 경제, 문화, 무역 등 모든 것이 바벨론과 이집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과 이집트를 연결하는 편리한 도로망이 있었고 가나안은 이 도로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소위 해안길(Via Mavis)을 이용한다면 가나안까지 가는데 보름내지 늦어도 한달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길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애 13, 17) "블레셋 사람의 육로"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 길목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좌라고 되어 있는 곳이 블레셋 사람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당시엔 이 도로를 지키기 위한 군사 시설들 - 요즘으로 말하면 도로공사 본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종 편의 시설 - 요즘으로 말하면 휴게소들이 있었습니다. 여행하는데 불편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토록 편리하게 준비된 해안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홍해 광야의 길(출애 13, 18)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길은 멀고 거칠고 험악한 사막길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름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멀고 먼 길로 돌고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장소는 "람세스"입니다. 본문 20절에 이스라엘이 머물렀던 숫곳과 에담이란 장소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1장을 펼치면 이스라엘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라암셋"이란 땅이 나옵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도시를 건설했다는 장면이 나옵니다.(출애 1, 11) 이 라암셋은 당시 애굽의 왕 람세스 2세의 이름을 따 지어진 도시입니다. (람세스란 베스트 셀러 책이 있습니다.)
이처럼 람세스는 이스라엘이 기억하기조차 싫은 고통의 땅입니다. 노예로 살아가던 모진 학대를 받던 땅입니다. 출애굽은 바로 이 곳에서 시작되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옥의 권세, 죄의 노예로 살던 곳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영적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했다는 얘기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신앙 생활 여정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내 얘기라는 것입니다.
이곳 람세스에서 출발하여 첫 번째 머문 장소가 숫곳이란 곳입니다. 애굽 람세스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내려오면 이 숫곳은 "안식, 쉴 곳"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먼저 쉬게 하셨습니다.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을 취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에담으로 인도하고 본문에서는 "광야 끝 에담"(출애 13, 20)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홍해가 맞닿는 곳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절로 넘어가서 보면 바알스본 바닷가로 인도해서 하나님은 홍해서 이곳에서 건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수에즈만 앞바다 홍해로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와 보니 앞엔 홍해가 넘실대고 있습니다. 뒤엔 응징을 하겠다고 달려오는 애굽 군대가 달려옵니다. 독안에 든 쥐입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해가 안 되는 불합리한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얼마나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웠을까요? 구원받은 우리를 때로 이 고난의 길, 고통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길로만 인도하지 아니하고 때로는 당황스러운 길로 나를 가게 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보름이면 갈 수 있는 이 길을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다면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나를 파라다이스 천국 안식으로 인도하면 좋을 텐데, 때로는 시험에 들게 하고 실패로 넘어지게 하고 신앙생활에 갈등을 겪게 하고 영적 싸움에서 피를 흘리게 하고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III. 전쟁이 무서워 돌아갈까 하여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길로, 험하고 먼 길로 인도하시는가? 이에 대한 첫 번째 성경의 대답이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애 13, 17)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약함을 그들을 온전히 인도하는데 필요한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거기까지, 목적지 인생 가나안까지, 천국까지 하나님이 온전히 인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가끔 아픈 길이면 하나님께서는 아픔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가끔 장애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울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를 온전히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해안길을 따라 동쪽으로 직행하면 블레셋 지역을 통과해서 「가자」라는 땅에 이르게 됩니다. 팔레스틴 문제가 나올 때 마다 요즘도 등장하는 「가자 지구」말입니다. 이곳이 블레셋 주둔지입니다. 이곳을 통과하다 보면 반드시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로 무장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몰살하거나 피흘리고 죽었을 것입니다. 깜짝 놀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떠나왔던 애굽으로 돌아갈까 봐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으로 인도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애굽이 보호해 줄 거라고 구원 받고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에 도전해 봅니다. 지금까지 죄짓던 방법, 사기 치고 거짓말 하던 방법이 아니라 정직하게 한번 도전장을 내 봅니다. 그런데 만사형통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은 사업은 실패하고 장사는 어려워지고 낙심과 실망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별 볼일 없네 하고 우리는 자칫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오면 천국이 건설될 줄 알았습니다. 알파 코스를 겪을 때는 친절과 황후 왕자처럼 대접을 하더니 언젠가부터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싸늘해 지고 시험에 들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상처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에잇 예수 믿어도 별 볼일 없네.' 다시 세상으로 애굽으로 죄짓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가로 놓여 있는 홍해를 쩍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다음에 애굽군대가 쫓아올 때 물 속에 수장시켜 놓고 홍해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홍해로 돌아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돌아갈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로 돌아가겠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을 겪어도 옛 생활로 돌아가면 너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하십시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어떤 시련과 고난과 고통이 있어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이 나를 인도하는 인생길이 때로는 이해가 안되고 도무지 용납이 안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돌아가면 망하는 길입니다. 돌아갈 만한 길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장면들을 보면 대단히 장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 대열을 지어 나옵니다." 열을 맞추어 질서 있게 당당하게 마치 특공대나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들이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이 완전히 항복을 한 상태였습니다. 겁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루어 이길 수 있을만한 백성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노예 생활만 했습니다. 온갖 핍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훈련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늘 매 맞고 끌려 다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 하여 좀 넓고 편하고 쉽다고 하여 해안 길로 가다간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에 몰살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블레셋을 만나서 큰 피해를 입고 몰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처음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 나올 때에 성경책을 가슴에 끼고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교회에 옵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다 이겼도다. 어린양의 피로~ 승리의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 영적싸움에 한번 부딪혀보면 꽈당~ 넘어지거든요. 사단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문제가 내 앞에서 순식간에 다 물러가고 도망가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1년 2년이 지나도 성품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있었던 친구관계도 그대로 있고 습관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섣불리 덤비다간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덤비다간 넘어지기 쉽상이라는 것입니다.
IV. 광야의 위험(광야길 - 녹녹한 길이 아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준비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룩하고 소중한 제사장 나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출애 19, 5-6)
광야의 삶은 단순히 블레셋을 피해 도망간 곳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던 곳입니다.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돌보고 인도하시고 나를 지키시는가를 경험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고 경험하고 알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광야길이 그렇게 녹녹한 길이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광야엔 수많은 위험들이 도사려 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위험들이 도사려 있었습니다. 이곳 시나이 반도는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 땅의 3배가 더 넓습니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서 유목민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광야의 삶은 “how to live.” - 어떻게 우리가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how to survive.” -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만 있는 곳입니다.
1) 사막엔 물과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2) 사막의 낮은 살인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식물들이 바싹바싹 말라 죽어갑니다. 가시모양 잎사귀로 한 나무들 몇 포기만 있습니다.
3) 밤에 기온이 급강하합니다. 추위 견디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해치 못하리」 광야는 하나님 없이 살기 불가능합니다.
4) 사막엔 길이 없습니다.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할지라도 모래 바람 한번이면 길은 없어집니다.
5) 맹수와 거친 사막 족속들이 노략과 약탈을 일삼습니다.
이토록 거친 사막길 그게 구원 받아 살아가는 이 세상길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날 모든 적이 물러가고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신종 플루다 뭐다 걱정하는데 교회에 와 예배 한번 드리고 나면 신종 플루가 가까이도 못 오고 원자폭탄이 북한에서 뚝 떨어진다 할지라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 몽땅 다 불에 타 죽는데 우리는 끄덕 없고 그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번 예배 드리고 나면 유혹도 사라지고 마귀의 도전도 사라지고 실패도 걱정 근심도 없이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건설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지 못하다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V.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아처럼 사막의 위험에 혼자 살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단의 도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해결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견디어 내나 구경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지켜주십니다. 이게 구름 기둥 불 기둥입니다. 여기 구름 기둥, 불 기둥은 구름이 두 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세키나"라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였겠지요. 구름이 빛이 나기 때문에 아마 불 기둥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세키나" 구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너 혼자 광야 여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나는 너를 보호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를 믿고 따르면 네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다. 우리가 믿고 믿음 생활을 출발했습니다. 믿고 인생여정을 걸어가면 하나님의 손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천국까지 안전하게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실패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시험 때문에 쓰러지지 않습니다. 도전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키나는 장정만 60만 적어도 200만 대군이 사막을 여행할 때 당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낮에 구름기둥이 큰 그늘을 만듭니다. 사막은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늘만 생기면 시원해집니다. 요나가 박 넝쿨 하나에 그늘이 생겼을 때에 심히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밤에는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막아주는 거대한 난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군대 사이에 세키나 - 구름기둥 불기둥이 거대한 광경을 만들어 그들을 혼란 속에 빠뜨려 천군천사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타 죽을까봐 구름기둥으로 얼어죽을까봐 불기둥으로 애굽 군대에 맞아 죽을까봐 천군천사역할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세상 살아가다가 세상이 따갑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구름으로 여러분들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외롭게 고독하게 느껴지십니까? 춥게만 느껴지십니까? 성령의 불로 말씀의 불덩어리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길 없는 사막길 이정표 하나 없습니다. 지도 하나 없습니다. 나침반 하나 없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친히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면 영원히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200만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했다. 먹을 것도 없는데 잠잘 곳도 없는데 입을 옷도 없는데 여러분 역사상에 일어났던 위대한 기적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으면 이 세상에 온갖 유혹이 있고 온갖 시험이 있고 온갖 갈등이 있고 여러 가지 상처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한번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면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어떤 시련과 도전과 유혹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망하지 아니하고 쓰러지지 아니하고 실패하지 아니하고 천국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했듯이 우리 모두는 천국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따르면 식량 없으면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물이 없으면 반석을 터뜨려서 생수를 쏟아지게 합니다. 천연암반생수를 보내주십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길이 되어 주시고 지도가 되어 주십니다. 추우면 불이 되어 주시고 더우면 구름이 되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걸핏하면 원망합니다. 불만에 쌓인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쉽상입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원망하면 망했습니다. 때로는 이해가 안되어도 실패의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찬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가? 어떤 사람이 말씀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책을 펼쳐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그날의 인도라고 믿기로 했더랍니다. 척 펼쳤더니 "가룟 유다가 목매달아 죽으니라." 이건 아니겠지. 두 번째 펼쳤더니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아니 이건 아니야~ 세 번째 펼쳤더니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오늘 내겐 왜 구름기둥 불기둥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의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도의 말씀으로 듣고 아멘하면 이 말씀이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믿기로 결단하면 말씀대로 살다가 망하더라도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면 이 말씀이 구름기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의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 이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면 성령이 불기둥이 되어 주십니다. 영적인 전쟁을 치른다 할지라도 주의 보혈로 말씀의 칼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더욱 고상하고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모세를 보내주셨듯이 교회와 공동체를 보내주시고 오늘도 영적인 지도자들을 우리 곁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천성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마지막절 13절 22절에 보면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믿고 광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왜 나를 돌보지 않느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한순간의 실패와 고난이 하나님이 영원히 떠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지하철 경로석에 한 젊은 여인이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더랍니다. 할아버지가 흔들어 깨우며 "아가씨 일어나 여긴 경로석이야 경로석." 그러자 아가씨가 눈을 비스듬히 뜨고 "할아버지 저도 돈 내고 탔어요." 할아버지가 "이봐 아가씨, 여긴 돈 안내고 타는 사람이 앉는 거야."
불기둥 - 난로 값 내고 얻은 은혜가 아닙니다. 구름기둥 - 에어컨 값 내고 쓴 것이 아닙니다. 만나 - 밥값 내고 먹은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고 은혜로 성령 받았고 은혜로 말씀 받고 은혜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곁을 떠난 것처럼 낙심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되느냐고 세상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고난의 한복판에서 울어야 하느냐고 낙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해진 시 한 토막을 읽고 오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모래 위의 발자욱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쌍의 발자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발자욱을 따라 그의 지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하늘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 수가 있었습니다. 생애의 한 장면마다 모래 위에는 언제나 두 쌍의 발자욱이 남아 있다는 것을.그의 발자국 옆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발자욱도 같이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나온 생애가 한 장면 한 장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는 모래 위에 남긴 발자욱을 다시 한번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동안 모래 위에는 한 쌍의 발자욱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 생각해 냈습니다. 이 기간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괴로운 기간이었다는 것을. 그러자 그는 무척 슬프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그런데 내가 가장 슬프고 괴로웠을 때 그때 주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게 주님이 가장 필요했을 때 주님은 나를 떠나셨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랑스런 내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결코 버린 적이 없단다.네가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네가 가여워 너를 품에 안고 걸었단다.그래서 모래 위에는 나의 발자욱만 남아 있는 거란다."(작자 미상의 영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