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다가
표시한 부분 중에 이런 귀절이 있었습니다.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워즈워스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냇물과 숲이 우거진 웅장한 골짜기를 굽어보면서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
지난 주말 남편과 단 둘이 간 1박 2일의 강화도 여행이
이 표현과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한 해는 내게 참 여러 가지로 특별한 한 해 였습니다.
큰 딸과 작은 딸이 다 입시생이어서 대한민국 입시생 엄마가
겪는 그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다 경험했습니다. 밤 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기 위해 소파위에서 잠을
설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운전을
해야 했고, 아이보다 늘 먼저 잠을 자는 게 미안했고, 누군가가
미워질 때도 우리 아이들에게 불운을 가져다 줄 것 같아 마음 껏
미워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큰 딸이 수능을 보는 날
아이를 시험보는 장소 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내가 진짜
엄마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 마음 졸인 한 해 였습니다.
2009년 올 해는 안식년을 가지고 싶었고,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싶었는데 큰 딸은 재수를 시작했고, 작은 딸은 주중엔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주말엔 집으로 돌아오는데 거의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그런 생활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올해가 끝나도
내년에는 작은 딸이 대학 입시 준비를 하기 때문에 또 입시생 엄마가
되어야 하고. 그런 생각 이런 생각으로 그만 병이 나서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여행이었습니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숙박할 곳과, 주변의 볼거리, 그 곳에서
먹어 볼 음식등에 대해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강화도는 내가 몇 년 동안
일년에 서너번 이상은 다녀오던 곳이라 내게 일임을 했습니다. 나는
'역사가 숨쉬는 보물섬 강화도 이야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석모도, 교동도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맛있는 것 먹고, 가다가 보고 싶은 데 있으면 보는 그런 여유있는 길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알아서 밥을 챙겨 먹어라고 말하고 남편과 나는 토요일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겨울철이어서 그런지 강화도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고 11시 40분 쯤
강화도에 도착했는데 점심은 '토가'라는 음식점에서 먹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강화도에 가서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가던 곳인데 길눈이 어두운 나는
그곳을 제대로 안내하지 못해 남편에게 한 소리 들었습니다. " 당신은 어디 갈 때
멍하니 차 타고 가니까 맨날 가는 길도 모르지. 다음 부턴 제발 제대로 알고 가자고 해."
'토가'를 찾느라 가다가 차 세우기를 몇 번 했으니 짜증이 났을텐데 그 한 마디만
해서 관찰력 없고 주의력이 없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토가를 가는 길에
동막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분오리 돈대에 들렀습니다. 망원경과 쌍안경을 들고 돈대에
올라갔으나 썰물 때여서 새를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바위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돈대 바로 아래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고 다녀 까마귀에게 촛점을 맞췄습니다.
까마귀 부리위에 남자 수염처럼 갈색의 털이 길게 나 있는 것을 관찰하고 분오리 돈대에서
큰 수확을 얻었다고 애써 내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4,5월 쯤이면 이 곳에서 노랑부리저어새를
관찰할 수 있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돈대 아래 덤불 속에 처음 보는 새가 있어 자세히
보려는 순간 새는 숨어버리고 도감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오랜만에
길 떠난 표시가 난다고 혼자 혀를 차면서 봄이 오는 분오리 돈대의 흔적을 찾아서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괴불주머니
첫댓글 첫 글귀가 참으로 새겨지네요. 그런 여행을 다녀오셨다니 부럽습니다. 그리고 두딸의 엄마가 된 저도 샘처럼 진짜엄마가 되었다고 느낄 날이 오겠지요? 샘처럼 열심히 해 줄 자신은 없지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