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메일로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을 읽기를 권했다. 우리 부부는 5월 아들 집을 방문하여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로 계획을 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관람도 계획에 넣었다고 했다.
영어를 듣기가 어려울 테니 미리 소설을 보아두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런 류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 접해보지 않았지만 뮤지컬을 그나마 흥미롭게 보려면 줄거리를 알아야겠기에 책을 넘겼다.
이야기는 너무 치밀해서 마치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 같았다. 프랑스 이름은 자주 헷갈려 책장을 뒤로 넘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로 새로운 이름이 나올 때마다 메모를 하며 읽어야 할 지경이었다.
작가 가스통 르루는 한 세기 전의 인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로, 당대에는 기자로서 필명을 떨치기도 했다고 한다. <오페라의 유령>은 1910년 작품인데 실제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 배경의 거의 대부분은 미로처럼 얽힌 오페라 극장의 내부 구조다. 소설은 마치 지하 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무대 아래 지하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하가 주는 의미는 컴컴함과 음산함이다. 희미한 전등불 너머에는 언제나 어둠이 어른거린다.
소설은 오페라의 유령인 에릭, 그리고 그가 사랑하지만 사랑을 주기를 거부하며 맞서는 크리스틴,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랑하며 보호하려는 라울이 삼각구도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상상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
뜻밖에도 샤니 자작 라울을 돕는 신비로운 페르시아 인, 서로 상반된 캐릭터를 가진 두 극장장, 라울을 아끼는 그의 형으로 돌연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된 샤니 백작,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양념 같은 인물 지리 부인 등이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그저 변죽을 울리다가 조금씩 사건의 실체로 다가가고 그러다가 끝무렵에 기상천외한 반전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오페라의 유령이 등장하여 일단 독자들의 긴장감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러나 읽다보면 오페라의 유령의 실체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어떤 경우는 틀림없는 유령이고 또 어떤 경우는 실제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런 혼돈은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오페라의 유령인 에릭의 파란만장한 과거가 뒤로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흉측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늘 가면을 쓰고 다녔으나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복화술이나 마술의 대가였다. 그런 그가 여러 나라를 거쳐 마침내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페라 극장 건축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미 일찍이 건축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바, 오페라 극장의 지하 공간을 자기만의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그리고 뛰어난 복화술로 오페라 극장의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점령해갔다.
그런 와중에 그는 극장 여가수 크리스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치밀하게 전개되어 간다. 공연 중에 여가수가 사라지고, 여주인공이 노래하는 도중 목소리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극장의 상들리에가 떨어지기도 한다.
반면 유령은 크리스틴의 음악 교습을 통해 천상의 목소리로 거듭나게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유령의 존재에 깊은 유대를 보였지만 그의 사랑 고백을 받은 후로는 마음의 갈등에 휩싸였다. 그 즈음 샤니 자작 역시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터였다.
여기서 삼각관계는 갈등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고, 오페라의 유령인 에릭의 지하 세계 속의 치밀한 계략들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마침네 오페라의 유령은 공연 중의 크리스틴을 납치해 지하 세계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한편 무대 위에서 공연 중에 프리마돈나가 사라지자 소동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라울은 크리스틴을 무작정 찾아 나선다. 그때 라울을 도와 안내를 자청한 페르시아 인이 나타난다.
나중에 페르시아 인의 기록에서 발견된 바에 따르면 그는 에릭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과거에 에릭이 사형의 위기에 처할 때 그 일을 맡았었고 그를 사형으로부터 몰래 구해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에릭의 악행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래서 저지시키려 애썼다.
두 사람은 무대 지하로 내려가 앞을 알 수 없는 미로를 더듬다가 결국 그들은 에릭이 만들어 놓은 고문실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크리스틴이 에릭과 결혼을 하기로 함으로써 두 사람은 거의 죽을 뻔한 순간에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에릭은 잠이 든 페르시아 인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마침내 라울을 크리스틴에게 데려다 준다. 자기의 절절한 사랑에도 크리스틴의 마음은 라울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마침내 지하 세계에서 내보내 준다.
프리마돈나에 대한 일그러진 영혼의 지독한 사랑의 대서사도 시각적 감정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사랑은 일장춘몽으로 그치고 말았다. 더구나 페르시아 인의 등장으로 그의 과거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짐으로써 그의 절절한 사랑은 다소 빛이 바랬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크리스틴, 그리고 흉측한 외모의 오페라의 유령이 들려주는 환상적인 음악,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라울,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 향해 가는 유령의 처절함은 읽는 내내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크리스틴을 위해 에릭이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평생 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는 장면은 극적이다. 에릭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가면을 벗고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극명하게 부딪히는 그 순간을 크리스틴은 견디지 못했다.
에릭은 그 후 페르시아 인을 찾아가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죽은 후에 어떻게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그의 집을 나서 오페라 극장으로 향한다. 삼 주 후 에릭이 죽었다는 부음기사가 났다.
소설의 화자는 라울과 크리스틴은 고요한 스칸디나비아 노르웨이 맑은 호숫가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소설은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얼마 전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었던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소설은 화자가 등장하여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형식이다. 그는 오페라의 유령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으며 과거의 증언이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퍼즐 맞추기 하듯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