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품을 선호하는 20대 후반 한국 여성들©cafe.naver.com/sslive4 |
'명품업계, 일본 등지고 중국으로', '명품 베르사체, 일본에서 짐 쌌다'. 얼마 전 언론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의 명품시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앞 다퉈 보도했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업체들이 일본시장에서 하나 둘 발을 빼고 있다.
이탈리아 명품업체 지아니 베르사체는 일본에서 명품 수요가 감소하자 일본 매장을 철수하기로 했다. 세계 최대 명품업체인 루이뷔통도 지난 12월 도쿄 긴자의 대형 매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황을 모르고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던 루이뷔통 핸드백이 올 상반기 6개월간 20%나 매출이 줄어드는 등 맥을 못 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마르니는 5년 만에 일본 매장을 닫았으며, 샤넬도 일본 큐슈에 있는 부티크를 철수했다.
지난 6월 야노 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명품 의류, 가방 등의 소비는 전년 대비 10% 감소한 1조600억엔(119억달러)으로 집계됐다. 야노 리서치는 올해 소비 규모는 9927억 엔으로 더욱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렇게 명품 최대 시장인 일본의 하락세에 명품업체뿐만이 아닌 세계가 놀라고 있으며 일본을 빠져나간 명품업체들은 중국, 카자흐스탄 등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일본 명품마니아 '단카이 세대'의 변심 일본 내 명품 소비의 감소는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경제위기로 인한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일본의 소비 심리가 취약해지면서 명품 주 고객층들의 명품 선호가 크게 줄어 든 것이다.
일본의 소비는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50대)와 이들의 자녀(20대 중반~30대 초반)가 함께 이끌어 나가고 있다. 이들 중 일본 명품의 소비자층은 대부분이 베이비붐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8년을 전후로(1946년~1951년)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데, 인구가 70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은 ‘인구 피라미드 위의 툭 튀어나온 덩어리’라는 뜻에서 단카이(團塊 덩어리) 세대로도 불린다.
단카이 세대는 주택 할부금 상환과 자녀들의 교육이 끝나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따라서 이전 세대에 비해 소비성향이 강하며 인구가 많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심지어 가장 경제가 어려웠던 90년대에도 휴가나 여행, 외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루이 뷔통 백이나 에르메스 스카프를 구입하려던 이들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소비성향의 변화를 맞고 있다.
더불어 주요 소비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녀세대가 단카이 세대만큼 명품에 열광하지 않는 것도 일본 명품 시장 위축의 한 요인이다. 일본의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싼 것이 멋진 것'이라는 인식이 많이 확산되었으며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일본 전역에 퍼지고 있는 중고품 매장에서 필요한 상품들을 구입하는 것을 즐긴다.
한국, 명품에 열광하는 20대 후반 여성 일본에 단카이 세대가 있다면 우리나라 명품 시장의 중심에는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있다. 단카이 세대는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명품에 열광하여 세계 최대의 명품 시장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 20대 후반 여성들은 마치 이러한 단카이 세대의 젊은 날을 보는 듯하다.
이들은 한 달 치 월급 혹은 보너스를 털어서라도 명품을 구입하고 과시욕과 만족감 혹은 자신감을 느낀다. 얼마 전 중소기업 경리직에 취직한 신 모(26)양은 "아직 넉넉한 사정은 아니지만 취직을 하면 명품백을 꼭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무이자할부로 명품백을 질렀다"고 말했다.
길거리나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3초마다 이 가방을 든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일명 '3초백'으로 불리는 '루이뷔통 모노그램 스피디'는 20대 후반 여성들의 MUST HAVE 아이템이 되었다. 가방 뿐 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들의 패션은 구찌나 코치, 샤넬 등의 명품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20대 후반의 여성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도 명품에 열광한다. 이들은 점심 식사 후에는 고가의 스타벅스, 커피빈 등의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주말이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 만원에서 5만원 상당의 한 끼 식사를 즐긴다. 이 밖에 일반 생수 가격의 몇 배, 몇 십 배에 달하는 명품 생수를 찾는 20대 후반 여성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거 불황에도 100달러짜리 멜론을 즐겨 찾던 단카이 세대와 흡사한 모습이다.
20대 후반 여성들이 명품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제품 자체의 품질이 우수하고 소장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명품을 소지함으로써 느끼는 신분 상승의 기분과 과시욕, 그로 인해 얻어지는 자신감이다. 장 모(28)씨는 "명품 가방을 들면 어깨가 펴지고, 명품 청바지를 입으면 저절로 힙업이 되는 기분이다. 남들이 나의 명품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고 그만큼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우리의 소비생활도 돌아봐야 할 때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는 일본뿐만이 아닌 우리나라의 해외 명품 시장도 휘청이게 했다. 그러나 롯데백화점의 에비뉴엘관에 입점했던 말로, 커스텀내셔날, 안테프리마 등이 철수 했을 뿐 명품 마니아들 덕분에 루이뷔통과 샤넬 같은 주요 명품 업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의 사례로 미루어 보아 현재 한국 명품 시장의 주요 소비자층인 20대 후반 여성들은 단카이 세대와 같이 앞으로 몇 십년간 명품에 더 열광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불황에도 아랑곳 않고 명품 소비는 증가할 것이며 이를 기회로 삼은 해외 명품 업체들은 중국, 몽골 등과 함께 한국에도 더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만을 상상할 수는 없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 경기침체에도 끄떡 않고 명품마니아를 자청했던 단카이 세대가 이제는 '월마트 쇼핑족'이 되어 더 저렴한 물건을 찾는 등 알뜰 소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같은 전처를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일본의 명품 시장이 다시 살아날 지 예측할 순 없지만 가까운 나라 일본의 변화에 우리의 소비생활도 한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태풍이 닥치기 전에 우비를 껴입기 보다는 축대와 담장을 점검하고 더욱 단단히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