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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1-5
▣ 형제들과의 관계-로마서 14장-
로마서 14장 1절-15장 7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의문스러운 일들“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각 지교회에 성숙한 신자들(“우리 강한 자“- 15:1)과 성숙하지 못한 자(“믿음이 연약한 자“- 14:1)가 있음을 인정하며, 이 두 그룹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부조화가 생기는 것을 인정하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성일들과 율법에 제시된 먹는 규례를 고수하려 한 반면에, 이방인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방종으로 바꾸었으며 유대인 형제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일을 지키며 먹는 규례를 따르는 등의 극단적인 율법주의가 강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가 진리라고 서술한다 ! 골로새서 2장 18-23절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믿음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세상적인 오락과 같이 의문스러운 행동 강령에 대하여 생각들이 다르다. 바울은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대처하여 해결할 것인가하는 방법을 말해 준다. 그는 규칙들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수 있는 여섯 가지 기본적인 원리들을 기록한다. 이 원리들을 질문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우리 자신의 생활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나는 온전히 확신하는가 ?(14:1-5)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감정에 따라서 행동해서는 안되며 기도와 말씀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내적인 확신에서 행동하여야 한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확신 가운데서 행한다면 아무런 논쟁이 없을 것이다. “견해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며, 확신이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강한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자를 성숙하지 못했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 보다 성숙한 형제를 심판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 다 용납하셨으므로 이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아야 하며, 인간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이끌려서는 안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 또는 어떤 일들을 삼가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이 그의 생활을 조절한다."
롬 14:6-9
2.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을 향한 것인가?(14:6-9)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산다“는 식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죽거나 살거나 우리는 여호와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만 한다.
자기의 생활에서 의문스러운 실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하여“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그러한 실천 생활을 하는 것이며, 주님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만일 주님께로 향하여 특별한 날들을 지킨다면 주님께 영접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그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롬 14:10-12
3. 이 일은 심판대의 시험을 견딜 것인가?(14:10-12)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과 생활이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시험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흰 보좌의 심판은 아니지만, 교회가 본향으로 소집된 후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한 시험이다(고후 5:10/고전 3:1-).
나는 내 형제의 생활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므로 오늘날 그를 정죄할 권리가 없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서 불시험을 견디는 생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상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롬 14:13-21
4. 나는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고 있는가?(14:13-21)
우리가 판단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분명히 그 일 자체는 부정한 일이 아닌데 어떤 실천상황과 습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하게 생각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의도적으로 나의 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을 한다면 나는 사랑의 규율에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여 죄에 빠뜨리는 일은 심각한 일이다. 마가복음 9장 33-50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유의하자. 여기서 “범죄케 한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다“는 뜻이다. 의문스러운 행동 강령에 붙들려 있어 다른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행실에서 떨어지게 하는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무서운 댓가를 보지 못할 정도로 눈멀어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선함이 오히려 나쁜 말을 듣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먹고 마심과, 또한 그 밖의 어떠한 것들이 아니고 의와 평강과 기쁨이며,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을 즐기기 위한 이기적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사랑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세워 주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율법 아래 사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우리를 세우거나 다른 이들을 세워 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진술한다(고전 8장 참조).
로마서 14장 15, 20절에 나오는 “망하게 하다“는 말은 “헐다, 잡아떼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이기적인 삶 때문에 다른 신자의 영적인 생활을 헐어 버린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가. 그의 실재 생활이 합법적일 수는 있으나, 이것은 사랑의 법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롬 14:22-23
5. 나는 믿음으로 이 일을 하는가?(14:22-23)
여기서 “믿음“이란 말은 우리의 신념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생겨난 확신에서의 “확신하다“는 뜻과 거의 같다.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신자와 주님 사이에서 전개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그가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해야만 한다는 원리를 세워 준다. 자기의 실제 생활에 대해 의문이 있으면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23절의 “정죄되었나니“라는 말은 영원한 형벌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유죄 판결을 받다“는 말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태도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기가 행하고 있는 그 일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뒷받침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죄이다. 그 일을 믿음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부정한 것이다 !“는 말은 따르기에 알맞은 방책이다.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우유나 물을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독이 들었을 음식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의문을 제기하는 관습까지도 부주의하게 행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의심스러운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죄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롬 15:1-7
6. 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 중,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15:1-7)
강한 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이들을 세워 주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근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해야 한다.
바울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하였는데, 이 구약의 구절이 신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물론 적용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인내와 위로와,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오는 소망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한 마음(“한 마음“-likemined)을 가져야 하며, 만일 모든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우려고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7절에는 “서로 용납하라“는 바울의 마지막 결론이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기본 원리들을 고찰하면서 이 원리들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실천적인 것인지를 보게 된다. 지교회는 사역에 힘을 얻는 데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기준들을 설정할 권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의문스러운 관습의 문제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활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이 이웃을 세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숙한 교회가 될 것이다."
롬 15:8-13
▣ 그리스도인의 수고-로마서 15장-
본 장은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관계되며, 우리가 깨닫고 이해해야 할 세 가지 다른 사역을 보여 준다.
1.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지 사역(15:8-13)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이방인에게“라는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사역을 깨닫지 못하는 성경 연구자는 진리의 말씀을 결코 옳게 분변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 그의 오심이 유대 민족에게 전해 졌으며, 왕국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과 연관되었다. 8절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언약들과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사역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누가복음 1장 30-33, 46-55, 67-80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라. 이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여 약속된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스라엘은 자기의 왕을 세 번에 걸쳐 거절하였다. 이들은 헤롯이 왕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을 죽이도록 버려 두었으며,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스데반을 죽였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왕국이 건설되고 회심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축복이 흘러갔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제 이방으로 가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흥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인함이라고 밝혔다. 9-11절에 그 진행의 방식이 나온다. 이방인들이 말씀을 들으며(시 18:49) 유대인들과 함께 기뻐한다(신 32:43).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며(시 117:1),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통치를 즐거워한다(사 11:10).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역사를 거의 요약하고 있다.
-유대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함(9절/ 행 10-14장)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에 참여함(10절/ 행 15-28장)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바울에 의해 제쳐지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탁월한 위치에 오름(11절/ 행 28장 이후 계속)
-이방인들이 참여할 미래의 왕국(12절)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주제로 찬양한다. 12절은 왕국이 통치할 미래의 그날을 말하며 “열방이 그를 믿을 것이다“(또는 소망을 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13절의 기도를 통하여 “소망“의 주제를 끌어 낸다.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가지기 위하여 왕국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그러한 축복들을 지금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
롬 15:14-22
2.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역(15:14-22)
바울은 그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임을 강조하는 데 매우 열심이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에서 바울의 사역이라는 특별한 입장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개신교“를 이처럼 혼란과 무력함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다.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의 찬양의 제물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신약의 제사장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에 또다른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바울의 특별한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는 특별한 멧세지를 담고 있으며(16절), 특별한 기적들(18-19절)과 특별한 방법(20절,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앉은 곳으로 감)을 갖고 있다. 바울은 개척자였으며, 그는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이스라엘과 교회를 혼합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이를 뒤섞는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고전 1:22), 하나님은 또한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행 19:11-12 절의 에베소에서). 사도행전 7장(이스라엘의 마지막 거절) 이후에도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 민족을 다루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오는 것은 방해되고 있었는데, 이는 사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된 많은 곳에서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지역을 거친 후에 이제 로마를 향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바울이 기꺼이 로마에서 전파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 곳에 다른 사도들, 예를 들면 베드로 등이 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의 방침은 개척 지역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롬 15:23-33
3. 유대인에 대한 이방 교회들의 사역(15:23-33)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로 가기를 소원하였다. 그가 그 곳에 도착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갔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당시에 그는 자신이 세운 이방 교회들이 기부한 구제 헌금을 가난으로 찌든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가져가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상세한 것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고린도후서 8-9장을 참조하라.
바울은 이 구제 헌금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말한다.
영적인 빚(27절)-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받았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정말로 빚이 있는 이방인이라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사랑-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헌금으로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연합(31절)-유대인 신자들 중에 더러는(행 15장 참조) 그 무리 중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 헌금은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말에 의해 생긴 불화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 일은 오늘날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대한 책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프로그램은(1:16)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원리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1-7장에서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책무는 지상명령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직무이며, 우리를 택하시고 참 감람나무에 우리를 접붙이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고(롬 11:20-), 로마서 10장 11-17절의 명백한 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죄에 관한 한 아무 차별이 없듯이, 구원에 관해서도 아무 차별이 없다.
이스라엘은 비록 무대에서 임시적으로 퇴장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며, 이스라엘은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롬 11:28). 그리스도인은 반 유대적인 감정이나 관습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인도해야만 한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앞을 보지 못하였으나, 유대인 개개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1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예상하였음에 유의하자. 그런데, 그러한 마찰이 일어났다 ! 사도행전 21장 15절 이하를 재고하고,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유의하자.
본 장은 유대인과 이방 교회 사이의 중요한 특수성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장이다(고전 10:32). 사실 로마인들에게 말한 바울의 마지막 발언은16:25-27)교회에 대한 위대한 비밀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롬 16:1-16
▣ 형제들에게 보내는 인사-로마서 16장-
본 장은 깜짝놀랄 일들로 가득 찬 독특한 장이다! 여기 열거된 사항들을 읽어 가노라면, 바울은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로마로 갈 것을 알고 있는 바울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일이 없고 이들을 다른 도시들에서 만났을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주인이 그러하듯 양들을 그 이름으로 알고 있었으며, 각각을 향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 바울이 문안하는 성도들(16:1-16)
로마에 사는 신자들은 한 전체적인 교회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여러 집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5, 10, 11, 15절). 조직적인 의미의(빌 1:1) 로마 교회가 없었다는 것은 베드로가 거기서 교회를 조직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이다.
뵈뵈는 로마로 가고 있는 집사 부인 또는 여집사인 것이 분명하며,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이다. “그녀를 영접하고... 도우라“는 구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좋은 권고이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법적인 문제가 있어 로마에 갔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특별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그녀에게 도움을 베풀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다시 만난다 ! 바울에게 이들은 얼마나 소중한 친구들이었는가!(행 18:2-28/고전 16:19/딤후 4:19) 이 두 성도들이 언제 바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무릅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을 구원한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들에게 참으로 큰 빚을 진 것이다 !
그들은 박해로 인하여 로마를 떠났다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고, 이제는 로마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우며, 주님의 섭리의 역사하심은 얼마나 기이한가 !
본 장에는 아홉 여인의 이름이 나온다. 뵈뵈(16:1), 브리스길라(16:3), 마리아(16:6), 드루배나(16:12), 버시(16:12), 드루보사(16:12), 루포의 어머니(16:13), 율리아와, 네레오의 자매(16:15)들이다. 어떤 이들은바울이 여인들을 불리하게 대한다고 비평하지만 그보다 더 이교의 속박에서 여성을 해방하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의도하신 방법으로 여성의 권위를 존중한 사람도 없다.
바울이 지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여성이 어떤 특정한 지위가 있다고 가르치기는 했으나, 여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설교하도록 부르시지는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여성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고 축복을 받고 있는가 !
몇몇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의 “친척“을 언급한다(7, 11, 21절). 이것은 혈연의 친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유대인, 아마도 베냐민 지파를 말하는 것같다.
7절은 바울보다 먼저 구원받은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루포가 흥미있는 인물이다(13절).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십자가를 진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성도들이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의 아버지가 사실상 시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를 주님께 인도하였다. 만일 그와 그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면 바울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바울이 그녀를 자기의 수양 어머니로 모셨을 수도 있다."
롬 16:17-20
2. 피해야 할 몇몇 죄인들(16:17-20)
이러한 경고는 인사들로 가득 찬 본 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처한 위험을 알았으며 성도들을 경고하고 싶었다. 물론 우리는 각각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용서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 기관에 대항하는 죄들은 성경적인 징계에 따라 처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대개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들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교만을 범한다. 이들을 지교회에서의 친교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표를 해두고 그들을 피하라!“ “표한다“는 말은 “주시하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달리며 문제와 분열을 일으키는 “교회 방랑자“들에게서 교회가 눈을 떼지 않는 일은 바른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연하게 말하며“ 단순한 사람들을 우롱하는 법을 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성도는 그들의 속임수를 꿰뚫어 볼 것이다. 사단을 정복하라. 그가 당신을 정복하게 하지 말라."
롬 16:21-24
3. 영광을 받을 몇몇 종들(16:21-24)
베테랑들이 많이 기록된 놀라운 명단이다.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요 주님의 종인 디모데가 나온다(빌 2:19-22). 안디옥에서 초창기에 그를 조력하였던 루시오(행 13:1)도 있다(이 사람이 누가인 것 같지는 않다). 야손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함께 여행하였으며(행 17:5-9), 소시바더는 베뢰아 사람이었다(행 20:4).
바울은 이 동료들을 사랑하였으며, 이들이 없었다면 사역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바울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더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더디오는 성령께서 바울에게 지시하실 때 이를 편지로 받아 쓴 서기(비서)였다. 이 사람은 로마인으로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인 것 같다.
가이오는 사도행전 19장 29절에 언급된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또는 더베의 가이오일 수도 있다(행 20:4).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 나오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며, 바울이 고린도 사역 기간 동안에 세례(침례)를 베푼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고린도에 있었는데, 이 말이 그가 가이오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데에 영감받은 사도와 충성된 서기(또는 비서), 친절한 그리스도인 주인, 희생적인 여인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에라스도는 그 도시의 재무관이었으며, 복음이 그 시의 관원 가족에게도 전해졌음을 보여 준다(빌 4:22). 그는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 언급된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형제 구아도 !“ 바울에게 있어서 언급하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성도란 없었다 !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을 읽고 여기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바울은 언제나 그의 편지들을 그의 “은혜의 표적“으로 개인적인 서명을 하였는데(살후 3:17-18) 여기 24절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비밀을 강조하는 이 위대한 송영을 첨부한 것인 듯하다. 27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진리들을 계시하는 데 사용하신 신약 선지자들이다(행 13:1/행 15:32/행 21:10/고전 12:28-29/고전 14:29-32/엡 2:20/엡 3:5/엡 4:11 참조).이렇게 하여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완성된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27절은 현실이 될 것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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