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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입니다. 이 카페는 감찰공파 뿐만 아니라 함안조가의 카페입니다. 이 글을 관계자 및 함안조가들에게 널리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웅래 올림
저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이 고향인 59년생 조웅래입니다. 평소 관정 스님이 운영하는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 유사’ 카페의 감찰공파 집안의 족보 번역을 부러워만 하다가 스님의 거듭된 권유와 친절한 지도로 대소헌의 족보를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후손으로서 조금의 긍지도 생겼습니다. 관정 스님께 감사드리며 대소헌 조종도의 당당한 선비의 삶을 알고자 하는 후손에게도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함안조씨 충의공대소헌파의 파조 조종도의 족보 번역
대소헌 조종도 趙宗道, 1537∼1597, 61세 卒, 함안조씨 17대, 충의공(忠毅公)대소헌파(大笑軒派)의 파조, 충의공, 진주 촉석루의 3장사 중 한 명, 정유재란 때 함양군수(종5품)였는데, 함양 황석산성전투에서 순절했다. 증 이조판서(정2품).
조종도(趙宗道) 자는 백유(伯由)이고,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1537년 2월 5일에 태어나서 1597년 8월 18일에 순절했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1558년,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태학의) 천거로 관리가 되어 여러 군과 읍을 맡아서 전근하면서 다스렸다. 임진왜란 때 (조선 최초로) 의병을 모집했다. 정유재란 때 함양군수였는데, 1597년 8월 18일에 안의(安義)의 황석산성전투에서 순절했다. 사후에 임금이 자헌대부(정2품), 이조판서(정2품)겸 지의금부사(정2품), 오위도총부도총관(정2품) 등의 벼슬과 함께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시호법을 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을 “의(毅)”라 한다고 정의해 놓았다. 임금이 조종도의 정려를 세우라고 지시하여, 사부(師傅, 세자들을 가르치는 스승) 박제인이 비문을 지었다. 그 비문에는 “품성이 강직하고 발라서 평생 올곧음 하나만 지켜왔네.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꾀해 피하지 않고, 풍상을 겪으면서 절의를 지켰도다!”고 쓰여 있다. 임금이 너그러이 그 유족의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주었고, 그 외에도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 임금은 “조종도의 위패를 사당에 모시라”고 지시했다. 임금이 전조(銓曹, 문관의 선발과 포상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에 지시하여, “그의 자손들을 관리로 채용해서 쓰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과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조종도의 모범사례를 싣도록 하라”고 말했다. 또 “안의의 황암서원에 그의 사당을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황암서원의 현판을 손수 써서 내려주었다. 또 “함안의 덕암서원(德岩書院)과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에서 매년 조종도의 제사를 모시라”고 지시했다. 더 자세한 것은 언행록을 보기 바란다. 간행되어 세상에 나와 있는 문집이 있다.
임금이 조종도의 전의이씨 부인에게 사후에 정부인(貞夫人,정2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장인은 병조판서(정2품)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이다. 처조부는 참봉(종9품) 증 판서(정2품) 이공량(李公亮)이고, 처증조부는 진사 증 참판(종2품) 이정윤(李貞胤)이며, 처고조부는 사헌부감찰(정6품) 이건(李楗)이다. 처5대조부는 정승(정1품) 이순전(李純全)이고, 처외조부는 별좌(정5품) 팔계(八溪) 정백거(鄭伯渠)이다. 부인은 1541년에 태어나서 남편이 순절할 때 함께 자결했다. 임금이 정려를 세우라고 지시하고, 승지(정3품) 이성조(李聖肇)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그 비문에는 “남편한테는 충의를 본받을 만하고, 부인한테는 완전무결한 정절과 열녀를 본받을 만하도다! 두 개의 정려가 나란히 빛나니 길이 전해질 두 분의 절의로다.“라고 쓰여 있다. 그 정려에는 “쌍절각(雙節閣)”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여기서 쌍(雙)은 ‘두 사람’이라는 뜻이고, 절(節)은 ‘절개’, ‘절의’라는 뜻이다. 각(閣)은 ‘비각(碑閣)‘이라는 뜻이다. 이 쌍절각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채미정과 서산서원 사이에 있는 전서공 조열 선조의 신도비각 옆에 있다.
묘는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오리골[梧里洞]에 있고, 건좌 방향이며, 두 분을 합장했다. 묘비명은 우의정(정1품) 문정공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었고, 신도비명은 참찬(정2품) 면우 곽종석(郭鐘錫=郭鋾, 1846-1919)이 지었다.
위의 번역문의 한문원문은 다음과 같다.
趙宗道 字伯由號大笑軒 中宗32丁酉1537年2月5日生 早登曺南冥先生門下戊午生員以遺逸歷典郡邑壬辰倡義丁酉再亂爲咸陽郡守8月18日殉節于安義黃石山城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忠毅諡法危身奉上曰忠剛而能斷曰毅 命旌閭師傅朴齊仁撰銘曰禀剛正氣守一箇是難不苟免風霜節義宥復戶累蒙賜祭特 命銓曹調用子孫事蹟載三綱行實錄海東名臣錄享祀于安義黃岩書院(咸陽郡西下面黃岩祠)賜額于享咸安德岩書院晉州慶林書院見言行錄有文集行于世宣祖30丁酉1597年8月18日卒 配贈貞夫人全義李氏父判書新庵俊民祖參奉贈判書公亮曾祖進士贈參判貞胤高祖楗司憲府監察五代祖政丞純全外祖別坐八溪鄭伯渠中宗36辛丑1541年生公殉節時自決同死命旌閭承旨李聖肇撰銘曰夫效忠毅婦全貞烈棹楔並輝萬古雙節扁閭曰雙節閣 墓山淸郡丹城面召南里梧里洞乾坐合葬墓碣銘右議政文正公眉叟許穆撰神道碑銘參贊郭鋾撰
위의 한문원문의 독음은 다음과 같다.
趙宗道(조종도) 字(자) 伯由(백유) 號(호) 大笑軒(대소헌) 中宗(중종) 32 丁酉(정유) 1537年(년) 2月(월) 5日(일) 生(생) 早登(조등) 曺南冥先生門下(조남명선생문하) 戊午生員(무오생원) 以(이) 遺逸(유일) 歷典郡邑(역전군읍) 壬辰倡義(임진창의) 丁酉再亂(정유재란) 爲(위) 咸陽郡守(함양군수) 8月(월) 18日(일) 殉節(순절)于(우)安義(안의)黃石山城(황석산성) 贈(증)資憲大夫(자헌대부)吏曹判書(이조판서)兼(겸)知義禁府事(지의금부사)五衛都摠府都摠管(오위도총부도총관) 諡(시)“忠毅(충의)” 諡法(시법) 危身奉上曰忠(위신봉상왈충) 剛而能斷曰毅(강이능단왈의) 命(명)旌閭(정려) 師傅(사부)朴齊仁(박제인)撰銘(찬명)曰(왈)禀剛正氣(품강정기)守一箇是(수일개시) 難不苟免(난불구면)風霜節義(풍상절의) 宥(유)復戶(복호)累蒙(누몽)賜祭(사제)特(특) 命(명)銓曹(전조) “調用子孫(조용자손)事蹟載(사적재)三綱行實錄(삼강행실록)海東名臣錄(해동명신록)享祀(향사)于(우)安義(안의)黃岩書院(황암서원) 咸陽郡(함양군) 西下面(서하면) 黃岩祠(황암사) 賜額(사액) 享(향)于(우)咸安(함안)德岩書院(덕암서원) 晉州(진주)慶林書院(경림서원)” 見(견)言行錄(언행록) 有(유)文集(문집)行(행)于(우)世(세) 宣祖(선조)30丁酉(정유)1597年(년)8月(월)18日(일)卒(졸) 配(배)贈(증)貞夫人全義李氏(정부인전의이씨) 父(부)判書(판서)新庵(신암)俊民(준민) 祖(조)參奉(참봉)贈(증)判書(판서)公亮(공량) 曾祖(증조)進士(진사)贈(증)參判(참판)貞胤(정윤) 高祖(고조)楗(건)司憲府(사헌부)監察(감찰) 五代祖(5대조)政丞(정승)純全(순전) 外祖(외조)別坐(별좌)八溪(팔계)鄭伯渠(정백거) 中宗(중종)36 辛丑(신축)1541年生(년생) 公(공)殉節(순절)時(시)自決同死(자결동사) 命(명)旌閭(정려) 承旨(승지)李聖肇(이성조)撰銘(찬명) 曰(왈) “夫效忠毅(부효충의) 婦全貞烈(부전정렬) 棹楔並輝(도설병휘) 萬古雙節(만고쌍절)” 扁(편)其(기)閭(려) 曰(왈) “雙節閣(쌍절각)” 墓(묘)山淸郡(산청군) 丹城面(단성면) 召南里(소남리) 梧里洞(오리동) 乾坐(건좌) 合葬(합장) 墓碣銘(묘갈명) 右議政(우의정) 文正公(문정공) 眉叟(미수) 許穆(허목) 撰(찬) 神道碑銘(신도비명) 參贊(참찬) 郭鋾(곽도) 撰(찬)
한문원문 해석 도움말
* 遺逸(유일): 초야에 묻혀 있는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 * 歷典(력전)은 ‘전근하며, 다스렸다’는 뜻이다. 歷(력)은 ‘겪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이동’, ‘전근’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典(전)은 관장하다, 관리하다, 다스리다는 뜻 * 倡義(창의) 국난을 당해 의병을 일으킴 * 諡(시) 임금이 시호를 내리다. 시호는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이다. * 旌閭(정려)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마을입구나 그 집 대문에 비각을 짓거나 홍살문의 대문을 만드는 것 * 師傅(사부)는 조선시대 세자들의 교육을 맡은 으뜸 벼슬이다. * 撰銘(찬명) 찬(撰)은 글은 짓는다는 뜻이고, 명(銘)은 묘갈명(墓碣銘)=묘비명(墓碑銘)의 뜻이다. * 難不苟免(난불구면) 難(란)은 전란, 전투를 뜻하고, 苟(구)는 눈앞의 안전만 꾀하는 것. 免(면)은 위험한 경우를 피하거나 그런 상태에서 헤어남. * 宥(유) 너그러히 * 復戶(복호) 조선시대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부역과 조세 등을 면제해주던 일 * 累蒙(누몽)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 * 賜祭(사제) 임금이 제사를 내려준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당에 위패를 모시도록 했다는 뜻이다. * 銓曹(전조) 문관의 선발과 포상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 賜額(사액) 임금이 편액, 현판을 써서 내려 보내주는 것. * 享(향) 제사지내다. * 效(효) 본받다, 본받아 배움. * 全(전) 완전무결하다. * "棹楔並輝(도설병휘)" 이것은 2009년에 발간된 족보에는 "작설첩휘(綽楔疊輝)"로 되어있는 것을 1986년 족보를 비롯하여 총 6종의 족보를 확인한 결과 도설병휘가 맞다고 판단하여 바로잡았다. 1974년에 발간된 대소헌사적집에는 "작설병휘(綽楔並輝)"로 되어 있다. 여기서 棹楔(도설)은 정려(旌閭), 홍살문(紅箭門), 작설(綽楔) 등과 같은 뜻이다. 綽楔(작설)은 棹楔(도설)을 잘 못 옮겨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족보내용 해설
1. 이름 종도(宗道)에는 으뜸, 근원의 뜻인 宗(종)이 들어 있고, 자 백유(伯由)에는 맏이라는 뜻의 伯(백)자가 들어 있다. 또 호 대소헌(大笑軒)에는 큰 대자가 들어 있다. 이 宗(종), 伯(백), 大(대)에는 맏이, 으뜸 또는 호쾌대활(好快大活)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는 이름과 같이 통이 크고, 호방하였으며, 흔들림 없는 마음을 성취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1537년 2월 5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나서 1597년 (음) 돌아가시기 3일 전인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함양군 황석산성에서 왜적 가토 기요마사와 맞서 싸우다가 순절했다. 어릴 때는 부친한테 글을 배웠다. 부친 조언(趙堰, 1517~1570)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87∼1547) 선생의 제자였다. 조종도는 7세 때 “사람이 대로를 가니 개가 문 앞에서 짖는다”는 뜻의 “人行大路(인행대로) 犬吠門前(견폐문전)”이라는 한시를 지었고, 8세 때는 다음과 같은 “蝸牛”(와우=달팽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遇陰之天出(우음지천출, 흐린 날에는 밖으로 나왔다가)
遇陽之天縮(우양지천축, 맑은 날에는 안으로 들어가네)
有家常負行(유가상부행, 집이 있어도 늘 짊어지고 다니고)
有角不能觸(유각불능촉, 뿔이 있어도 떠받지를 못하네)
9세 때는 역학과 문장에 밝은 월아산 밑의 동산옹(東山翁) 정두(鄭斗) 선생에게 배웠다. 15세에는 경상우도의 경전 및 고문암송경연대회〔晉州夏課(진주하과)〕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16세 때는 서울의 고모부인 진사 신홍국(申弘國)한테 글을 배웠다. 22세 때는 생원 선발 최종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총명해서 한번 본 것은 다 기억했다고 전한다. 그해 겨울에 전의이씨 이준민(李俊民, 1524∼1590, 좌참찬(정2품))의 큰딸과 결혼했다. 23세 때 남명 조식 선생을 알현했다. 남명 선생의 제자이자 누님의 아들인 이준민이 조종도의 장인이었기에 이때부터 남명 선생 댁에 더욱 자주 출입하면서 강론하고 묻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3. 1573년, 37세 때 태학의 천거로 경북 안기도(안동) 찰방에 제수되었다. 대소헌 조종도는 퇴계 선생한테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 등 퇴계 선생의 제자들과 8년간 교유하며 학문과 사상을 더욱 폭넓게 만들었다.
40세 때는 왕명으로 접대하던 관원인 선위사(宣慰使)를 따라 일본 사신 승려 현소(玄蘇, 16년 뒤인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의 국사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함)를 송별했는데, 현소가 접대하는 관원의 시를 보고는 바로 비웃으며 깔보았다. 대소헌이 곧 현소의 오만함을 꺾기 위해 주어진 운(韻) 자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宗道其名字伯由(종도기명자백유) 이름은 종도이고, 자는 백유이다
醒無思慮醉無愁(성무사려취무수)
술이 취하면 아무런 근심이 없고, 술을 깨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네.
有時吐氣虹霓直(유시토기홍예직) 때때로 무지개 같은 곧은 기운을 토해내면
萬丈光輝霓斗牛(만장광휘예두우) 만 길의 빛이 북두성과 견우성을 가린다네.
현소가 그 시를 보고는 놀라서 탄복하고는 두 번 절하고 벽에다 걸어두고 보았다. 이 시의 2행을 보면 대소헌의 기개와 풍류, 그리고 도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술을 깨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이 구절은 대소헌의 도의 수준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소헌 조종도는 성리학자이다. 성리학에서는 일신의 출세 보다는 초야에 묻혀서 학문과 도를 닦아서 모든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긴다. 대소헌이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옥살이를 할 때 옥중에서 보여준 여유로움과 태연함도 이러한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42세 때는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의 제문을 지었다〔祭盧玉溪文〕. 3년마다 각 도에서 실시하는 과거 문과 1차 시험을 칠 때 경상좌도(경북)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다.
45세인 1581년에는 사도시와 상서원의 직장(종6품)으로 옮겼다. 46세 때는 통례원 인의(종6품), 장례원 사평(정6품) 등이 되었고, 47세에는 양지 현감(종6품)이 되었다. 그때 “벼슬에 있으면서 맑고 깨끗했고, 백성을 평안하고 너그럽게 다스렸다”고 어사가 보고하여 임금이 상으로 비단을 내려주었다. 50세에는 문경 현감(종6품)이 되었고, 그다음 해에 금구 현령(종5품, 전북김제)이 되었다.
53세였던 1589년에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 난으로 인해 파직되었다. 이 난은 서인(西人) 정철이 주도하여 동인(東人) 1,000여 명을 죽인 난이다. 조종도가 정여립에 동조하는 자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속으로 그들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잡아들이면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잡아들이지 못하도록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남명 선생의 제1 제자였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7.16.∼1590.9.28.)과 함께 의금부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수우최선생실기>에 이 두 사람이 함께 옥고를 치루었을 때,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다음과 내용이 나온다.
“수우당은 엄숙히 자기를 지켜서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대소헌은 농담과 웃음으로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옥졸들이 말했다. ‘수우당의 질타와 대소헌의 해학과 웃음은 그 마음을 잡아 지킴이 견고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위의 수우최선생실기의 내용은 수우당 최영경과 대소헌 조종도는 마음이 어지러울 수 있는 상황에서 조금도 겁 먹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하고도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했다는 말이다. 수우당은 두 차례의 고문 끝에 옥사했고, 대소헌은 1년의 옥살이 뒤에 무죄로 풀려났다.
4. 56세였던 1592년 봄에 학질과 기축옥사의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함양에서 서울로 갔다. 지난해 가을에 장인이 돌아가셨으나 병환으로 문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미 서울에는 왜군의 선봉이 쳐들어왔다. 대소헌은 밤에 몰래 서애 유성룡을 찾았다. 유성룡은 영의정으로서 대란을 막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 전 직장(直長, 종6품) 이로(李魯)를 만나 영남에 돌아가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쳐부수기로 언약하고 함양에 도착했다. 조종도는 이로와 함께 함양의 학사루(學士樓)에서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집했다. 그때 이로와 함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우도의 방어를 책임 맡아 중앙에서 급파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이때 김성일은 두 사람이 의병 모집을 위해 격문을 작성해 놓은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라고 말했다. 이로는 김성일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초유사 김성일이 조종도를 임시로 의령 고을을 다스리도록 했다. 의령에 가보니 곽재우가 이미 고을 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일에 모두 두서가 있어서 그에게 맡기고 돌아와 진주 촉석루에서 김성일을 만났다. 대소헌이 말하길 “내가 의령에서 오는 도중에 들으니, 임금이 이미 신의주의 압록강을 건넜다 하고, 진주 목사는 지리산 안에 숨었고, 진주 성내가 텅텅 비었으니, 산하를 바라볼 때, 심히 비분강개함을 참을 길이 없소.”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를 “나라가 망한 것이다. 임금님이 욕을 당하는 날에 살아서 아무 일도 못 하니, 나는 차라리 죽어야지, 흉악한 칼날에 더럽혀질 게 없다”고 말했다. 학봉이 말하기를, “안 되오. 길에서 들은 말은 다 믿기는 어렵고, 또 괜히 죽어서 도움 될 게 아무것도 없소”라고 말리며, 시 한 수를 읊었다.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안의 삼장사는
一盃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잔 술을 마시고 웃으며 저 강물을 가르키노라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류도도) 장강물 도도히 흐르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저 물결 마르지 않음과 같이 우리들 혼도 죽지 않으리라
후세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촉석루삼장사(矗石樓三壯士)’라고 불렀다.
그해 임금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가상히 여겨 장악원 첨정(종4품)에 임명했다가 다시 겨울에는 단성현감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전쟁 뒤라 고을 사람들이 많이 굶주려서 날마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관청에서 비축한 게 부족하자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서 계속 대었다. 이때 김성일이 초유사와 경상도 관찰사의 역할을 겸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소헌은 이로, 박성(朴惺,1549~1606 김성일의 참모) 등과 장례준비를 손수했는데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1595년 안주목사, 1596년 청풍부사에 임명됐으나 학질로 인해 나아가지 못했고, 1596년 8월에 함양군수(종4품)가 되었다.
5. 61세 1597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황석산성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적 2만7천 명과 거창현, 안음현(안의), 함양군, 초계현, 삼가현, 합천현, 산음현(산청) 등 7천 명의 군민(軍民)이 함께 맞서 싸우다가 순절했고, 부인도 따라 순절했다.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 16일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성에서 왜적의 공격으로 발생한 전투이다. 황석산은 경남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 사이에 있는 해발 1,192m의 산이다. 산 정상에서 보면 동남쪽으로는 감악산이 보이고, 남동쪽으로는 황매산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보인다. 황석산성은 황석산 정상에 있고, 성곽의 길이는 약 2.75km이며, 삼국시대에 관방의 요새지에 축조된 성이다. 황석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성벽을 쌓아 놓은 것이다.
안의 현감 곽준(郭䞭, 1551~1597)과 전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수백 명의 관군과 인근의 백성 등 7천여 명으로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왜적에 대항했다. 곽준은 직접 돌을 지고 와서 성과 방어도구를 손질했다. 곽준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함양·안음·거창 지역의 백성과 함께 성을 지켰다. 조종도는 학질 후유증이 심해서 더이상 군수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요양중이었다. 그러던 중 왜적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종도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식구들과 그 지역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투준비를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 2권 12장에 황석산성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왜군이 서북쪽 황석산성을 함락하니, 안음 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전사했다.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경상도내의 산성들을 수리하여 적군을 막을 일을 의논하고, 공산(대구 팔공산)·금오(구미 금오산)·용기(운궁현)·부산(경주 근처의 부산성) 등 산성을 쌓았다. 공산산성과 금오산성에 백성의 힘이 가장 많이 들었는데, 이웃 고을의 무기와 군량 등을 모두 거두어 성안에 가득 쌓아두고, 수령들을 독려해서 늙은이와 어린이, 남자와 여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을 지키도록 했다. 이 일로 인해 주변의 민심이 떠들썩해졌다.
그런데 정작 적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전혀 엉뚱하게 대처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를 향해 나아가서 장차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로로 오는 군사와 합쳐 함께 남원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자 원수 이하 우리 장병들은 모두 멀리서 바라만 보고 적병을 피해가면서 각처의 산성에 들어가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려 흩어져서 적병을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독 의병장 곽재우만이 창녕의 화왕산성에 들어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켰다. 적군은 산 밑에 이르러서 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가파르며, 성안의 사람들이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는 공격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안음 현감 곽준은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다. 전 김해 부사 백사림도 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백사림은 무인이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겼다. 그런데, 적군이 성을 공격한 지 하루 만에 백사림이 먼저 도망쳤고, 그 때문에 여러 군사들은 모두 무너졌다.
적군이 성안에 들어오자 곽준은 그의 아들 곽이상, 곽이후와 함께 전사했다. 곽준의 딸은 유문호에게 시집갔다. 이미 성 밖에 나와 있던 곽준의 딸은 유문호가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여종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내가 따라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마저 적에게 잡혀갔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한 뒤 목매어 죽었다.
조종도는 전부터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에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벼슬살이를 한 사람인데, 난을 피해 달아나서 숨는 무리들과 함께 풀 속에서 이름 없이 죽을 수는 없으니, 죽는다면 마땅히 장부답게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당당히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될 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기고, 결국 곽준과 함께 적에게 살해당했다.
임금님 옆에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성을 사수하다가 성 안에서 전사하는 것도 또한 영광이라네.
崆峒山外生猶幸(공동산외생유행)
巡遠城中死亦榮(순원성중사역영)
위의 징비록에 없는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왜적이 입성할 때 조종도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처자를 성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부인은 “저는 마땅히 당신을 따라 죽을지니 절대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라며 두 아들 조영한과 조영혼만을 성 밖으로 내보내면서 “너희들은 조씨 후예를 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뒤 부인은 남편이 전사하자 그를 따라 자결했다. 아들 조영한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조영혼만이 살아 남아서 노비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서 부모의 시체를 거두어서 임시로 성 밖에 묻었다. 1년 뒤 포로로 잡혀갔던 조영한이 돌아와서 동생 조영혼과 함께 산청군 단성면 오리동으로 부모님 산소를 모셨다.
황석산성전투를 잘 묘사해 놓은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https://blog.naver.com/ahncsik/222897964513
함안조씨 1~17대 충의공대소헌파 가계(家系) 요약
1대 시조 정(鼎, 897년생, 후당 사람, 926년 29세에 한반도로 들어옴. 고려개국공신, 대장군大將軍, 오늘날 중장 내지 대장, 종3품 무관직)
2대 간(幹, 중랑장中郎將, 오늘날 준장, 완 스타 정5품 무관직)
3대 단석(丹碩, 장군원윤將軍元尹, 오늘날 중장, 쓰리 스타 정4 품 무관직)
4대 1) 시우(時雨, 오위도령장五衛都領將, 오늘날 국방부장 관, 정3품 무관직)
2) 영준(英俊, 형부상서刑部尙書,형조판서, 오늘날 법무부장관, 정2품)
5대 석화(錫和, 군자감軍資監,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는 관청, 벼슬? 소실됨)
6대 렬(烈,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문신,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등을 역임함)
7대 희(禧, 밀직사삼사좌윤密直使三司左尹, 종5품)
8대 지흥(之興, 문과계림부참군文科鷄林府參軍, 참지정사參知 政事, 종2품)
9대 천계(天啓, 고려 판도판서, 정2품, 슬하에 열(悅), 충(忠) 등 2 남이 있었다.)
10대 열(悅, 1419 세종1년 卒, 고려말 공조전서, 정2품. 슬하에 이(彛), 녕(寧), 환(桓), 안(安) 등 4남이 있었다.)
11대 안(安, 벼슬하지 않고 아들 旅(려) 한 명 낳아 놓고 일찍 별세함[不仕早卒불사조졸]. 하지만 부인 성산이씨(1395- 1493)는 향년 99세를 누림, 장인 재신(宰臣) 이역(李懌)
12대 려(旅,어계(漁溪), 1420-1489년, 70세卒, 증 이조판서, 정2품. 부인 흥양(興陽)이씨, 장인 이운(李運) 현령 종5품. 처조부 이성(李成) 서운관 중정(仲正), 처증조부 이이(李怡) 사헌부 장령 정4품, 처외조부 현풍곽씨 곽항(郭恒). 어계 려 할배는 슬하에 동호(銅虎), 금호(金虎), 야호(野虎) 등 3남이 있었다.)
13대 금호(金虎, 좌윤공, 1445-1533년 89세卒, 첨지중추부사, 종2품. 부인 진주류씨, 장인 류숙(柳塾) 첨지(僉知) 정3품, 처조부 류해(柳偕) 지돈녕(知敦寧) 정2품 증 찬성(贊成) 종1품, 처증조부 류이(柳怡) 증 판서 정2품, 처외조부 함종어씨(咸從魚氏) 문효공파 어효첨(魚孝瞻, 1505-1475) 이조판서족보에는 병조판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착오임정2품. 금호 할배는 슬하에 수만(壽萬), 수천(壽千), 수억(壽億) 등 3남이 있었다.)
14대 수만(壽萬, 남계(南溪), 1469-1491, 23세卒, 장사랑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음, 종9품, 하림 남계공 재실의 주인공, 부인 진주하씨, 장인 하백달(河伯達) 현감 종6품, 처조부 하충(河漴) 지평 정5품, 처증조부 하경리(河敬履) 참의 정3품. 수만 할배는 슬하에 응경(應卿)과 이미(李薇)에게 시집 간 딸이 있었다.)
15대 응경(應卿, 하구정(下鷗亭), 1487- 1549, 63세亡, 청백리 현감, 종6품, 부인1 순흥안씨, 장인 안계송(安繼宋) 주부 종6품, 부인2 진주류씨 장인 류형창(柳亨昌) 승사랑 종8품 문신, 부인3 진주정씨, 장인 정관(鄭寬) 현감 종6품. 응경 할배는 슬하에 언(堰), 장(墻), 성(城), 균(均), 근(墐), 경(境)의 6남과 1녀 신홍국(申弘國)이 있었다.
16대 언(堰, 1517.1.24. - 1570.12.8., 54세 卒, 참봉, 종9품, 부인 진주강씨, 장인 강희신(姜姬臣) 부사 정3품, 슬하에 종도(宗道), 노사훈(盧士訓), 기년(己年), 어응린(魚應麟)의 2남 2녀가 있었다.
17대 종도(宗道, 大笑軒, 1537.2.5.- 1597.8.18., 61세 卒, 증 이조판서, 정2품, 부인 전의이씨, 장인 이준민(李俊民) 판서 정2품, 슬하에 영해(英海), 영한(英漢), 영혼(英混)과 권약(權瀹), 김몽지(金夢芝), 노굉(盧肱), 정개건(鄭盖乾) 등 3남 4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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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함안조씨 선조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대소헌, 죽음을 앞두고도 크게 웃을 수 있는 조선의 위대한 선비였습니다. 생사를 초월한 통 큰 인물이 아니면 결코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촌 선생, 쌍절각이 어디에 있는지요?
홍골아재, 반갑습니다. 쌍절각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서산서원 옆 전서공 신도비각 옆에 있습니다. 채미정 앞 도로 맞은 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