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탄비(皇甫誕碑)
- 당(唐) 정관년간(貞觀年間, 627~649)에 제작. 해서(楷書). 찬자: 우지녕(于志寧), 서자: 구양순(歐陽詢). 높이 268cm, 너비 96cm. 황보탄(皇甫誕)은 수나라 때의 대신으로 정권쟁탈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황보무일(皇甫無逸)이 구양순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이 비가 만들어졌다
『당서(唐書)』「구양순전(歐陽詢傳)」에 ‘구양순은 처음에 왕희지의 글씨를 공부하였는데, 후에 굳세고 힘 참이 이를 능가하여 그 유명한 구양순체를 이룩하였다. 서간문 등이 세상에 전하여 사람들이 이를 법으로 삼았고 고구려의 임금은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구하기도 하였다.’라고도 실려있다. 당시 구양순의 글씨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양순체의 점획(點畫)은 정밀하고 가늘며, 결구(結構)는 단정하고 굳센 것이 특징이다.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해서를 공부하는 이들의 ‘표준 교본’으로 사용될만큼 유명한 서체다.
관련도서
皇甫誕碑(繁體版)
↗ 위 주소로 들어가면 '황보탄비'를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 ivo
▣ 구양순 이야기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化度寺碑)》 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풍은 당 시초에는 왕희지의 서를 배웠고 후에는 서풍이 변하여 필력이 강하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서는 굳세고 늠늠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듯 도끼로 듯한 굳센 북파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구성궁예천명의 특징은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 획의 간격이 고른 가 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다.
背勢에 의해 점, 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이 서체에 얽혀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구성궁(九成宮)은 황제가 여름에 피서를 가던 곳이었다.
당 태종이 그 곳에서 더위를 피하려고 행차하던 차에, 마침 샘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샘물을 기념하여 위징(魏徵)이라는 사람이 당태종 이세민의 훌륭한 정치를 칭송하며, 샘물이 솟은 것도 당태종이 덕망이 있어서라는 내용의 문장을 썼고, 구양순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해서(楷書)로 쓰여졌고, 총 24행 49자로 이루어져 있다. 해서는 잘 아시다시피 반듯반듯하여 초보자라도 한자를 알면 해독이 가능한 서체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이 이 서체를 "정서제일(正書第一)"이라고까지 한다.
구성궁은 지금의 서안(西安), 그러니까 당나라때 수도였던 장안(長安)에서 170KM 정도 떨어진 린유(麟游)현에 있다.
구양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구양순은 隋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黃庭經(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貞觀初(정관초)에는 <蘭亭敍(난정서)>마저 배웠다.
따라서 結體(결체)가 晉法(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남파)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을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북파)의 영향이다.
그가 쓴 房彦謙(방언겸)의 碑(비)는 그가 북파의 書家(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한 것 같은 서체, 칼을 꺾듯한 落筆法(낙필법)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점과 획의 符仰向背(부앙향배). 分合聚散(분합취산)이 힘의 균현에 맞고, 빽빽한 데, 빈 곳, 곧은 데, 흰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
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書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父子의 기법에 北碑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別體) 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갑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南北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書法藝術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九成宮醴泉名(76세의 書)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쓴 작품이다.
구양순이 특히 심혼을 기울여 휘호한 만큼 用筆 結構에 추호의 어김이 없다.
그 심경은 높고 품경은 아름답다. 구양순書의 碑중에서는 字體도 비교적 크고 字形도 가장 잘 정리 되어 있다.
물론 다른 碑들도 아름답게 째어 있기는 마찬가지나, 字形이 背勢(배세)를 따르는 內逼法(내핍법)을 좇았기 때문에 점이나 획은 모두 가운데를 향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碑는 결체에 여유가 있고 용필도 쥐락펴락 자유자재로 발휘되어 있다.
가장 빼어난 점은, 꺾거나 휘는 데서 붓이 나가다가 멈추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거둔다.
그러면 모가 선 것 같으면서도 모나지 않고 둥근 듯하면서도 둥글지 않은, 즉 黃庭(황정)이나 樂毅(락의)에서 보는 것같은 筆意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碑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수많은 拓本(탁본)을 떴기 때문에, 어지간히 좋은 탁본이 아니면 이런 미묘한 변화를 좀처럼 맛볼 수가 없게 됐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 있다.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能:능할 능. 書:글 서. 不:아니 불. 擇:가릴 택. 筆:붓 필. [출전]《唐書》〈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저수량(저遂良)?유공권(柳公權)?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