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바꾸기
날씨가 환장하게 좋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세상 구경을 한다. 이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살아가는 아랫마을을 몰래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옥상에서 늘어진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할머니, 스쿠터를 타고 골목길을 멋지게 누비는 할아버지. 뜰 안에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있는 주홍색 기와집. 딱정벌레 같은 트랙터를 타고 대추나무 밭에 농약을 치는 아저씨가 서부영화에 나오는 영화배우 같다. 자고 일어나보니 길이 생겼다는 말이 있듯이 동네에 새롭게 길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을이 낯설어 보인다. 시장을 다녀오는 어르신들이 마스크를 쓰고 보따리 하나씩 들고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무며 지나간다.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마스크를 꼭 쓰고 나가라고 얼마나 당부를 했을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마스크를 벗고 다시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온다.
멀지 않은 곳에 동자못이 내려다보인다. 둑길을 걷는 사람이 보인다. 혼자 걷는 사람도 있고, 조금 떨어져서 엄마와 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있다. 풍경이 그림처럼 한가롭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사람들이 야외로 산책을 나온다. 산책하는 나를 누군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까? 산책을 하면서 건너편 아파트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걸을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를 지켜보듯이 누군가도 나를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모녀로 보이는 사람들은 동자못 둑길을 왔다 갔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있다. 나도 산책을 나가면 동자못 둑길을 오고가는 것을 반복 하면서 걸었다. 모녀는 한참을 걷더니 어느새 동자못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동자못에 서 있다. 아파트에서 숨어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장난 끼가 발동했다. 걸음을 멈추고 아파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체 하는 것처럼.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진짜 누군가를 향해서 손을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는 사람들이 전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행복한 맛을 느꼈다. 둑길은 그다지 길지가 않다. 왔다리, 갔다리 라는 말이 있다. 왔다 갔다를 몇 번을 했다. 아직도 두꺼운 패딩을 입은 탓에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추운 탓이다. 매화향기가 나를 위로해준다. 그래, 다 지나가리라. 나의 일상을 차분하게 꾸려나가자. 늘 그랬듯이, 잘하고 있어. 날씨 정말 환장하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