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iots of Fire - Vangelis
................................ 매일성경 5.6월호에서 옮김
1945년 2월 21일,
중국의 포로수용소 병동에서 한 젊은이가 그를 간호하던
'애니'라는 소녀를 움켜쥐고 울부짖으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젊은이는 애니의 귀에 대고 한마디를 속삭이더니 곧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기쁨으로 평생동안 하나님을 위해 달렸던'
스코틀랜드의 육상 영웅 '에릭 리들'이 영원의 결승테이프를 끊는 순간이었으며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그 한마디는
"완전한 순종(complete surrender)" 이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 더 이상의 판단기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영화 <불의 전차>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육상영웅 에릭 리들이,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로, 입상이 유력했던 파리올림픽 100m 경주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밝힌 이유다.
그는 오직 한가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렸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리지 않았다.
트랙에서의 경주가 끝나자
그는 열광적인 환호를 뒤로 하고
부모님과 형이 기다리는 중국 천진으로 떠났다.
그리고 2차 대전 중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뇌종양으로 죽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마지막 한 줌 남은 호흡마저 '완전한 순종(양도)'을 향한
소원을 고백하고 당부하는 데 바칠만큼,
그는 주인의 것을 남김없이 다 돌려드리고 떠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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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식장에서 가장 눈길을 끈 영화는 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및 의상상을 휩쓴 ‘불의 전차(Chariot of fire)’ 였습니다. 아마 이 영화를 못 보신분들이라도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켰던 반젤리스(Vangelis)의 주제음악은 기억하실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카데미상 뿐만 아니라 1981년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1981년 칸느영화제 남우주연상, 심사위원 특별상, 뉴욕 영화비평가상 감독상, 작품상 등 그해 영화제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쓴 기록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중심으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로 명문 캠브리지 대학생인 해롤드 아브라함은 타고난 스프린터로서 제8회 파리 올림픽대회 영국 대표로 선발됩니다. 유태인이기에 당해야했던 천대와 멸시를 이겨내기 위해 승부에 집착하던 해롤드는 무사비니라는 육상계의 신화적 인물을 개인 코치로 초빙하면서까지 투지를 불태웁니다.
한편, 스코틀랜드인 선교사의 아들인 에릭 리들 역시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기량으로 대표 선수로 선발됩니다. 그러나 경기가 일요일로 예정되자 에릭은 주일날에 경기를 할 수 없다며 출전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는 결정이었으며, 이 말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각 신문에서는 '옹졸한 신앙인''배신자'라는 폭언을 해댔습니다. 영국의 왕자까지 찾아와 회유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꾸자 않습니다. 동료 선수의 양해로 다른 날 열리는 400m경기에 출전하게 된 에릭 리들과, 100m에 출전한 해롤드 아브라함, 두 집념의 사나이들은 결승 테입을 끊으며, 올림픽과 영국 육상 역사의 영원한 영웅으로 기록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끝은 주인공인 에릭 리들 (Eric Liddell 1902~1945)의 다른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영예와 명성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허드슨 테일러의 China Inland Mission의 선교사로 떠납니다. 리들은 처음 12년 간 톈진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통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1932년에는 목사로 안수를 받고 플로렌스 맥킨지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2차대전 중인 1941년 중국내부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영국정부는 중국내 영국민들을 대피시키도록 하였고 에릭은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의 처가로 보냈지만 그 자신은 산둥 반도의 소창이라는 곳의 남아 선교본부를 중심으로 곳곳을 다니며 농촌 지역에서 전도하며 또한 어려움에 처해있던 중국인 지역민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던중 소창이 일본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수 년 간 1,800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본군 치하 웨이시엔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며 식량과 의료지원을 도왔습니다. 그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고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감싸며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활동은 수용소 생존자의 증언에 의해 전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45년 종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과로와 영양실조에 의한 뇌종양에 걸려 세상을 떠나 현재 중국 웅방시의 작은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그의 부음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크게 애도했으며 다시 한번 그들의 영웅을 기억하고 칭송하였습니다. 2005년인 지난해에는 수용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었으며 그의 모교인 에덴버그대학에서도 그를 기리는 기념물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쓴 러셀 렘지의 말처럼 과연 그의 삶의 목적은 운동경기의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는것’이었습니다. 영화의 원제 'Chariots of fire'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 1827)가 작사한 영국 성공회의 성가 "예루살렘(Jerusalem)"에서 딴 것으로 영화중 해롤드 아브라함의 장례 미사 장면에서 불렀다고 합니다. 예 루 살 렘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발들 고대의 그 발들이 영국의 푸러른 산위로 걸었단 말인가? 그리고 신성한 양이 영국의 즐거운 목초위에 보였는가? 그리고 신성한 용모가 구름낀 언덕위로 비추어졌는가? 어두운 사탄의 물방앗간이 득실대는 중에서도 예루살렘이 여기에 세워졌던가? 불타는 불의 활을 내게 가져다주시오. 욕망의 화살을 가져다주시오. 나의 창을 가져다주시오; 오 구름이여 개어다오. 나에게 불의 전차를 가져다주시오. 나는 정신적 분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칼은 내 손에서 잠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건립할 그날까지 영국의 푸러르고 기쁜 땅 그 위에서. And did those feet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Walk upon England's mountains green? And was the holy Lamb of God On England's pleasant pastures seen? And did the Countenance Divine Shine forth upon our clouded hills? And was Jerusalem builded here, Among those dark Satanic Mills? Bring me my Bow of burning gold, Bring me my Arrows of desire, Bring me my Spear; O clouds unfold! Bring me my Chariot of fire! I will not cease from my Mental Fight, Nor shall my Sword sleep in my hand, Till we have built Jerusalem in England’s green & pleasant Land.
중국 선교현장에서의 에릭 리들
.,.................................................................. ◆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자료 ◆ 데이비드 푸트넘은 한바탕의 유행성 감기를 앓는 동안 올림픽 경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이 <불의 전차>에 대한 발상을 하게 되었고, 이 영화제작을 위해 재정적인 후원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아무도 1928년 올림픽의 영국 육상 선수들을 다룬 영화가 흥행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영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리델과 아브라함을 각각 지탱해 주고 있는 신앙의 힘이다. 이 영화가 나오자 영국과 미국의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갑자기 극장에 갈 것을 권하기 시작했다.
푸트넘의 영화는 블록 버스터의 요소가 전혀 없는 영화이다. 특수효과의 마법도 없고 잠시 짜릿하게 하는 플롯도 없으며, 물리칠 악당도 없다. 대신에 이 영화는 반젤리스의 음악이 전편에 흐르면서 관객들에게 강한 감동을 불어넣는다. 육상 선수들이 해변가를 달리는 처음 장면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잊혀진 탁월함을 추구하는 노력, 팀 안에서의 충성,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사랑하는 옛 가치관들과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러나 <불의 전차>는 과거의 가치들에 대한 향수를 추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신념을 파헤치면서 서로를 대립시킨다.
아브라함과 리델은 명예를 추구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달린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의 의무이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한 무기이다'. 그의 명예는 개인의 명예이며, 그의 종족을 비웃는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이다. 반대로 리델은 그의 하나님을 위해 달린다. '내가 달릴 때, 나는 그의 기쁨을 느낀다. 내가 이기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세 번째 신념은 이 두 가지 신념 모두에 대립되는 것으로, 그것은 국가적인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다. 이 영화는 리델로 하여금 그의 원칙에 반해서 안식일에 달리도록 하려는 캠브리지의 교수와 영국 귀족들을 통해서 그 신념이 나타나고 있다.
각각의 관점은 서로 다른 신앙을 만들어 낸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의 편견에 대항해 달리는 반면, 리델은 자기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 달린다. 이 영화의 성공은 '남성적인 기독교'를 매우 드물게, 긍정적인 관점에서 그렸다는 점에 있다. 다른 많은 기독교 영화들이 실패한 이 부분에서 <불의 전차>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우선 리델의 신앙은 영적인 동시에 육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는 달리는 것과 신앙의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누군가 지적한 것처럼 '완벽하게 해내기만 한다면,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실수를 하는 반면, 리델은 자신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대문에 자신도 완전함을 추구한다.(마5:48).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모두 탁월함의 추구에 헌신할 수 있으나,리델의 경우 그것은 개인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잔재들을 쓸어버린 헌신이었던 것이다. 푸트넘은 분명, 리델을 틀에 박힌 신자로 만들 위험성을 감지했을 것이다. 물론 리델은 다소 영웅적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결코 자만심에 찬 경건주의자는 아니다. '안식일에는 축구를 하면 안되지'라고 그는 한 소년에게 타이르지만 바로 다음날 아침 축구 시합을 주선한다. 리델은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측면에 서서 비판만 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탓이기도 한데, 리델은 그런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신앙에는 항상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으며, <불의 전차>는 그것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지 않는다. 리델의 경우, 달리기에 대한 '세속적인' 흥미 때문에 선교의 일은 저버리고 있다고 여동생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고, 그녀 또한 시합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해 달라는 부탁을 받음으로써, 신앙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또한 리델은 주일날 행해지는 경기에 뛰지 않겠다는, 훨씬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해서 내린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리델이 금메달과, 그가 이 경기에 참가하고자 희생한 모든 것을 그 대가로 치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진다.
실용적인 관점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압력은, 리델이 그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미래의 왕을 알현하게 될 때 극에 이른다. 리델이 딱 잘라 말하진 않지만, 이 영화는 신앙이 항상 그렇게 뚜렷한 표지판이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그려내고 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오기는 했는데, 마치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때 신앙의 궁극적인 시험은 돌아서지 않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형화면에 나타나면 그들은 조연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에릭 리델을 <불의 전차>의 두 주인공 중 하나로 선택함으로써, 푸트넘은 우리에게 신앙을 한층 확대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옛날 영웅들을 다루는 영화에서는 간혹 그 인물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리델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며, 그의 신앙에 대해서 아무런 회의를 나타내지도 않는다' 식으로... 그러나 그는 진부한 종교적인 말들만 하는 평면적 인물은 아니다. 이언 찰슨이 해내는 역할은 견디기 어려운 압력에 맞서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 결과, 리델이 결승선을 들어설 ? 그 승리는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완벽을 추구한 승리는 땀과 정직 그리고 불굴의 신앙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 경기를 마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고 리델은 말한다. 신약에서 말하듯, 이 영화에서도 경기는 종종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며(고전9:24, 딤후4:7), <불의 전차>는 우리에게 어떻게 달리느냐의 중요성에 대해 잘 깨우쳐 주는 작품이다. 타협이 현대의 정치와 현대의 삶의 방법일지 모르나 그것이 신앙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
출처: 마지기의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마지기
첫댓글 수요일 누가복음 강해에서 사용된 예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