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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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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도서 스크랩 신과 천사가 천계와 영계에서 활동을 한다
지어지선 추천 0 조회 64 11.08.28 0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녕하세요? 그간 여기저기에 쌓여있던 눈이 살살 녹으면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땅위를 흐르고요 시커먼 흙먼지 때가 씻겨나가는 모습이 신나고 고맙게 여겨집니다. 오늘은 보슬비도 내리니 공기도 상쾌하고 얼어붙었던 기분도 편안해지는데요 해빙이란 이렇게 좋습니다.

 

가까운 지인 한분과 식사를 하면서 얘기는 제 블로그의 글이 특이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을 지적받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미국 경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심층보도도 있고, 미국 발 금괴의 상당량이 중국으로 건네질 때 이를 조사한 결과 텅스텐으로 판명이 나서 몽땅 반려가 ?다는 소식이나, 이후에 미국 땅 포트후드 기지에서 아랍계 미 장교가 총기난사사건을 벌일 때 이 일과 동시에 기지의 지하 금고에서는 보관된 금괴를 탈취하려는 도당과 이를 지키려는 보안군 사이에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져서 격퇴했다는 믿기어려운 소식을 전하는데, 과연 이런 것은 소스가 누구이고 이 뉴스를 믿을 수있는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런 질문은 당연한 것이고 그의 진위여부나 진실성을 알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그저 기사의 소스를 얘기하고 방증을 말할뿐입니다.

 

저는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스칼라 파장 무기를 러시아 군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서 우주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아주 민감한 얘기도 하고요, 미국과 이스라엘 군의 전쟁도발 행위나 위장작전이 외계의 은하연합군의 개입에 의해 그때 그때 차단되고 무력화된다는 SF 소설같은 소식도 내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믿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환타지 은하전쟁소설을 쓰고 있는 격이지요. 블로그 얘기는 은하우주 창조주 신이 지구에 온다는 내용이 있고 2천년전의 예수가 이수 사난다라는 인물인데 지구 궤도에 와서 행성 해방전선을 이끌고 우리 지구를 5차원의 낙원같은 수준으로 상승시키는 우주적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은하우주 버전의 반지의 제왕의 에피소드를 써내는 격이지요. 이런 얘길 일반 독자가 듣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이라 할지라도 제가 올리는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환타지 소설을 보고 믿으라고 했을 때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분이 아주 특이한 분일 것입니다. 아님 맹신이라도 하려는 절박한 처지거나 말이죠. 그러다보니 저는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내놓고 있습니다.

 

어제는 라일리 코일이란 인물이 사탄 Satan 의 서한을 입수해 공개한 것을 제가 일부 번역해서 올려드렸지요. 사탄의 편지라.. 저도 좀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그 서한이 엉뚱하게도 미국 복음주의교단 총회장인 팻로버트슨 목사에게 간것인데요 정말 목사와 사탄이 편지를 주고받는다니 이상한 일이죠. 사탄이 누구입니까.. 그 전설적 인물이 왜 총대장 격의 목사에게 책망하고 경고하는 편지를 낸단 말인가요.. 이 일이 사실이라면 미국 교회는 사탄과 교류한다는 것이며 그의 교시를 받드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라고 해야하는 거죠. 뚜 ~ 둥 .. 어떤 자료에 보면 사탄 satan은 지구의 종교사상에도 관여하며 모든 현실의 지구문명을 지배해온 아주 신비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예 현세의 지구의 지배자요 신으로 군림해왔다고 합니다. 그는 우수한 두뇌와 우주의 오랜 경력을 쌓은 큰 인물이었는데 근 6천만년의 은하전쟁을 일으키며 반란군 총지휘관이자 은하의 물리적 설계를 변경하여 지구태양계를 은하로부터 고립시키는 일을 했다합니다. 또 대단한 철학자로서 행세해서 이곳이 신을 느낄수없고 또는 좀 우월한 능력을 가진 외계지도자를 신으로 받들게 했죠. 이런 얘길하면 기독교 신자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도는 사탄이란 인물에 관해 그리 깊게 공부하지 않더군요. 그저 사탄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는데 신에게 도전하고 타락의 길로 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담 하와의 사명을 망치는 등 많은 나쁜 일에 관여해서 인류를 타락시킨 인물로 알고 있더군요. 그가 엄청난 은하우주 반역 사건의 중심으로서 현실계를 사탄의 물리역학을 통해 왜곡시키고 인간 영혼에 대한 관리권한을 가지려고 인간복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도 못할 이야기이죠. 사탄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힘으로 인간사회를 쥐고 흔드는 일을 멈추는 법이 없더군요. 그의 서한을 생각해봅니다. 그 의도와 철학이 무엇인지..

 

바티칸의 사상관련 신부는 영화 아바타가 적절하지못한 스토리를 갖고 존재하지않는 외계의 영장류를 그려냄으로서 신의 창조질서를 왜곡할 수있다는 성명을 내놓더군요. 그네의 성향에는 인류가 외계의 초월적 존재와 교류하고 교감하는 일이 거부감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외계문명 철학은 현세의 종교사제에게 문화적 충격이 되고 경쟁력을 잠식해서 열등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있지요. 그런데 인류는 이미 다양한 외계종족과 교류를 해왔다 합니다. 제 블로그에도 그들을 기술하는 자료가 일부있지요. 그 종족들에는 이기적 목적으로 인류를 이용하려는 부류가 있고 어떤 종족은 인류에게 평화를 유지하게 돕고 5차원의 영적인 계층으로 상승하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합니다. 이런 얘기를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인류의 문화 속에 이미 영계의 존재가 교감한다는 것이나 5차원등 고차원의 존재들이 전쟁행위를 지속해왔다는 시나리오는 고대 자료에 나타난 것이며 현세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도 오랫동안 반영되온 이야기입니다. 이런 스토리엔 어느 정도의 사실이 들어있는 것이고요 어쩌면 종교에서 몸을 벗어서 영혼체가 천국으로 간다는 얘기나 신과 천사가 천계와 영계에서 활동을 한다는 얘기도 표현만 다를뿐이지 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있습니다. 

 

그간의 정황을 종합하면 우리 지구문명은 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아닙니다. 처음의 기초 세계는 신의 세계였지만 은하전쟁의 와중에 이곳은 사탄, 루시퍼, 엔키, 등 그외에도 여러명의 외계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점거하여 항전의 본거지로 만들고 철저한 지배체제를 쌓아온 고립된 행성입니다. 한마디로 사탄의 땅입니다. 사탄의 땅에선 그의 말이 곧 법이고 그의 힘으로 온 세상이 움직여왔던 것이지요. 우리 인류는 그런 상황을 분별할 수있는 충분한 지식과 정보가 부족했죠. 또 우리의 지성도 반쯤만 허용되었기에 이런 문제를 철저히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일부 불꽃같은 영혼들이 진실규명에 나섰고 석가, 예수, 마호멧, 공자, 노자, 장자, 퇴계, 아리스토텔레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니콜라 테슬라, 월터 러셀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둠속에서 밝혀준 길을 따라서 미로를 빠져나온 인물들도 많이 있었고요. 여러분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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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의 메시지 3 Message from Mohammed   7/2/2005Through Candace Frieze http://abundanthope.net/pages/printer-78.shtml수라들 Surahs[코란의 장들]은 나의 라디오 칩을 통해 보내진 메시지들이었습니다.  나는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또한 고의적으로 문맹이었는데,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만든 메신저들에 의해 남겨진 메시지들의 방대한 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라라는 말은 나 자신의 말이 아니며, 나의 칩을 통해 아눈나키들이 준 말이었습니다.  이들 아눈나키들이 사실상 "알라Allah"였고, 하보나의 중앙 우주Central Universse of Havona의 신인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또한 네바돈 우주의 크라이스트 마이클Christ Michael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의 상승 마스터로 왔으며, 따라서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된 지구 전반의 들어올림의 일부였습니다.나의 임무는 완전히 납치되었습니다.  수라들을 기록한 자들은 그것을 - 성경에서 한 것처럼 - 더욱 바꾸었으며, 게다가 대개 나의 것이 아닌 Hadiths로 부르는 다른 많은 글들을 덧붙였습니다.  많은 전쟁들이 내 탓으로 돌려졌는데, 나는 그것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내가 했던 유일한 싸움은 전적으로 자기 방어적인 것이었습니다.칩 없이 내가 주었을 가르침들이 확실히 널리 퍼질 것이 의도되었다 해도, 그것들이 전쟁으로 강요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불량소년소녀들의 "선물gift"입니다.  나는 캔더스가 지은 이 작은 단어를 정말로 좋아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좋아하며, 그것은 아주 멋지게 들어맞는데, 불량소년소녀들이 아눈나키들Anunnaki 외에 많은 소스들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나의 이름으로 너무나 슬프게도 많은 전쟁들이 치루어졌습니다.  나는 이것을 시정하고, 나의 이름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가르침들을 가져오기 위해 왔습니다.  성경, 특히 신약전서와 같이, 코란에 있는 많은 것이 진실이지만, 가르침들의 많은 질적 저하가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다양한 경전들을 진실로 보이도록 덧붙여졌고, 사람들을 오늘날처럼, 잡다한 그룹으로,  신에 대해, 유일한 진실에 대해 각자가 그 자신의 신조를 갖도록, 그리고 모든 다른 이들을 이단자들로 만들도록 많은 것들이 더해졌습니다.  당신들은 지구상에 기독교도들이 이단자들이라고 외치는 무슬림들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슬림들이 이단자들이라고 외치는 많은 기독교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어느 그룹도 다른 쪽을 보지 못하고, 그들 자신이 게임의 일부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슬프게 느껴집니다.나는 항상 이슬람을 따르는 자들을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몇몇을 접촉하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의 완전한 어리석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남아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초기 날들에서 그것은 어느 면에서 위대한 종교였고, 그 면에서 - 나의 칩에도 불구하고 - 내가 가졌던 성공의 하나는 지식이 중요하다는 점, 그 초기의 날들에서 그것이 추구되었다는 점입니다.여성이 사회에서 어떤 더 중요한 역할들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 여전히 대개 남자들인데 - 일부 여성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최고의 과학자들, 철학자들, 의사들 중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건축, 음악, 많은 예술들이 번성했고, 지중해와 아랍 세계들로 전파되었습니다.  비록 적지 않은 전쟁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정복된 후 대개는 이슬람의 좋은 부분들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불량소년소녀들의 지배를 통해, 많은 역경들이 더욱 일반사가 되었고, 이슬람의 좋은 부분들이 많은 지역들에서 크게 부패되었습니다.  이슬람은 여성의 해방을 의도했으며, 이것이 나의 의도였고, 그것이 일어났는데, 내가 이것을 가르쳤고, 나의 생애 동안 그것의 본보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칩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들과 사업 동료들에게 많은 방식으로 나의 행동들을 통해 영향력을 주는데 성공했습니다.나는 얘기된 대로 어떤 소녀들을 포함해 여러 명의 아내들을 가졌습니다.  이들과는 성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여성들을 나의 가족으로 택했는데, 그들이 과부들과 고아들이었기 때문이고, 나는 그들에게 더 나은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나의 사업가인 첫 번째 아내가 나의 진짜 사랑이었고, 그녀는 결코 다른 여자로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여자들과 결혼한 것은 진실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생계를 주기 위한 당시의 합법적인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이 시간 미국의 기독교에 있는 Jerry Falwell과 다른 이들이 가르치듯이 성적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것으로 매우 감정이 상했습니다.이들 여성들과 소녀들은 나에게 자매들과 딸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극히 사랑했지만, 그들과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명예와 자신감을 가르쳤고, 모든 사람이 신의 눈에는 평등하다고, 그리고 여성이 남자들처럼 똑같이 지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나의 측근에 있었던 이들은 윤회에 대해 알았고, 그들은 그 당시 그들 생애에서 큰 발전을 만들었으며, 항상 여성으로서 더 나은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까지 수없이 돌아왔습니다.나중의 육화에서 지구상의 어떤 더 위대한 여성들은 그 당시에 나의 "아내들wives"이었습니다.  이 임무의 주요 부분은 여성들을 개화시키는 것이었고, 나는 나의 임무의 그 부분이, 신의 성질에 대해 일반적인 각성을 가져오는 외에 여성들과 그들 능력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쓰레기 더미들 밑으로 들어간 것이 가장 슬픕니다.  오늘날 머리와 몸을 둘러싸는 다양한 가리개들을 쓰고 있는 이슬람 여성들을 보는 것은 인간 종의 반을 성적 노예제로 유지하기 위한 아눈나키들의 영향력들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2        http://blog.naver.com/rivertrue12/100120023740

 

       

 

 

천국은 천국대로 지상에 영향을 끼치고, 지옥은 지옥대로 지상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천국천사들이나 지옥악마들이나 지상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는 꼭 지옥과 천국의 사람 빼앗기 싸움과 같습니다. 사람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선 천국의 천사가, 또 한쪽에선 지옥의 악마가 사람 빼앗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느냐는 중간 위치에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습니다.

 

p.136 - 137

 

지상에서 사는 동안은 누구도 자기나 가족 혹은 타인을 마음의 형태로 보지 못한다. 진정한 자신은 사람의 깊은 내부에 숨어 있다. 그래서 지상에 있을 때 천하의 미인이었더라도 그 마음의 형태가 '지옥형'이면 영계에서는 흉물스런 형상으로 모습이 변한다. 반대로 그 마음으 '천국형'일 때는 지상에서는 상상도 못했떤 아름다움으로 용모가 바뀌게 된다. 외부가 사라지고 내부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천계에 들어가는 자는 청춘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간영계를 떠나 최후의 거주지인 천계나 지옥에 정착하면, 가족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용모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같은 천계에 와 있으면 상념을 통해 얼마든지 서로 보고 만날 수 있다. 다만 천계와 지옥 간에는 절대로 교통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다.

한 가족이 큰 참사나 교통사고로 같이 사망했을 경우, 중간영계에서는 모두 같이 한 자고으로 어울려 생활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끝까지 엄마나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중간영계에서는 모두 3단계를 거치는데, 이때 변화가 일어난다. 제1단계, 제2단계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영적인 진면목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이와 함께 점점 지상에서 맺었던 가족의 유대가 약해지고 새로운 영적 유대관계가 형성된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천계에서 같은 공동체에 정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부부라도 죽는 시기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같이 운명하는 경우는 사고 이외에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시간 차를 두고 사망했더라도 부부는 중간영계에서 반드시 다시 만난다. 그러면 서로 반가워하고 기뻐하며 마음이 맞으면 중간영계의 제1단계를 다시 부부로 같이 산다. 그런데 제2단계에 이르면 그 부부의 본성이 드러난다.

지상에서 결혼애로 살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순결을 지켜온 부부는 천국 부부로서 그대로 천계로 직행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부는 제2단계에 이르러서는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 흥미를 잃기도 한다. 이들은 자연히 헤어지게 되어 따로따로 자기 갈 길을 간다. 거기서부터는 이미 부부가 아니다.

 

 

p.144

 

"죽어서 영계에 가면 하나님 가까이 갔으니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천사들한테 하나님 진리를 듣고 그대로 믿고 생활을 바꾸면 그로 말미암아 천계에 그냥 받아들여지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영인과 천사들과 교류한 경험에서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죽은 뒤에 회개와 재생은 결단코 없습니다. 역사 이래 영계에 가서 운명을 바꾼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회는 지상에만 있다. 지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이 회개와 재생의 유일한 기회이다. 죄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 말이다. 영계에 가서 지옥에 갈 운명이었는데 운이 좋아 천국에 가고, 천국에 갈 운명이었는데 운이 나빠 지옥에 간 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스베덴보리는 아래와 같은 말로 이 주제를 마감했다.

"지옥의 영인을 천계의 ㅊ너사로 바꾸는 것은 부엉이를 비둘리고, 지렁이를 극락조로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하늘나라에는 공짜가 없다. 천국은 지상에서 각자가 '벌어서' 들어가는 곳이다.

 

 

p.146

 

육신은 기회이다. 육신은 지상에서만 가지고 사는 우리의 외적인 몸일 뿐이지만, 그 육신이 곧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생활이 기회인 것을 깨닫고 크고 작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에 힘써 산다면 그 죄는 지상에서 깨끗이 정화되는 것이다.

 

 

p.148

 

백 퍼센트 하나님을 믿고 구세주를 받아들여야만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이지만,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늘의 질서를 가르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으니 거기에도 천국 가는 길이 있다.

천국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늘은 무관심하지 않다. 세상에는 종교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 각자의 가슴속에 양심을 심어 주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파송한 '하나님의 사자'이다. 양심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미개한 땅 산각벽지에 있으면서도 양심의 법도를 따라 양심을 지키고 살면 천계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ㅏㄷ.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세지'이다.

 

 

 

꿈에 대한 고찰 : 융과 프로이드와 스베덴보리

 

 

1.꿈에 대한 정의

 

“꿈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정신의 의식층과 무의식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징과 이미지들 사이의 대화가 바로 꿈이다.”

“진리는 벌거벗고 세상속으로 오지 않고 유형(types)과 이미지(images)로 왔다.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신랑은 이미지를 거쳐 진리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성 빌립보의 복음)

프로이트  “꿈은 원망 충족이다“.
소원성취적이다. 고로 인과적이다.

칼융  “꿈은 보상 작용이다.”
의식상의 극단적 태도에 대하여 무의식은 반동하여 균형을 맞추려 한다.

꿈은 영화와 최면과 영계와 같다.


1) 꿈은 영화와 같다.

꿈속의 자아는 주연배우와 조연과 엑스트라와 관객으로 나온다.
꿈은 한 장면, 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꿈속의 자아는 주어진 그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한다.
수영을 못하는데 수영을 하고, 외국어를 못하는데 외국어를 하고, 친구가 아닌데 친구처럼 대하고

대통령과 만날 수 없는데 만나서 대화하고 등등.....

주연과 조연과 엑스타라는 꿈의 상황에 모두 참여한 것을 말한다.
다만 비중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관객이란 관찰자로서 꿈의 상황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후자는 객관적인 상태를 전자는 주관적인 상태가 된다.

꿈은 절대로 무의미한 생물학적 본성에 근원을 둔 활동이 아니고,

생리적 반응에 속한 것도 아닌 의도적이고 목적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미있는 현상이다.

영화와 같이 주제와 목적이 뚜렷다.
물론 그렇지 않아 보이는 꿈들도 있다.

일명 개꿈이라고 하는데 영적으로 논하면 이는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혼란스럽지만 이에도 의미는 있다.

꿈은 영화와 같다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꿈을 만드는 연출가 즉 감독을 시인해야 한다.
꿈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이며 실제적으로는 수호령/수호천사들이다.

꿈은 절대로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꿈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감독과 작가가 주체의 무의식이나 집단 무의식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영계나 영적존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수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꿈은 의미 없는 개꿈이 아니라
주제와 메시지를 담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통찰이고 믿음이다.


2) 꿈은 최면과 같다.


꿈속의 자아는 최면자가 피최면자의 암시적 언어에 복종적 행동을 하듯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속의 배우처럼 조종사로, 회사원으로, 선생으로 등등으로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최면자는 암시자에 의해서 나무토막이 되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하는 것과 같이

꿈속의 자아는 감독이 주문한 대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아무런 자각도 없이 그 캐릭터에 맞게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 통찰에서 발견할수 있는 영적비의가 있다.

사람은 타자를 조정할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 조정술(조정, 선동, 조작), 인간 조정술(대리자/분신)


3) 꿈은 영계와 같다.

영계에는 시공간과 물질이 없다. 그것들의 외현/외관만 있을뿐이다.
마찬가지로 꿈도 시공간과 물질이 없고 그것들의 가상만 있을뿐이다.

매트릭스 세계와 같디. 네오가 훈련했던 그곳과 같이 말이다.
가상들이지만 실재적으로 꿈속의 자아는 느낀다는 것이다.
현실과 동일하게 아니 그 보다 더 강하게 ....

영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꿈의 세계도 그러하다.

꿈속에서 외국어 방언이나 독심술이나 상념이 전파되는 것이나 심리조정이나 등등의 것들을 알게 모르게 체험을 하고 있다.

즉 초능력적 현상들이 자유자재라는 것이다.

 꿈속의 자아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그것은 영계에서 그러하듯이 夢(몽)계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2. 꿈을 보는 관점 : 목적론적인 시각과 인과론적인 시각


꿈의 관점을 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목적론적인 시각과 인과론적인 시각 입니다.

목적론적이 칼융과 스베덴 보리 (대부분)의 관점이고,
인과론이 프로이트와 일반 심리학의 관점 입니다.

1) 인과론적 시각 : 프로이드와  기독교적 구원론

 

[인과론적 시각]은 사람의 현재상태가 과거의 원인을 두고 일어난 것이다라는 교리에 근거를 합니다.

이 시각의 단점은 인과율과 같이 결정론적인 관점을 가지게 하고 과거로의 회귀를 하게 한다는 것.

장점은 인과율에 기반한 도덕성을 고양시킨다는 것과

 과거의 행위에 집중하게 하므로서 반성을 할수 있게 한다는 것 입니다.


참조) 이 인과론적 시각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관점 입니다.
실낙원에 대한 이해로부터 구원에 관한 교리를 세웠기 때문 입니다.

기독교 구원론과 그 밖의 성경을 기반으로 한 모든 종교들은

실낙원으로부터 구원에 관한 자신들 만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2) 목적론적 시각 : 융과 스베덴보리

[목적론적 시각]은 모든 현상을 목적론적으로 보는 것을 말 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절대 선의 신관에 근거하여 제 현상에 선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을 말 합니다.
꿈해석과 꿈에 대한 시각에서는 물론 위와같이 목적과 주제를 부여하여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을 말 합니다.

참조) 이것은 제 현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지양하도록 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야할 완성에 촛점을 맞추고 뜻과 생각을 이상에 독려 하도록 사람을 지도 합니다.

이것은 목적, 어떤 의미로, 뜻으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므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도록, 헤아리도록 만듭니다.

즉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에게 다가가게 만든다는 것 입니다.

피조물로 하여금 신에 대한 명상을 하게 만드는 것,
따라서 이 시각은 매우 종교적이요 신성한 고찰이 됩니다.

인과론적 시각은 과거의 그 일때문에 오늘날 내가 이와같은 苦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므로서 인생의 제 현상에 대하여 부정적 상념을 갖게 만듭니다.

반면 목적론적 시각은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하여 일어난 일로서 결과적으로 선으로

 만들 것이다 라고 하므로서 긍정적 상념을 사람으로 하여금 갖게 만듭니다.

목적론적 시각은 기독교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교리와

불교의 대승기신론의 여래장 교리와 상통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의 여래장이란 모든 현상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펌)

 

천국의 모습-2 (클라랜스 라킨의 영계) ‥성경

2007/11/20 21:00

 

복사 http://blog.naver.com/jskim5838/120044795335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 aspire7
원문 http://blog.naver.com/aspire7/43336629

http://www.aspire7.net/belief-1-12-b.html

 

천국의 모습-2 (클라랜스 라킨의 영계)

 

* 목차

1. 영의 세계

2. 하늘과 지옥

3. 아름다운 궁전

 

 

1. 영의 세계

성경은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 시대에 팽배한 물질주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이 영의 세계에 대해 보여주는 것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가는데는 단 하나의 계단이 있으며, 이 두 세계를 나누고 있는 베일은 바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하늘에는 모두 영적 존재들만 있으며, 그들은 두 종류 즉 좋은 존재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집니다. 그들은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 '정사들', '권능들', '어두움의 주관자들', '악한 영들'(엡6:12), '왕좌들', '지배들'(골1:16),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옥에 있는 영들'(벧전3:18-20), '마귀들', '미혹하는 영들'(딤전4:1) 등으로 구분됩니다.

히브리서 12:22에 있듯이,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들은 매우 큰 능력을 갖고 있으나 전능하지는 못합니다(살후1:7). 그들은 힘이 매우 강해, 천사 하나가 하룻밤 사이에 앗시리아의 군대 185,00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천사 하나가 그리스도께서 누워 계셨던 무덤에서 큰돌을 굴려 냈고, 장래에는 또 다른 천사 하나가 사탄을 결박해서 '바닥 없는 구덩이'(무저갱) 속으로 던져 넣을 것입니다. 이들은 다 영광스런 존재들이며(눅9:26),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에게는 수종드는 영들이며(히1:13,14), 사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하는 존재들입니다(살후1:7,8). 장래에 이 천사들은 세상의 사방에서 이스라엘의 선택된 자들을 불러모을 것이며(마24:31), 하나님의 백성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줄 것입니다(왕상19:4-8).

영적 세계의 "정사들과 권능들" 가운데는 뛰어난 존재들이 셋 있습니다.

1. 미카엘

그는 다니엘서에서 세 번 언급되고 있으며(단10:13,21,12:1), 다니엘의 백성 즉 유다인들을 대표하는 통치자(Prince)로 칭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유다서 9절에서 천사장으로 불립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을 보면, 그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군대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인들을 사탄의 권능으로부터 건져내며 하늘에서부터 사탄과 그의 천사들을 땅으로 추방시키는 것입니다(계12:7-9). 그는 또한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니엘서 12:1,2에서 언급된 부활과 연관되어 있고, 마귀와 더불어 모세의 부활에 대해 경합을 벌였으며(유9),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때 들리게 될 천사장의 음성이 바로 미카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천사장이 미카엘이라는 것은 그가 성경에서 언급된 유일한 천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확실합니다.

2. 가브리엘

그는 성경에 이름과 더불어 네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니엘서에 두 번 나오고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서 8:16, 9:21-27에서, 그는 다니엘에게 나타나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를 알려 주었고, 초림의 때가 되자 사카랴에게 나타나 그리스도 보다 먼저 온 밥티스트(침례자) 요한의 출생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출생을 알려 주었습니다(눅1:19,26,27). 그가 사카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서 그의 지위가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는 가브리엘이라."

3. 사탄

우리가 마지막으로 사탄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가 결코 이 셋 중 가장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악한 성품 때문에 그는 여러 면에서 매우 큰 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무정부 상태나 반역의 근원입니다. 사탄에 관해서는 다음 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의 세계와 사람과의 관계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로 두 개의 세계, 즉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를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케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케 하시는 도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없이 보전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5:23).

그는 또한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강력하며, 양날 가진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갈라내기까지 하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는 분이심이라"(히4:12).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사람이 삼위일체, 즉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구약시대의 장막은 밖에 있는 뜰에 의해 둘러 쌓였고, 이 뜰은 막으로 된 펜스로 둘러 쌓였습니다(장막 그림을 참조하기 바람). 이 장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고, 하나의 길이는 다른 하나의 길이의 두 배이며 그 사이에 베일 즉 커튼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방 중 큰 것은 거룩한 곳 즉 성소라 불렸으며 밖에서 들어가려면 커튼이 쳐져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는 '진열하는 빵을 담은 상'과 '향단', 그리고 '일곱 개의 가지로 된 등잔대'가 있었습니다. 두 방중 작은 방은 성소로부터 베일 즉 두 방을 나누어주는 커튼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안에는 '계약의 궤'가 있었고 이 궤의 뚜껑 위에 있는 케루빔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세카이나 영광' 중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이 방은 '가장 거룩한 곳' 즉 '지성소'라 불렸습니다. 장막 안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안에 들어가는 단 하나의 출입구는 성소에 이르는 커튼으로 닫혀진 문뿐이었습니다. 이 장막과 그 주변의 뜰은 사람의 세 가지 본질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뜰은 몸을 나타내고, 성소는 혼을, 그리고 지성소는 영을 나타냅니다. 성소를 통하지 않고는 뜰에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듯이, 사람의 경우에도 오직 혼을 통해서만 영과 몸이 통할 수가 있습니다. 장막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의 영께서 지성소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완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의 영적 상태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사람의 본질 중의 영의 방을 소유하시기 전까지는 새롭게 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새로 태어나는 것, 즉 거듭남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세 가지 본질"이라는 그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자리에 있는 원은 사람의 몸을 나타내고, 중간의 원은 혼을,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원은 사람의 영을 나타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적인 것"(고전3:53), "자연적인 것"(고전2:14), 그리고 "영적인 것"(고전3:1)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장자리에 있는 원을 보면 몸은 다섯 가지 감각 즉 "보는 것", "냄새 맡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 등을 통해 물질 세상과 접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에 이르는 문에는 "상상", "양심", "기억", "이성", "애정" 등이 있습니다. 영은 혼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영이 갖고 있는 영적 기능은 "믿음", "소망", "경외심", "기도", "경배" 등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사람의 영이 하늘로부터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죄가 영의 창문을 막아 버렸고 커튼을 내림으로써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같은 상태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생명"과 "빛"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이 영의 방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능력 즉 "생명"과 "빛"을 주시는 능력으로 채우실 때에야 비로소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인이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인은 그의 영적 상태가 새롭게 될 때까지 결코 영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연인의 영은 어두움 가운데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가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을 하면서 성령님께서 들어가는 것을 막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혼과 영은 몸으로부터 분리되고 몸은 무덤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영은 결코 몸이 없는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혼적인 몸" 혹은 "영혼의 몸"이라 부른 몸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같은 "혼적인 몸"은 듣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으므로, 어떤 만질 수 있는 형태를 취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 몸은 형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몸은 완전치 못하여 어떤 제약이 있긴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활 시에 자신이 원래 소유했던 육적인 몸을 다시 얻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혼적인 몸"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가복음 16:19-31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비유가 아니며 예수님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다른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묘사한 실제 사건입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의 몸은 땅속에 있었습니다. '지하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은 그들의 육적인 몸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그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사로가 몸이 없었다면, 그 일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그 몸이 육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육적인 몸은 땅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곳에서의 그의 몸은 혼적인 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 혼적인 몸이 단순히 어떤 형태를 지닌 몸이 아니라 밖으로 보이는 형태나 모습에서 그 몸의 소유주가 땅에서 갖고 있던 육적인 몸과 똑같은 몸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그 세상에서 그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도 부자는 여전히 보고, 느끼고, 목말라하고, 말하고, 기억할 수 있었으며, 이 사실은 그가 감각을 갖고 있고 그 자신의 인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사실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옮겨 갈 때에 제칠일 안식교인들이 주장하는 '혼이 잠잔다는 것' 등과 같은 어떤 불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잠잔다'라는 표현이 쓰일 때는 항상 몸에 관한 것이며, 결코 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잠잔다'는 표현은 항상 성도에게만 적용됩니다.

자 이제부터 영과 혼이 몸을 떠난 뒤에 어떻게 되는가 살펴봅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에 대한 묘사장면을 보게 됩니다. 다음에 있는 "지하 세계"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하 세계"는 낙원과 지옥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사람이 서로 지나갈 수 없는 깊이 갈라진 틈이 있습니다(여기의 지옥은 최후의 지옥 즉 게헨나라고 불리는 '불의 호수'가 아님) 이같이 깊이 갈라진 틈의 밑에는 '바닥 없는 구덩이'(무저갱) 혹은 '아비쓰'가 있습니다. 바로 이 곳에 '사악한 영들' 즉 마귀들이 현재 갇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이 구멍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며 그의 이름은 아폴리온입니다. 이 구멍은 현재 하나님께서 막아 놓으셨으며 후에 그분께서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그것을 여실 것입니다(계9:1-16, 17:8, 20:1-3).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의로운 사람의 영과 혼이 '지하 세계'의 낙원 부분으로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후에 바로 그 낙원에서 '회개했던 강도'를 만나셨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시던 날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지하 세계로부터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분께서는 혼자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낙원에 있던 이들을 다 데리고 나오시며 그곳을 닫아버렸고, 그래서 이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계1:18). 이 구절의 사망은 무덤을 의미하며 지옥은 '지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온 사람들 중 몇몇은 자기들의 몸을 받아 그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마27:52,53). 그 나머지는 사도 바울이 들려 올라갔던 셋째 하늘에 올라갔습니다(고후12:14).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죽은 의로운 자들의 혼은 바로 이곳으로 직접 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빌1:23, 고후5:8). 바로 이 곳에서 의로운 자들의 혼은 그들의 몸이 부활하는 때가 이르기까지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자신의 교회를 만나러 오실 때에, 그분께서는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의로운 자들의 혼을 다시 데리고 오십니다. 왜냐하면 그 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을 그분께서 자신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살전4:14). 그들은 땅에까지 와서 무덤에서 자기들의 몸을 받아 "휴거 받은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지하 세계" 그림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사악한 자들의 혼은 지금도 여전히 지하 세계의 지옥에 갇혀 있으며 둘째 부활의 때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 둘째 부활 때에 이들은 땅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몸을 받고 곧장 '흰 왕좌 심판'으로 들어갑니다. 이 심판 후에 그들은 둘째 사망 선고를 받게 되며, 이것은 그들이 몸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두 번째 죽는 것을 뜻하며 육적인 몸이 없는 영들로서(즉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처럼) 최종 지옥인 게헨나, 즉 불의 호수 속으로 던져져 영원토록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혼과 영은 불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사악한 자들이 둘째 사망에 의해 그 몸을 다시 잃은 후에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막9:43-48).

현재 우리는 "영적 강신술"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것은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강신술 혹은 심령술은 사실 마귀를 숭배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레20:6, 27, 신18:10, 11, 사8:19). 구약성경에 나오는 "친숙한 영" 혹은 "익숙한 영"은 신약시대의 마귀요 곧 "미혹케하는 영"인 것입니다.

심령술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마지막 시대에 '심령술'이 부흥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경고를 받아왔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귀기울이리라, 하셨으니, 그들은 달군 쇠로 화인(火印) 맞은 양심을 가지고, 위선 가운데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라는 구절은 독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결혼관계의 폐기나 자유 결혼(혹은 연애)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음식물을 삼가라"라는 구절은 금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을 하지 말고 채식만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채식을 하게 되면 육식을 하는 경우 보다 영적인 힘에 더 민감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그래서 힌두교도들이나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채식만을 강조함). 사도바울의 이같은 경고가 7절에 있는 말씀 즉 "늙은 부녀자들의 허망한 우화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연습하라."라는 말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무슨 무슨 주의"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 사이언스'야말로 '늙은 부녀'의 우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주창자였던 에디 부인은 여러 번 결혼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늙은 부녀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마녀들과 성경에 나오는 영매들, 그리고 현시대의 영매들이 여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인류를 파멸시키려 한 것은 아담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브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인들의 노심초사하는 성격이나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 성격이 마귀들의 계략에 좀 더 쉽게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령술"혹은 "마귀 숭배"의 부활은 "이 시대의 표적" 중 하나이며 하나님의 참 자녀에게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어두움의 권능들에 속해 있습니다. 이 마귀들은 숫자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큰 군대요 사탄을 위한 일에 능숙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중앙 정부는 '바닥 없는 구덩이'에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서부터 나아갑니다(계9:1-11). 그런데 사실 이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천사들은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사람이나 돼지 같은 동물에 들어가 그 몸을 소유하고 조절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영들임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담 이전의 땅"에 거하던 자들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존재들의 죄로 말미암아 땅은 파괴되었고 그들의 몸은 땅을 삼켜 버린 재앙 속에서 파멸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들어가려는 그들의 욕망과 목적은 그들이 한 때 거주했던 이 땅에서 다시 한번 몸을 갖고 살려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인격과 개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눅8:26-33). 물론 이 마귀들은 보통 사람 이상의 지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자기들이 궁극적으로는 고통의 장소에 갇힐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8:29).

인간의 몸에 대한 마귀들의 권능

이 마귀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만들 수 있고(마9:32,33), 못 보게 할 수 있으며(마12:22), 미치게 할 수 있고(눅8:26-35), 자살하게 할 수 있고(막9:22), 신체에 해를 입힐 수 있고(막9:18), 어떤 초능력을 부여할 수 있으며(눅8:29) 몸의 변형이나 불구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눅13:11-17).

마귀들의 포악한 성격은 자신들의 피해자들을 다루는데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자들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며(롬6:13), 마귀들의 교리를 선포하는데 사용하며(딤전4:1), "저주받을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데 사용합니다(벧후2:1). 피해자를 이같이 악용하는 것은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 결과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마귀 들린 남녀들의 행동은 마귀들이 그들을 소유하여 육적이며 성적인 만족을 위해 사용하려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아담 이전의 땅이 파멸된 원인이 바로 "관능주의"라는 죄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 들린 자들이 벌거벗고 살려는 욕망을 갖고 있고 탐욕적이며 정욕에 가득 찬 삶을 살려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혹하게 하는 영들"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점점 증대하고 있는 이 마지막 시대 속에서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의 복장이 건전치 못하며 사람들이 광란적으로 춤을 춘다는 것이 다 위의 사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종종 남편과 아내를 나누어 놓고 "자유연애"의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가정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희생자를 제어하고 그 희생자의 마음과 몸을 파괴시키고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희생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섬으로써 마귀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그는 혼과 몸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마귀를 내어쫓을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마귀 들리는 것과 질병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희생자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며 입에서 거품을 토하게 하고 이빨을 부득부득 갈게 만드는 간질과 마귀 들리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임을 보여줍니다(마태4:24)

고린도전서 10장 20절과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희생으로 드리는 것들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님의 잔을 마시고 또 마귀들의 잔을 마실 수 없으며,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또 마귀들의 식탁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은 이교도들의 숭배의식의 배후에 마귀숭배가 있음을 보여주며, 이들의 축제가 난장판이 되며 이들의 숭배형식이 탐욕적이며 관능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미 죽은 자들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의 글, 즉 거룩한 성경기록이 있어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든지 부자든지 땅으로 다시 가서 그의 형제들에게 경고를 해 주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선한 자의 영이든 악한자의 영이든 일단 죽으면 이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령술 혹은 강신술은 거짓이며, 말세에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을 방황하게 만들려는 사탄의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심령술에 빠지는 사람은 그 지각이 어둡게 되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되고 마귀들의 권능과 제어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엡4:17-19).

 

 

2. 하늘과 지옥

성경은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영원토록 거할 두 가지 장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름 아닌 하늘과 지옥입니다. (한국사람들은 보통 하늘을 천국이라 부르지만 영어로는 하늘이 맞습니다) 전자는 후자를 필요로 하며, 후자는 전자를 필요로 합니다. 하늘의 반대인 지옥이 없이는 하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지옥이 없다면 하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책이 두 가지 장소를 다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Ⅰ. 하늘

하늘은 장소이지 어떤 상태나 조건이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 속한 도시이긴 하지만 하늘 자체는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계21:2).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하늘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하신 바로 그 장소입니다(요14:2).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서기 30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서기 96년 요한이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교회의 휴거 전에는 반드시 만들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가 거주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계21:9-10).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건축하시고 만드신,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음이라"(히11:10). 새 예루살렘은 바로 그 도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시가 없고, 오직 우리가 장차 임할 도시를 찾노니"(히13:14).

성경은 세 가지 하늘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지구의 대기가 있는 하늘. "곧 선을 베푸사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행14:17).

(2) 별들이 있는 하늘.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의 처소가 있는 높은 곳들(엡6:12).

(3)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 이곳은 사도바울이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그의 영이 그의 몸을 떠났을 때 끌려 올라갔던 곳, 즉 셋째 하늘입니다(행14:19-20). 바울은 그 곳을 셋째하늘과 낙원으로 부릅니다(고후12:1-4). 따라서 이 둘은 동일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낙원이 셋째 하늘의 어느 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의로운 자들이 죽으면 혼과 영은 하늘의 낙원구역으로 갑니다. 제7장 "영의 세계"를 참조하십시오. "낙원"이라는 단어는 "정원", "동산" 또는 "에워싸여진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은 나무들과 꽃들과 과실들이 있는 매우 아름다운 장소일 것입니다. 그곳에는 의인들의 "영들"이 "혼의" 몸을 입은 채 의식을 갖고 행복하게 거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든 시대들의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하면서 첫째 부활을 기다립니다. 첫째 부활 때에 그들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고 어린양(그리스도)과 혼인하여 신부의 집인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됩니다. 옆에 있는 그림을 보십시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늘 자체와 그 안에 있는 낙원,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구별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인 낙원이 영광스러운 장소이며 성도들이 거기서 하늘의 것들을 만끽하고 있지만, 그들이 어떤 한계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모든 영광스러운 권세를 가진 부활의 몸을 받지 않았으며, 상급이나 왕관을 받기 위해 심판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부터 마지막 22장까지 나와 있는 하늘과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며, 거기서 묘사된 일들은 교회의 휴거가 일어나기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거주자들에 대한 것은 휴거 이후에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기까지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관한 필자의 책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을 때, "지하 세계"의 낙원구역에 있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도록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지금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빌1:23) 가장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하늘로 옮겨진 성도들이 지하 세계에 있었을 때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성도들이 거하는 장소와 상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마음속에 확실히 새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의 상태에 관해 비성경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은 의로운 자들의 상태는 불완전하지만 매우 복되며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활동과 예배의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안식과 기다림의 상태일 것입니다(계14:13, 6:9-11). 낙원에 있는 성도들은 죄와 유혹으로부터, 슬픔, 병약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할 것입니다. 그들의 환경은 자연히 거룩한 삶과 연결될 것이며, 그 장소의 분위기는 사랑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이사야, 다니엘, 베드로, 요한, 그리고 바울과 같이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알아보게 될 것이며, 삶에서의 신비들을 모두 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며, 어린양께 자신들을 구원해준 것을 감사드리며 기뻐할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자기들의 행위들에 대한 상급을 받은 후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을 맡게 될 것이며, 아마도 이 세상에서 하던 일을 맡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왕 또는 왕자가 될 것이며, 다니엘은 정치가, 모세는 입법자, 바울은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기간에 성도들은 그분과 동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의 두 증인들로서 지상에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사들은 일을 하고 속죄 받은 자들도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봉사를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늙거나 피곤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을 것이며,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며 없어지지 않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보존하신 유업의 "공동상속자"로서 우리 주님과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벧전1:3-5). 하늘은 우리의 "아버지의 집"이며, 우리가 거할 집이며 "많은 저택들"이 있는 장소입니다(요14:2). 그곳에 가는 것은 기쁜 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 살며(히2:15),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지만, 하늘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라는 것을 아는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영광으로의 "탈출"을 위한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첫 번째 경험들

당신은 죽음 이후 첫 5분 동안 의로운 자들의 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몸을 공동묘지에 눕히기 전에, 장의사를 부르기 전에 또는 이웃들과 친척들에게 알리기 전에, 또는 커튼을 내리기 전에, 아니면 침대 곁에 있는 조용한 구경꾼들이 당신이 죽은 사실을 깨닫기 전에, 당신은 단 5분만에 당신의 몸에서 나와 낙원에 도착하여 당신이 영원을 보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 알게 됩니다. 그 5분 동안의 우리의 경험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우리의 첫 번째 경험은 죽음이 매우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이 들어 아름다운 세계에서 깨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요정들, 숲의 신, 그리고 악마들이 있는 "죽음의 계곡"이나 가로질러야 할 "어두운 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시중드는 천사들"이 나사로를 데리고 갔던 것처럼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눅16:22, 히1:13-14). 하늘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할 안내자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인도할 "안내 천사"를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도 기쁜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을 죽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2) 우리의 두 번째 경험은 우리가 육체의 약함들, 고통들, 그리고 한계들을 지닌 땅에서의 몸을 남겨두고 앞으로 거주하게 될 영적인 영역에 적합한 매우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세 번째 경험은 우리가 빠른 속도로 그 광채가 태양보다 더 밝은 아름다운 나라를 향하여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위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곳에 도착할 때 우리를 만나러 그리고 우리를 집으로 안내하기 위해 천사들의 무리가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천사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할 것입니다.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로 생명의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대문들을 통과하여 도시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로다"(계22:14).

(4) 우리의 네 번째 경험은 우리가 사랑의 분위기로 가득찬 새로운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집에서는 어떠한 부조화나 불협화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특징은 거룩함입니다.

(5) 우리의 다섯 번째의 경험은 우리가 예수님 곁에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실제적으로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의식할 것입니다.

(6) 우리의 여섯 번째 경험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필자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우리의 "안내천사"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우리가 오는 것을 알려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믿습니다.

(7) 우리의 일곱 번째의 경험은 우리보다 먼저 간 족장들, 대언자들, 사도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시절의 크리스천 지도자들 같은 성도들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경험들이 죽음 이후 첫 5분 안에 모두다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나, 틀림없이 장례예배가 끝나서 우리의 몸이 안식을 위해 무덤 안에 놓여지기 전에는 다 일어날 것입니다.

Ⅱ. 지옥

하늘과는 다른 세계인 지옥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지하 세계에 관해 성경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말인 "스올"(Sheol)은 구약에서 65번 나오며 이 중에 31번은 "지옥"(Hell)으로, 31번은 "무덤"(Grave)으로, 그리고 나머지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하데스(Hades)로 총 11번 나오며 이중에서 10번은 지옥이라고 번역되었고 1번은 "무덤"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스올과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상태' 또는 '죽은 사람의 혼과 영이 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거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의 몸은 무덤으로 들어가며,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게버(Geber)이며, 그리스어는 므네메이온(Mnemeion) 입니다. 스올이나 하데스는 사악한 자들이 궁극적인 형벌을 받는 지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최종 형벌의 지옥은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토펫(Tophet)이고 신약의 그리스어로는 게헨나(Gehenna)입니다. 이 단어들은 아부소스(Abussos)인 '바닥없는 구덩이'(무저갱, 계20:1-3)를 뜻하지 않으며, 타르타루스(Tartarus), 즉 타락한 천사들이 갇혀있는 곳(벧후 2:4)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들은 지하 세계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장소들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바로 전에 나온 하늘들에 관한 그림을 봅시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속이 빈 지하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데스도 같은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이것들은 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옥(하데스)의 문들이 교회에 대항하여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6:18). 한편 부활하신 지하 세계로부터 돌아오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산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 무궁히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지옥의 열쇠와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계1: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쇠들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가장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이제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그분께서 먼저 땅의 아래 부분들로 내려가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뇨?"(엡4:9)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지옥(하데스)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데스 혹은 지하 세계는 지구의 심장부에 있음이 틀림없으며 그 그림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회한 도둑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바로 그 날 예수님께서 지하 세계 또는 하데스로 내려가셨으며, 따라서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하데스 안에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혼(그분의 몸은 지구의 표면 위에 요셉의 무덤 안에 있었음)이 지옥(하데스)에 내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된 바와 같이(시16:10,행2:27), 자신의 몸이 부패를 보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하데스로부터 되돌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분은 홀로 되돌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데스의 열쇠들을 취하사 자신이 들어갔던 낙원 구역(P)의 문을 열었으며 그 안에 사로잡힌 자들을 취하사 그곳을 비워 놓으시고, 위로 올라가시며 그들을 셋째 하늘(E)의 낙원구역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 그 곳에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하 세계의 낙원구역은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제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그분께서 먼저 땅의 아래 부분들로 내려가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뇨? 내려가셨던 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 훨씬 위로 올라가셨던 바로 그분이시니, 이는 모든 것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4:8-10).

저 세상에서의 부자와 나사로의 체험에 대한 기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당시의 지하 세계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눅16:19-31). 이 기사는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유에는 아브라함과 나사로와 같은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죽었고, 그들의 육적인 몸은 땅위에 있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한편 지하 세계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그들의 몸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의식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된 지하 세계의 낙원구역(P)에 있었고, 부자는 궁극적인 지옥, 즉 게헨나(불 호수)가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 죽어 그들의 혼들이 가는 지하 세계의 구역에 있는 지옥구역(H)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악한 자들의 혼은 부활 때까지 그곳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한편 지하 세계의 낙원구역(P)과 지옥구역(H)사이에는 서로가 건너 갈 수 없는 '깊이 갈라진 틈'이 있습니다(눅16:26). 이것은 죽은 사악한 자들이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와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이 깊은 구덩이는 바로 마귀가 갇혀있는 감옥(계9:1-21)에 이르는 입구로 되어있으며, 이 감옥에서 사탄은 1000년 동안 결박당하게 되며(계20:1-3,7-8) 이곳은 '바닥없는 구덩이'(무저갱) 또는 심연(Abyss)입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아바돈(Abaddon)이라 하는 지하 세계의 장소에 대해 말하며, 신약성경은 아폴레이아(Apoleia)라는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멸망(잠27:20,욥26;6,28:22,31:12,시88:11. 잠15:11)으로 번역되었으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마7:13,롬9:22. 빌3:19. 벧후2:1,3:16) 잠언27:20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과 멸망은 결코 가득 차지 않으며." 이처럼 아바돈과 하데스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아바돈이 지하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계9:1-3,11을 살펴보면, 이같은 추측이 확실해 집니다. 여기에서 '바닥없는 구덩이'(무저갱)의 왕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으로 그리스어로는 아폴리온으로 칭함을 받습니다. 무저갱의 왕은 멸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따라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무저갱이라 번역된 단어는 아부소스(Abussos) 또는 아비쓰(Abyss)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비쓰가 아홉번 나옵니다(롬10:7, 계9:1-2, 9:11, 11:7, 17:8, 20:1-3). 이곳은 마귀들이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보내지 말라고 간청했던 장소입니다. "그들이 그분께 간청하기를, 나가서 깊음 속으로 들어가라 명령하지 마옵소서, 하더니"(눅8:31). 이 구절에 나오는 깊음이 바로 아비쓰입니다. 무저갱 또는 아비쓰(A)는 지하 세계에서 낙원(P)과 지옥(H)보다 더 깊은 곳이며, 마귀들과 천한 영들이 마침내 그들의 주인인 사탄과 함께 영원토록 불 호수에 던져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무저갱의 왼쪽에는 타락한 천사들의 감옥(벧후2:4,유6)인 타르타루스(Tartarus)가 있습니다. 이 천사들은 사탄의 천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천사들은 현재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타르타루스에 감금된 타락한 천사들은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들의 엄청난 죄는 대홍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죽은 사악한 자들과 함께 흰 왕좌 심판을 받을 때까지 그 감옥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두움 아래 예비해 두셨으며"(유6).

무저갱의 오른쪽에는 게헨나(G)가 있습니다. 이곳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궁극적인 지옥 또는 불 호수입니다. 큰 흰 왕좌 심판이 있은 후에 죽은 사악한 자들은 영원을 보내기 위하여 그곳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25:41),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펼쳐지고 또 다른 책이 펼쳐지니, 곧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자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고,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 속으로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호수 속으로 던져지더라."(계20:12-15) 이곳은 구약에서 히브리어(왕하23:10. 사30:33,렘7:31-32,19:6,11-14)로 '토펫'(Tophet)이라 불리며 신약에서는 그리스어로 12번에 걸쳐 '게헨나'(마5:22,29-30. 10:28. 18:9. 23:15,33. 막9:43,45-47,눅12:5. 약3:6)라 불리며 5번에 걸쳐 '불 호수'라 불립니다. 이곳은 아직 차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인물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이고(계19:20),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에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들어가며(계20:10), 그 다음은 큰 흰 왕좌 심판이 있은 후에 지금은 타르타루스에 감금되어 있는 타락한 천사들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악한 자들이 들어갑니다(계20;12-15). 예루살렘의 남쪽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시대에 토펫이라 불리는 이 골짜기의 높은 장소에서 유다인 부모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이방신 몰록에게 주기 위해 불 속을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토펫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왕하23:10). 그곳의 불은 유황으로 지펴졌습니다. "토펫은 오래 전에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그가 그것을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 즉 주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사30:33). 후에 그 곳은 예루살렘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불들은 영원히 타올랐으며 아직 불타지 않은 채 남아있는 썩은 물질들은 벌레를 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힌놈이라 불리는 이 골짜기를 위해 게헨나라고 부르셨고 지옥 또는 불 호수의 모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합니다"(막9:43-48).

이 그림의 윗 부분에는 하늘이 보입니다. 그곳은 현재의 낙원(E)과 새 예루살렘(J)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석(C)과 크고 흰 왕좌(W)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화살표로 표시된 선들은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의 길과 운명을 표시해줍니다. 어떤 이들은 스올과 무덤이 동일하며 무덤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전도서 9:5,10), 혼은 몸의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무덤에 가는 것은 오직 몸뿐이므로, 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몸뿐입니다. 인간의 혼과 영은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니라 스올에 갑니다. 창37:35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무덤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여기에서 영국의 RV성경은 무덤대신에 스올이란 단어를 썼으며, 미국표준역본은 난 외주에 다음의 말을 달아 놓았습니다. "스올, 죽은 자들의 처소" 그리고 미국 침례교 출판사 판은 '지하 세계'라고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 자신이 무덤에 있는 자기의 아들에게 가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아들 요셉이 무덤에 있다고 믿지 않았고 그가 들짐승에 의해 잡아먹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창37:33). 야곱이 의미한 바는 자신이 스올, 즉, 지하 세계로 내려갈 것이고 거기서 요셉을 만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장소(무덤)에 가서는 자신이 결코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창25:8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아브라함)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합해지매" 자기의 백성에게로 합해졌다는 표현은 무덤 또는 가족 무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무덤은 그가 떠나온 칼대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상들의 혼들이 간 지하 세계에 갔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그곳에서 그들과 재회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다음의 구절과 함께 이삭의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창35:29) "그의 아들들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따라서 이 구절은 그의 혼이 지하 세계에서 자기의 백성에게로 합해진 반면에 그의 몸은 무덤에 묻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지하 세계에 간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늘에 가기에는 적절치 않는 사람들의 혼은 연옥이라 는 장소에 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옥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정화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연옥 교리는 1세기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주후 600년이 되어서야 하나의 교리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사람이 죽을 때 그들의 혼들이 즉시 하늘에 올라가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믿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시동안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죄를 정화시킬 중간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정화의 도구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이 교리는 더나아가서 연옥에 있는 혼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기도와 미사에 의존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교리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시켜 교회를 위한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구나 친지의 혼을 연옥의 고통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돈을 주고 미사를 행할 것입니다.

연옥교리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낙원과 지옥에 대한 그림에서는 어떠한 중간의 장소도 없습니다. 깊이 갈라진 틈은 동시에 지옥에 거하는 자들이 낙원으로 건너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연옥의 교리를 무효화시키며 회복교리도 또한 무효화시킵니다. 회복교리란 사악한 자들이 한동안 지옥에서 고통받고 그들의 죄들에 대해서 충분히 형벌 받은 후에 회복되어 하늘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사탄과 그의 천사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악한 권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지옥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원상 회복하실 그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분을 받아두어야 하나니, 이 원상회복의 때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으로 말씀해 오신 바니라"(행3:21).

이 구절의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 복원(회복)의 때에는 모든 것이 그들의 원래의 영광과 위치를 회복할 것이라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에는 모든 것을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모든 자신의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으로 한정시키는 조건부 종속절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이 오순절에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그들이 회개하고 회심할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행3:19). 물론 그 이후에 그분께서는 대언자들이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리라고 예언했던 것들을 그들에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회복하실 것들은 무엇입니까? (1)그들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회복시킴(아모스9:14-15). (2)땅의 생산력의 회복(요엘2:24-26). (3)왕국의 회복(단7:13-14). (4)짐승의 경우에는 에덴에서의 조화상태로의 회복(사11:6-9). (5)족장 시대의 회복(슥8:4). (6)타락이전의 원래 상태로의 지구의 회복(계21:1). 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 또는 우주의 악한 권세들의 원상회복을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그들이 영원토록 또는 시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계20:10, 마25:46).

이같은 회복교리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는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하 세계의 지옥구역에 있는 사악한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또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같은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주장이 생겼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데스로 내려오셨을 때 거기에 감금되어 있던 잃어버린 영들에게 설교하셨다고 주장하며, 베드로전서의 다음 구절에 자기들의 논쟁의 기초를 둡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당하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일찍이 노아의 날들에 방주가 예비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가 몇 안되니, 곧 여덟 혼이라"(벧전3:18-20).

예수님께서는 지하 세계로 내려오셨을 때 지옥구역에 간 것이 아니고 낙원구역에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죽어있는 사악한 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그분께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있는 영들"은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죽어있는 사악한 자들의 영들"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 때에 사람의 딸들과 동거함으로 인해 자기들의 첫 번째 위치를 잃어버리고 타르타루스에 감금된 천사들입니다. 사실 지하 세계에 내려가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타르타루스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몸소 선포하지 않았고 다만 성령님으로 선포하셨고, 성령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120년동안 타르타루스로 추방되기 전에 여전히 지상에 남아있었던 그 타락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만일 사악한 자들이 다음 세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된다면, 누가 그것을 선포할 것입니까? 만일 인간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하여 이생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 성경, 복음의 선포, 성령님의 역사가 여기서 아무 소용이 없다면, 그러한 것들이 전무하고 전적으로 악한 환경으로 둘러싸인 지옥에서는 무엇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까? 성품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성품이 고정될 때, 상태 역시 변하지 않고 정해집니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우며,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할지니라"(계22:11). 계시록의 말씀들은 죽을 때 성품이 고정되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악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기회들에 대한 기억들이 그들을 회개로 이끌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경건한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회개로 그들을 인도하실 성령님이 거기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 없이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형벌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면 복음은 쓸데없는 것이 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을 벌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사실 형벌은 범죄자들을 오히려 무감각하게 합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눅16:23-28)는 회개조차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휼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고통의 장소로부터 나와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려는 열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바싹 마른 혀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형벌이 사악한 자들을 더욱더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그 책에 나오는 재앙 속에서 고통 당한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고 오히려 바위들과 산들이 자기들 위에 떨어져 자신들을 왕좌에 앉으신 분의 면전으로부터 숨겨주라고 부르짖습니다(계6:16-17) 그들은 또한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며(계16;21), 심지어 사탄도 무저갱에서 추방의 1000년의 기간이 있은 후에도 전에 보다 더 악하게 나타납니다(계20:7-8). 만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의로움보다 악을 선택한다면, 지옥이 그들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자기들이 낮게 되기를 원하는 만큼 낮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슬픈 것은 죽음이 그들의 죄 짓는 것을 지체시키지 못하여 죄의 발전을 지체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가속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악한 자들이 지옥 속에 얼마나 깊은 곳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 하나님께서 다음 세상에서 사악한 자들을 구원할 어떤 방법을 고안해 내실 수는 없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며(딤전2:4), 사악한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며(겔33:11)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다(히2:9)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고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합니다.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을 통한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만일 어떤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 당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길을 예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빌립보서 2장 10,11절 말씀을 인용할지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라는 그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할지 모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바다에 있는 생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말하되,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계5:13). 맞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백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복당한 사람은 궁핍함 때문에 정복자의 우월성을 인정하지만, 그것 자체가 그의 마음의 변화를 암시하지는 않습니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에 있는 모든 악의 권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실 뿐아니라 왕들 중의 왕이시며 군주들 중의 군주시라고 자백할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하늘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의 문제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안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덤의 다른 편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무덤 저편에 있는 "몸 안에서" (고후5:10) 행한 것에 대해 심판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길을 가리니,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이 말씀은 만일 사람들이 뉘우치지 않고 죽는다면, 결코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연옥의 교리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의 죽음이 충분하다면,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고 한 번에 낙원에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미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주님의 만찬의 목적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만찬은 성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십자가사건을 되돌아보고 그분의 오심을 고대하는 기념행사일 뿐입니다.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는 것이니라."(고전11:26). 에덴에서의 타락과 갈보리사이에는 희생단이 있고 갈보리와 재림사이에는 만찬의 상이 있으며, 재림과 새하늘과 새땅 사이에는 통치의 왕좌가 있습니다. 전에 나온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에 관한 그림을 보십시오. 갈보리와 재림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상을 놓았는데, 과연 누가 거기에다 희생단을 세울 수 있습니까? 상을 희생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위에 희생예물을 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빵과 포도주가, 천주교에서 말하듯이 실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면,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고 미사의 참여자는 하나님을 먹으며 또한 인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기에 식인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이 제정된 당시의 상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유월절 만찬 이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상징화했던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실 참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미 피를 흘린 유월절 어린양을 막 먹으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자신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빵을 취하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전11:24).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전11:25). "이것은 나의 피니라"라고 컵의 내용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 컵을 건네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의 혈관을 열어서 자신의 생명의 피가 그 컵 속으로 흘러가게 하셨습니까? 그 날밤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빵이 이제 막 십자가에서 부수어질 자신의 몸을 상징하며 그 컵은 앞으로 흘릴 자신의 피를 상징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설명해 주려했던 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자신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양이 상징화했던 것을 성취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매번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짐승의 희생 예물들은 이제 폐지되었고 그분 자신을 드린 것은 단 한번뿐이며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위한 희생이 없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히10:12-18).

영혼 소멸론

영혼소멸론은 사악한 자들이 죽을 때, 혹은 심판후 완전히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죽음에 대한 거짓된 관점에 그 기초를 두고 있고 "멸망"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결과 생기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악한 자들이 죽을 때 없어져 버린다면, 사악한 자들의 부활과 부활이후의 심판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요5:28-29, 계20:12-15). 눅16:19-31의 말씀은 그 사악한 부자가 몸에 관한 한 죽어서 땅에 묻혔었지만 여전히 지옥에서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몸에 관해서는 죽었지만, 그의 혼은 자기 자신의 갈 곳으로 갔습니다(행1:25). 다시 한번 우리는 끝없는 형벌이 사악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소멸은 영원한 형벌도 아니며, 실제로 아무 형벌도 아닙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타르타루스에 있으며, 후에 심판 받을 것입니다(유6). 본질적으로 소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또다른 형태 또는 상태로는 변하지만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멸망"이라는 단어는 결코 소멸이나 존재의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손실" 또는 "황폐"를 의미하고, 멸망된 것은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에 더 이상 맞지 않으며 그 존재 형태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파라오의 종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직도 이집트가 멸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출10:7) 그러나 이집트는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멸망시키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켜 세우리라"(요2:18-22). 여기에서 그분은 "자신의 몸이 성전임"을 의미하셨으며, 그들이 십자가에서 그 몸을 파괴시켰지만 그분께서는 삼일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미래의 영원한 형벌

마25:46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사악한 자들)은 영존하는 형벌에 의로운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원래 이 말씀들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지만 형벌이라는 개념은 개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마25:31,32 참조). 이 구절에서 나오는 "영존하는"과 "영원한"이라는 단어는 둘 다 똑같은 그리스어인 "아이오니오스(Aionios)"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아이온(Aion)"으로부터 왔고, 그것은 영어 단어로 "무한히 긴 시간" 또는 "시대"를 의미하는 'Aeon' 혹은 'Age'와 같은 말입니다. 그 단어는 "시대", 즉 시작과 끝을 가진 "한정된 기간"을 의미하며 시간적으로 영원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원"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에타스(Aetas)" 또는 "시대"로부터 왔습니다. 일년은 한정된 시간입니다. 그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작을 안다면, 정확히 365일이 지나서 그 일년이 끝난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시대"는 "무한정한 시간"입니다. 과거의 시대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의 시작과 끝은 알지만 그 시대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예로서 "창조의 시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시대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언제 시작할 것인지, 또는 언제 끝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대"라는 단어는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하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그리고"시대의 시대"는 우리가 "끝없는 기간" 또는 "영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 무궁토록"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며(계4:9-10, 5:14, 10:6, 15:7), 그것이 바로 "시대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 무궁한 기간 안에서 "사탄의 삼위일체"가 형벌을 받고(계20:10) 의인들이 통치합니다(계22:5).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만큼 오랫동안 존재하게 되므로, 그들은 "시대의 시대"동안 또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이 없어지고, 하늘도 없어지며, 우주도 사라져 버리고, 영원도 끝나며 하나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사망

의로운 자들은 부활한 후에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입니다(눅20:36). 그런데 사악한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 받은 후에 다시 죽게 됩니다(계20:12-15). 이같은 "둘째 사망"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의 "첫째 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사망은 그들의 몸으로부터의 혼과 영의 분리였습니다. 그래야만 눅16:24의 부자의 혼과 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혼과 영이 지하 세계의 지옥 구역의 화염 속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흰 왕좌 심판 이후에 사악한 자들은 불 호수로 던져지며 그 곳에서는 그들의 육체적 몸이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이 "다시 한번 죽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의 부활의 몸을 잃어버리고 단지 혼과 영만이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혼과 영은 화염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불 호수"가 참으로 불로 된 호수임을 나타내주고,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악한 자들이 불 호수에 던져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울부짖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바로 그분이셨습니다(마13:49-50, 마25:41). 그분은 또한 지옥 불이 꺼지지 않고 그들의 벌레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막9:43-48). 그리고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므로(계1:1), 사악한 자들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계시록이 무엇을 가르치든지 그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지옥의 교리"와 "영원한 형벌"이 가져다주는 윤리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죄의 생을 마감하고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와 회개와 구원의 복음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에 갈 수 있다는 "두 번의 기회가 있다"는 거짓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욕정의 고삐를 늦추고 위험한 속도로 멸망을 향해 질주할 것입니다. 세상에 불법이 성행하는 원인은 바로 이같이 해로운 가르침의 확산 때문입니다. 만일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더 많이 하면, 세상은 덜 지옥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늘로 직접 갈 수 있는데, 왜 지옥을 경유하여 하늘로 가고 싶어할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로부터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들을 영원토록 분리해야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 독자들이여!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긍휼의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너무 늦기 전에 앞으로 올 진노를 피할 것을 간청합니다.

 

 

3. 아름다운 궁전

존 번연은 자신의 책 「천로역정」(순례자의 길)에서 아름다운 궁전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저녁 때에 그 곳에 가서 숙박을 요청하며 '신중'이라는 젊은 여자를 문 곁에서 만나고 그 후에 '분별', '경건' 그리고 '관용'이 그를 환영합니다. 그날 밤에 크리스천은 해뜨는 쪽으로 문이 열려있는 좋은 다락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어 조반을 먹은 후에 그들은 그를 데리고 다니며 궁전을 두루 보여주었는데, 우선 그를 서재로 데려갔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병기고를 방문했습니다. 셋째 날, 그를 떠나보내기 전에 그들은 궁전 꼭대기로 그를 데려가서 임마누엘의 땅이 펼쳐져 있는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산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뒤 그들은 그를 데리고 다시 병기고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장시킨 후에 그의 여정 길을 가도록 보내주었습니다.

마이어 박사의 소책자인 「복된 삶을 향한 단계」의 제3장을 보면 왕의 방들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경험들을 궁전의 방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탄생의 방', '확신의 방', '굴복한 의지의 방' 등입니다. 이러한 방들은 열린 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펜테코스트 박사는 「죄들의 용서 안에서 넘치는 은혜」라는 자신의 소책자에서 번연과 마이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그것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나는 멋진 저택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상상해봅니다. 그 저택은 기쁨들의 정원과 사랑스러움의 공원들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안에는 언제나 열려있는 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당 안으로 돌아다니고 꽃밭에서 꽃밭으로 다니며 마당주위를 기쁨으로 산책합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멋진 저택을 향해 눈길을 돌리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집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당의 자유스러운 영역만으로 흡족해 하며 밖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널리 공표된 권리, 즉 그 집에 들어가서 그 안에 거주하는 분의 손님이 되는 그 권리를 가져보기를 열망합니다. 이들은 문으로 다가가서 널찍한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서는 그 출입구 위에 새겨진 글을 보고는 기뻐합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오라. 그리고 오는 자를 나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할 것이다.' 이 거대한 집의 멋진 문은 넓직히 열려 있으며 문 양편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종들이 서서 언제든지 죄인들이 와도 좋다는 하나님의 초대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떤 값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격증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행실 또는 현재의 상태에 관하여 어떤 질문도 하지 않으며 어떠한 부도 사회적 지위도 조사하지 않습니다. 왕자나 거지나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환영을 받습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 문의 입구를 향해 올라와서는 안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며칠동안 그리고 몇주 동안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지만 실제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곳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들어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택의 문 위에 멋진 초대의 글이 쓰여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 세 사람들, 번연, 마이어. 그리고 펜테코스트의 생각들은 영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저는 이들로부터 복도, 계단, 공적인 방, 그리고 사적인 방을 모두 갖춘 아름다운 궁전의 설계도를 그리는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단계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순례자는 "죄의 자각"(요8:9,행2:37)이라는 넓게 포장된 오솔길을 따라 아름다운 궁전에 접근합니다. 이 길은 곧 "용서"(행13:38)라는 동그란 길로 연결되며, "회개"(행2:38,고후7:10)라는 나선형계단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위를 걸으며 이제 순례자는 "자백의 현관"(마10:32-33,롬10:9-10)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궁전의 앞을 완전히 가로지르고 있으며 계단들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이제 필요한 것은 그들이 그분과 화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신과 화해케 하시고, 또 화해케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케 하시며,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케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느니라.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로 너희에게 권하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18-20). 우리는 이제 이 아름다운 궁전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 문

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사도 바울도 똑같은 진리를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는 우리 둘이 그분을 통하여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음이라"(엡2:18). 앞문이신 그리스도는 "새로운 탄생"이라는

 


 

2. 작은 문간방

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새로운 탄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궁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탄생의 작은 문간방은

3. 칭의의 복도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넓은 복도로부터 궁전의 내부 전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출입은 문과 계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1층에 있는 이 복도는 주 계단이 있는 더 넓은 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넓은 홀은 위로부터 조명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평화 라 불립니다. 이 넓은 홀 안에 있는 열린 벽난로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새로운 탄생의 작은 문간방 뒤에 있는 칭의의 복도로부터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방은

4. 휴식하는 방

입니다. 이 곳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

이 휴게실은 안락의자와 호화로운 긴 의자들로 꾸며져 있으며 벽난로 위에는 다음과 같은 선지자의 말을 풍유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32:2). 그 방의 맨 끝에는 이집트로부터 구원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안식처가 되었던 엘림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70 그루의 종려나무들 아래에서 그리고 12우물곁에서 기운을 되찾았습니다. 매우 감미로운 악기로부터 나오는 환희의 음악이 아름다운 목소리들과 어우러져 방의 공기를 타고 지금은 가까이 그리고 크게 들리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종탑의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작게 그리고 멀리 들려옵니다. 이 음악은 사람들을 경배로 초대하며 그들의 혼을 평화로 채우고 듣는 이로 하여금 모든 피로와 슬픔을 잊게 만들며, 동시에 그로 하여금 자신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히4:9)속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칭의의 복도의 왼편에는

5. 병기고

가 있습니다. 이 병기고의 출입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를 위하여 네가 또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이 방안에는 고대에 하나님의 종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전쟁 무기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지팡이, 야엘이 시세라를 죽이는데 사용했던 망치와 못,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도망치게 했던 물주전자들, 트럼펫들 그리고 램프들, 샴가르가 600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했던 소몰이 막대기, 삼손이 1000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살육하는데 사용했던 "턱뼈", 끝으로 다윗이 가쓰의 골리앗을 죽이는데 사용했던 "투석기와 돌멩이" 가 있습니다. 또한 양의 뿔들, 병자를 치유하는 손수건들, 과부가 자신의 향유를 보관했던 단지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유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 군사들을 위해 무기들과 갑옷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헬멧들, 검들, 방패들, 흉갑들, 허리띠들과 신발들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견디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18). 홀의 오른쪽으로 다시 건너가서 휴게실 뒤쪽으로 가면

6. 사무실

이라 불리는 작은 방이 있습니다. 이 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는 방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은 크리스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이 나오는 "크리스천 청지기직"의 방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에는 책상들, 의자들, 금고 그리고 전도회들과 크리스천 사역을 위한 다른 조직들의 매년 보고서들을 보관할 수 있는 선반들이 깔끔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매주 그리고 매달의 헌금을 위한 봉투들을 담은 상자들도 있습니다. 그 뒤에는 다음의 말들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주(週)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 대로 스스로 저축하여, 내가 갈 때에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그리고 금고 위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걸려 있습니다. "만군의 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사무실을 지나서 우리는

7. 서재

로 들어갑니다. 이 방은 정면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른 아침 성경공부에 안성맞춤인 둥근 퇴창(밖으로 내민창)을 갖춘 아름다운 방입니다. 널찍하고 평평한 공부책상 위에는 성경역본들과 용어색인들, 성경본문들과 사전들 그리고 주석서 등이 있습니다. 그 방안에 한 줄로 늘어 서 있는 선반에는 선교사들,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의 전기와, 교회사들, 성경교리 해설서들, 설교집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크리스천의 서적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책상의 정면에 있는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적혀 있습니다.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홀의 다른 편, 즉 서재의 맞은편은 바로

8. 화랑(그림진열실)

입니다. 이 방은 서재만큼이나 아름다우며, 역시 둥근 퇴창을 갖추고 있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태양 빛이 벽에 줄지어 걸려 있는 그림들 위에 최대의 효과를 만들기에 적당합니다. 이 그림들은 집주인의 생애와 성품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구약과 신약 사건들을 묘사한 것들입니다. 이 화랑에 있는 위대한 그림들 중에는 "이삭을 희생물로 드리는 아브라함"," 문설주 위의 피", " 바위를 치는 모세", "광야에서의 뱀", "속죄의 염소", "사자굴 안의 다니엘", "변화산에서의 변형", "십자가처형", " 부활", 그리고" 승천" 등이 있습니다.

그림진열실로부터 나와서 왼쪽으로 단지 한 두 걸음만 옮기면

9. 연회실

이 나옵니다. 그 출입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커다란 글자들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솔로몬의 노래 2:4).

이 방의 테이블에는 매우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들과 값비싼 포도주들이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주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25:6).

이 연회장의 천장과 벽들은 과일과 꽃 그림이 훌륭하게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식기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연회실의 뒤쪽에는 부엌이 있는데, 그 곳에서 이 궁전의 고용인들이 연회실에서 있을 잔치를 준비합니다. 커다란 홀로 되돌아가면서 우리는 일층을 떠나 넓은 계단을 올라갑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서는 곳에 서서, 그곳에 서있는 오래된 할아버지의 시계를 감탄의 눈길로 쳐다보고, 시계 바늘 위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시간을 값주고 사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라"(엡5:16). 계단 끝에서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방은

10. 목욕실

입니다. 여기에는 몸을 청결하게 하고 화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편의시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하여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요15:3). 그리고 이미 "중생의 씻음으로 인해서"(딛3:5)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침례를 통해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상징화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에 의하여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워지심같이, 우리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3-4).

우리는 이제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 방은

11. 내 뜻을 굽힘

이라는 방입니다. 이 방에 들어가는 문은 "헌신"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문 위에는 다음의 말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로써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의 몸들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하나의 산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그 입구는 좁기 때문에 모든 알려진 모든 죄를 포기할 뿐아니라 크리스천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거대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로를 달리며"(히12:1)

이 방은 그림진열실 바로 위에 있으며 역시 유리로 된 퇴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은 서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지는 해가 역광으로 그 방을 채우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복종시켰다는 것을 깨달은 영혼을 하늘의 빛으로 채워줍니다.

이 방으로부터 연결문을 통과하여 우리는

 

 

12. 확신

이라는 방으로 갑니다. 이 방으로 가는 문은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듯이 감정의 문이 아니고 지식의 문입니다. 그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너희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확신의 방의 벽은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장차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요일3:2).

이 확신의 방으로부터 또다른 연결문을 통과하여 한 걸음만 걸으면 우리는

13. 성령님 안에서 기뻐함

이라는 방에 들어갑니다. 이 연결문의 유리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붉은 색으로 음영(陰影)된 금문자로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롬14:17).

이 방은 악기들, 성가집들 그리고 찬양의 노래들로 가득차 있어서 기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영감 받은 시들, 찬송가들 그리고 특별히 이 방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았던 사람들의 노래들로 자기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벽에는 시편150편 말씀이 조명을 받으며 걸려 있습니다.

이제 복도를 가로질러 한 두 걸음만 가면

14. 죄를 이김

이라는 방이 나옵니다. 우리가 복도에서부터 이 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내 뜻을 굽힘"이라는 방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이 방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의 방의 문 위에는 다음의 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마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였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이 방의 특성은 그 방 주위 어디에서나 죽음의 상징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쪽 벽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림이 있고 그 밑에는 다음의 말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반대 벽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다음의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그 방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진정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입니다(롬6:11).

이 방으로부터 나와서 같은 편에 있는 다음 방으로 가면

15. 인내

라는 방이 나옵니다. 그 문에는 다음의 말들이 있습니다.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전체가 완전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이 방은 일로 인하여 우리의 힘이 다하거나 우리의 인내심이 크게 시험받았을 때 잠시 물러나 쉬는 곳입니다. 홀로 다시 나와서 우리는 서재 바로 위에 있는

16. 평화

의 방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 문 위에는 다음의 말들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주께로 정한 자를 완전한 화평 중에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천로역정」에서 자매들이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편안히 누워 잠을 자게 했던 곳이 바로 이 침실이었습니다. 이 방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잠을 깨었습니다. 이 방은 '하나님의 평화의 방'입니다. 잠든 자가 아침에 깰 때 그는 자신 앞에 있는 벽 위에 쓰인 다음의 말씀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화평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이 방의 가구와 장식물들은 참으로 마음을 달래줍니다. 평화의 침실은

17. 금식과 기도

라는 개인적인 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화의 방에 있었던 사람은 자신의 금식을 깨뜨리기 전에, 즉 아침을 먹기 전에 이 방으로 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이 곁방은 어느 쪽에도 창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방에는 천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그는 똑바로 은혜의 왕좌를 향하여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방에는 어두운 찬장이 있습니다. 그 내용물들은 이 궁전과 그 거주자들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그것은 포도주 찬장입니다. 기도 이후에 또는 기도 전에, 평화의 침실에 있던 자는 그 방안으로 가서 채움을 받으라고 지시 받거나 명령받습니다. 그 명령은 글자들로 찬장의 문 위에 쓰여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에는 지나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오순절 날 아침에 백이십 명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성령님의 새포도주로 가득찬 찬장을 갖춘 금식과 기도의 다락방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2층에는 우리가 아직 방문하지 않은 방이 하나 있습니다. 그 방은 바로

18.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방입니다. 그것은 집의 정면, 현관 바로 위에 위치해 있으며 반구형 모양의 꼭대기를 가진 둥근 퇴창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방은 꼭대기를 포함해서 사방이 유리로 되어서 온실과 같으며 이 방안에 앉아있는 것이야말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태양으로부터 오는 화학적인 광선들이 영적인 생명력과 활력으로 우리의 혼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 문 위에 있는 모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21).

마지막으로 관측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궁전의 지붕 위에 위치해 있으며 주 계단을 통해서 갈 수 있습니다. 이 곳으로부터 우리는 마을주변의 수마일 떨어진 곳의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남쪽에 있습니다. 거기 멀리에는 포도원들과 과수원들, 샘들과 수원(水原)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태양이 힘있게 비추고 있으며 하늘의 도시가 보이므로, 빛나는 존재들이 종종 거기에서 거닙니다. 그곳은 뷸라의 땅(평화와 안식의 땅)이라 불립니다. 맑은 날 밤에 언덕꼭대기로부터 그 하늘의 도시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궁전의 관측소로부터 이 모든 것들은 혼의 눈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이는 성령께서 모든 것, 실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살피심이라"(고전2:9,10).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같이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 궁전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 기쁨을 경험했으며, 결국 우리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낙원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 출처 : http://www.inchristjesus.net/

 

 

 

 

 영계의 계단     

      프란체쯔 지음/ 파네즈 엮음/ 이화서 옮김/ 신국판 / 304쪽/ 값10,000원

 

      ISBN 978-89-87321-50-9 03200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어느 이태리 귀족 화가가 영매를 통해

            전해 온 영계에서의 삶과 지상인과의 지고지선한 사랑 이야기 ,

                   그리고  영계에서의 선한 영혼으로 성장한  생생한 기록서!

 

 


 

 

“지상에 있는 여러분들은 영계에 대해 잘 모르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능한 한 쉽게 저의 영계에서의 경험을 들려 드림으로써 여러분들이 언젠가 지상을 떠날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구절은 영계에 있는 프란체쯔라는 영인이 지상의 영매 파네즈에게 영계에서의 자기 생활 얘기를 시작하는 첫마디이다.

그는 이태리 사교계에서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화가였는데 많은 여자들과의 교제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여인을 만나지 못하고 여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무렵 한 여인을 만난다. 그는 그녀가 너무 순결하고 고운 여인이어서 ‘착한 천사’라고 부르며 고귀하게 대한다.

그렇게 그녀를 통해 참된 사랑을 배워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게 된다. 그는 어두운 지옥에서 방황하다가 지상의 이 고결한 여인의 사랑의 힘으로 악령들의 유혹을 이기고, 영계의 지도자 아린지만 선생의 지도 아래 힘든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거치며 빛의 세계인 천국으로 성장해 올라간다.

이 책은 픽션이 아니다. 영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인이 지상의 영매를 통해 영계에서의 성장과정을 밝힌 ‘영계 성장기록’이다.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과거 지상생활에 대한 회개와 ‘희망의 형제단’의 일원으로서 어둠의 세계에 파견되어 악령들과 싸우면서 과거에 자기처럼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영인들을 구해 오는 활동을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내용들이다.

그는 지상에서의 기도가 영인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으며,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성장하고픈 의지만 있으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영계는 분명 있으며, 영통한 지상인들이 영계를 부분적으로 보고 전하는 이야기는 부분적인 것들로서 자칫하면 영계의 실상이 왜곡되어 전해질 수 있으니 그게 다라고 믿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내가 전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시험해 보고 싶다는 사람이 지상에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11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영계 성장기록’을 대하는 모든 분들이 영계의 실상을 이해함과 아울러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종교인들, 영계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영계에 대한 상식을 넓히기 위해 일독을 권한다.


<차  례>

제1장  암흑의 날들    

갑자기 찾아 온 죽음 /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 지표영계를 방황하다 / 희망의 형제단에 들어가다 / 지표영계에 파견되다 / 황혼의 나라에서의 활동 / 불안의 나라에서 라울을 구하다 / 무서운 복수의 유혹 / 동결의 나라의 참혹한 현상 / 산 자와 죽은 자의 교류 / 영계의 친절한 인도자 아린지만 / 한 단계 높은 영급으로


제2장 새벽의 빛

새벽의 나라에서의 만찬회 / 영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 최하층 영계 원정대에 참가하다 / 완전한 영시능력이란 / 아스트랄계와 그곳의 거주자들


제3장 암흑의 왕국

암흑의 세계에 접근하다 / 지옥의 불벽을 통과하다 / 사악하고 잔학한 제왕의 도시 / 잔혹한 정의의 법칙/ 해적과 함께 한 지옥의 구원 작업 / 살인자가 모이는 악마의 도시 / 가문이 자랑했던 선조의 궁전 /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당한 베네딕토 / 끝없는 지옥의 싸움 /

암흑의 왕국에 이별을 고하다


제4장 황금의 문

회개의 나라를 통과하다 / 아침의 나라에서 갖게 된 보금자리 / 황금의 문을 통과해 빛의 나라로 / 고차원 영계에서 본 지구/ 지상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악(惡)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 영계(靈界)의 의전(儀典) 및 음악담당 천사장 루시엘(Ruciel) 이 교만(驕慢)한 생각이 들어 절대자(絶對者)요, 유일신(唯一神)이신 하나님(G...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 금 열두 영(靈)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 태그: 아류, 시위, 교만, 선동, 마하트마... blog.daum.net/pshsosu   이서위상 | 이 블로그에서만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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