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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감 Ⅱ
[ 서문 ]
처음 작성하였던 “기억의 공감” 으로 인하여 많은 친구들과 어린시절 추억여행을 함께 한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거리의 조명은 무척 밝아지고 휘황찬란한 요즘 세상은 형형색색 각종 조명으로 겉보기에도 무척 화려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왠지 모르게 서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도 모른다.
지금 보다도 훨씬 더 어두운 밤을 살아왔던 우리들의 어린시절,,,,
그 시절의 겨울은 눈도 참 많이 내렸던 기억이다.
유난히도 희고 창백한 동지섣달 보름달 빛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마치 대낮이라 착각될 정도로 밝게 비추었던 그 시절 보름날 달빛의 기억은 마치 잘 찍은 흑백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던 나만의 기억들이다.
안방과 작은방 사이로 뚫어진 천장 벽 중간에서 30촉 백열전구 하나가 밝게 빛을 내며 동시에 방 두 개를 환하게 밝히던,,,, 아주 어린 시절.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장작 숯불을 철재 화로에 옮겨 담아 방안에 두고 긴긴 겨울 밤마다 따뜻한 난로로 사용하였고
한옥과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 집 방안 천장 속에서는 매일 밤 쥐들이 무리지어 달리기 시합을 하였기에 긴긴밤 밤잠을 설치었던 그 아주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의 공감” 여행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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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기억 - 목깐 & 목욕
아주 어린 시절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두레박이 설치된 동네우물이나, 집 안마당의 뽐푸(수동펌프)를 이용하여 물을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집 안마당 수동펌프에서 금방 퍼 올린 물로 등목이라도 하면 금방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물이었다.
화학제품의 사용이 거의 없었던 그 시절 맑고 깨끗한 물은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지붕 처마 아래에 커다란 다라나 바께쓰를 내어 놓아 빗물을 받아서 빨래 등에 사용하였으며
겨울철에 내리던 하얀 눈과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우리는 “아이스께끼” 라며 장난삼아 먹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여름 내내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파란 가을하늘을 무리지어 날아다니던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를 부르신다.
“왜, 부르실까 ~ ?”
분명 저녁 밥은 좀 전에 먹었는데,,,,
뭐 누룽지라도 주시려나.
암튼,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나는 나무문짝 빗장 사이로 부엌 내부를 들여다 본다.
아궁이 가마솥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있고, 부엌 바닥에는 큰 함석 다라가 놓여져 있다.
“오늘밤이 제삿날인가 ?”
“닭이라도 잡으려 그러시나 ~ ?”
마구 재촉하는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나는 그 곳 부엌으로 입장한다.
그리고 당신들이 상상하는 바로 그 장면이 이어진다.
징징거리며 칭얼대는 내 목소리와
손바닥으로 등짝 퍼질나게 두들겨 맞는 소리가 묘한 엇박자의 하모니를 이룬다,,,,,
어머니는 벼르고 별러 날을 제대로 잡았나 보다,,, 내 살가죽 벗기는 날을,,,,,
나의 외마디 비명소리는 우리 집 대문 밖 넘어 신작로까지 울려 퍼져 나간다.
잠시 시간이 흘러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고
“으 쒸~! 아파 죽겠네,,,”
어디서 주워 오셨는지 꺼칠하고 둥근 돌 맹이로 내 살가죽의 때를 문지르는 시술을 하였으니,,,
여리디 여린 어린시절 소중한 내 피부는 온전할 수 가 없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나는 한동안 그런 특별한 스킨케어를 받고 자랐었다.
지금에야 각 가정마다 파란색, 주황색의 목욕용 이태리 타올이 이리저리 굴러 다니지만,,,,
당시에는 “목깐” 조차 수시로 할 수 없었던 여건이었던 것 같다.
“두 번 다시 이런 목깐은 절대하지 않으리라” 고 다짐도 해보지만 그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후에도 수시로 벌어지던 일로서 내 피부는 돌맹이와 급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 큰 명절 전후에야 제대로 목욕시설이 갖추어진 “공중 목욕탕”을 구경하는 날이다.
당시 서산 읍내, 지금의 1호 광장 근처에 “동아목욕탕”이 있었고,,,, 이후 읍내동 서산극장 근처에 “신정 목욕탕” 이라는 곳도 이었다.
명절 즈음에야 방문하게 되는 “동아목욕탕”은 목욕을 하러온 사람들로 인하여 인산인해...... 그야말로 비집고 다닐 틈이 없는 북새통 그 자체이다.
집 부엌에서 뜨거운 물로 목깐이나 하지,,,,,,,,,
너무 복잡해,,,,,
어른들 틈에 끼어 숨쉬기도 버거워 진다,,,,
모처럼 작정하고 들어온 목욕탕에서 아주 뽕을 빼고 나오려 한다.
암튼, 목욕탕을 댕겨온 날이면 “하얀 구리모”도 얼굴에 바르고 인물이 몰라보게 훤~해져서 3~4일 동안은 나름 읍내스타일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그 어린시절 우리들은 영양을 따지는 여유가 없었던 식생활과 위생환경이 좋지 않은 탓으로 피부에는 "꼬마지", "부스럼"을 달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주변에서 찿아보기 조차 어렵지만 당시 “꼬마지”라 하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명래 고약”이라 불리우던 고약이 그 시대 명약 반열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절대 빠트릴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존경스러운 “이” 님 이시다.
“이 (louse)”에 대하여 궁금증이 유발되어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여 보았다.
그분의 성함 : 이 (louse〔라우즈〕)
그분의 크기 : 0.5mm~6mm
그분의 임신 : 약 7~14일
그분의 분류 : 절지동물 〉곤충강 〉이목
그분의 특징 : 이의 종류가 3,300종이고 날개가 없으며, 기생성으로 조류 및 포유류에 기생.
이것이 바로 아주 어린시절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 받쳐 애지중지 사육되었던 “이”와 관련한 불편한 진실이다.
당시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찿아 와서 처마 아래에 집을 짓고 사시던 강남 제비들로 인하여 더욱 더 심하였던 현상인 것 같다.
지금은 제비를 볼 수 도 없고 나이론 석유화학 섬유류와 각종 계면활성제를 사용하여 그분들의 생존환경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쉽게 볼 수도 없다.
그 귀해진 “이”를 보려면 지금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으려나 ~ ?
순간, 궁금해지네,,,,
하얀 쥐도 애완이라며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요즘시대에,,,,
이쯤에서 “이”나 한번 사육해 볼까 나 ~ ?
땅도 필요없고, 사료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대들의 몸만 빌려줘 봐봐,,,,, 가두리 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 좀 해보자 그 양식업.... ^^;
함께 동업할 의사가 있는 친구들 여기에 붙어라 ~ !
2. 두 번째 기억 - 서산 5일장
우리들의 어린시절 서산에는 매월 2, 7, 12, 17, 22, 27일은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오늘날 대형 마트가 주변에 널려 있고 상설시장인 서산 동부시장에서 장날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 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정겨운 장소가 남아있으니 바로 예천동 삼거리로 위치를 이동한 5일 동물가축시장이다.
그 옛날 서산의 5일장은 동부시장과 서부시장 2개로 나뉘어 같은 날 동시에 장이 열렸었다.
동부시장의 규모가 약간 더 있었고, 서부시장의 특징은 동물가축시장이 열리는 방식이었다.
당시 흔하지 않았던 애완동물 보다 가축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서울 가축병원”도 그 곳에 있었다.
바로 그 “서울 가축병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경신” “박영신” 쌍둥이 친구들의 집이다.
[ 돈 사기 ]
당시의 화폐 단위는 “원”과 “환”이 함께 통용되었고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1원 5원 10원 50원(독도 그림)짜리 종이 화폐와 50환짜리 동전은 5원으로 통용 되었던 기억이다.
그런 돈을 사기 위하여
성연, 지곡, 팔봉 방면에 사시는 분들이 서산 읍내장을 보려고 “지장내 고개”, “짚부리 재”, “울음산 언덕 고개”를 넘어 다녀야 하였으니 그들은 숙명의 고단한 삶이었을 것 이다.
그렇게 한 시대를 살아 왔던 우리들의 부모님들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편안한 것이다.
[ 장 구경하기 ]
장날 구입하던 물건 중에서 빨래할 때 사용할 “양잿물(수산화나트륨)”과, “성냥꼴”도 한 되 박 사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는 호롱불 등잔에 사용 할 석유도 한 병 구입하고, 그 시대에는 석유보다 빈병이 더 귀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다.
미싱(재봉틀)이 아주 귀하던 당시엔 혼수용품 1순위 이었으며, 당시 성행하였던 “이합상회” 포목점에서 옷감을 구입하여 집에서 직접 옷을 지어 입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하얀색 바지 저고리나, 치마 저고리를 주로 입었었던 시대이다.
나름, 각자 집에서 만든 옷을 가지고 나와 “고바우 양품점” 옆 “성남극장(현, 진양 아케이트)” 앞에는 장날마다 염색하는 곳이 있어서 흰색 천 또는 흰옷에 검은 색 염색 물을 들여 주었었다.
하얀색 일색에 검은색깔의 옷으로 염색하여 입는다,,,,,,,
그러한 원인이 빨래보다는 나름 패셔니 스타들이었다고 우기고 싶다,,,,,
장날 읍내 길거리에는 소리사 가게 앞의 커다란 금속 스피커에서는 라디오 음악이 흘러나오고
당시에는 전국 공통적인 현상이었겠지만 주택가와 길거리에는 커다란 넝마를 지고 철재 집게를 탁탁 두드리며 공포감을 유발하였던 넝마주이와 배고픈 거지들이 무리지어 구걸하며 활보하였고,,,,,,
가끔 부시시한 긴머리 한쪽 옆으로 곱게 꽃을 꼽은 “웰컴투 동막골”의 배우 강혜정씨가 열연하였던 모습의 여자 분 들을 어렵지 않게 보았을 광경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이미 오래전 아주 어린시절의 서산 읍내 장날과 관련된 기억들이다.
그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옛날가요의 노래가사는 그 시대를 살고 계시던 어른들에게는 너무나도 공감되는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 하는 것 같았을 것 이다.
아주 우연히,,, 옛날 추억의 "성냥" 을 최근에 보았다.
친근한 조일성냥 1986년 제조,,, 아마도 이 형태의 제품이 마지막 형태의 성냥이 아닐런지...
생각이 나는지요,,,,, "땡꼴"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 왼손의 출처 cruiser 꺼
3. 세번째 기억 - 배달사고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신다.
십원짜리 종이 돈과 주전자를 손에 쥐어주고 가서 막걸리를 사오라 하신다.
주전자를 들고 검정 고무신을 터벅 터벅 흙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와 우체국 사거리에 있는 “서산 양조장”에 도착한다.
그 당시 술의 종류가 한정되어있다 보니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서산양조장은 무척 혼잡하고 바쁜 장소였다.
누룩 냄새가 진동하는 단층 구조 목재 건축물의 양조장 내부로 들어가면 마치 욕탕처럼 생긴 그곳에 막걸리가 담겨져 있었다.
마침, 긴 대나무 막대기로 막걸리 탕 안을 휘젓고 있던 아저씨에게 돈은 쥐고 있는 오른 손을 펴 보이면 아저씨는 주전자를 받아 나무 됫박으로 두어 세대 담아준다.
“아~~~ 씨,,, 무겁다”.
두 팔을 한데 모아 주전자를 꼭 잡고 집으로 되돌아 간다.
주전자를 앞으로 하여 양팔을 길게 늘어트리며 걷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뛰뚱 뛰뚱 어린아이 걸음을 걸을 때 마다
주전자에서 질질 흘러내린 막걸리의 궤적이 비포장 자갈길에 긴 줄무늬 행적 남기며 집까지 따라 올 기세다.
사거리 언덕 중간에 솜틀집이 있다.
낑낑거리며 그곳까지 가 본다.
이러다가 내가 팔 빠질 것 같다.
날씨는 덥고 목도 마르고 길 옆 솜틀집 담장 턱에 기대어 앉아 어른들이 지나가지 않는지 주변을 살핀 후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막걸리 몇 모금을 마셔본다.
“맛있다 !” “그래 이 맛이야”
몇 번을 마셨는지,,,,어질,,,어질,,,,,, 어지럽다.
무더운 여름날 집에까지 막걸리 주전자 배달을 완수하고 그늘이 드리워진 툇 마루 한쪽 구석에서 내가 잠이 들었다.
그 당시 잠꼬대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이 김 마담 ~ ! 술 더 가져와~ ”
“이런 줸~~장알” ㅠ,ㅠ
4. 네번째 기억 - 광주리 아주머니들
* 주 : 어린시절 버스 터미널로 심부름을 자주 다녔었다. 그때의 기억들이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버스는 직행버스, 급행버스, 완행버스로 구분되어 있었고 버스터미널과 관련된 기억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 번째 버스터미널의 위치는 지금의 1호 광장 “광생약국” 앞 “던킨 도너츠”(현, 올레 이동통신 대리점) 위치에 있었고,
두번째로 위치가 다시 변경되어 지금의 “서산축협 하나로마트” 자리였다.
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현재의 버스터미널이 계속 이용 되고 있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는 현재 1호 광장 근처에서 살았던 친구들만이 아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그 첫 번째 버스터미널이 언제 지어졌었는지 모르겠으나 6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고 붉게 녹이 슨 양철 재질의 지붕과 벽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천정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장소로서 당시 버스 네대를 겨우 주차할 수 있는 크기로 기억한다.
그 당시 거의 모든 버스는 남자조수가 버스 맨앞 밖에서 ㄱ 자 쇠막대기를 꽂아 힘차게 돌려야만 버스엔진의 시동이 되었던 기억이다.
그러하였던 첫 번째 버스 터미널이 철거되고, 두 번째 버스 터미널은 지금의 “서산축협 하나로 마트”로 위치가 변경되었던 것이 60년대 중 후반이었다.
첫 번째도 그러하였지만 두 번째로 위치 변경된 버스터미널에 버스가 들어와 정차 하기 무섭게 앞 뒤 출입구를 통하여 개나리 봇 짐과 광주리를 머리에 인 승객들이 미처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버스에 오르려는 사람들로 버스의 출입구는 북새통이다.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한 혼돈의 복잡함이 잠시 후 모두 사라지고,,,
이때쯤이면 짠~ ! 하고 버스 안으로 모나리자의 미소를 머금으며 허리에 전대를 차고 등장하시는 “광주리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머리에 이고 있던 싸리나무 광주리 안에는 “쎌레민트 껌”, “구론산”, “크라운 산도”, “드롭푸스 사탕”, “삶은 계란”, “별이 7개 사이다”, “쓰래미(오징어)”, “땅콩”, “삶은 밤”, “영양갱” “명랑” 등,,, 틀린 기억일 수도 있으나, 대충 그런 품목들로 담겨져 있던 기억이다.
* “명랑” : 약이 귀하던 그 시절 진통제와 소화제 기능은 기본이고 만병통치라 믿고 사용하던 중독성 강한 하얀색 가루약.
그 야말로 고객을 직접 방문 판매하는 움직이는 지금의 이동식 1:1 편의점의 원조이었던 것이다.
이 “광주리 아주머니”들은 매우 독특한 판매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이고 있던 광주리의 각종 상품들을 고객에게 우선 립 써비스하며 광주리를 즉시 허리 높이로 낮추어 고객에게 보여주는 눈높이 써비스로 전환하여 버스 승객들의 주머니를 홀린다.
버스 통로 맨 앞에서부터 오징어 냄새 솔솔 풍기며 버스 뒤쪽으로 슬로우 슬로우 킥킥,,, 발걸음도 가벼운 고무신 스탭을 밟으며 하는 상품 설명 및 후진 빽 스탭에 버스 안 승객들의 충동구매가 이어진다.
이러한 광주리 아주머니들의 생존영업은 버스 막차가 끊어지면서 하루가 종료 되었고
막차 마져 모두 떠나 한산해진 야간 버스터미널 대합실의 긴 나무 벤치 의자 주변으로 시커먼 옷을 입은 꽃 거지들과
비록 머리카락에 꽃은 꼽았으나 영혼이 무척 맑은 사람들이 함께 무리지어 웅크려 앉아 밤잠을 청하던 우울하고 칙칙한 모습들이 기억난다.
오늘날 사회 복지가 잘되어 볼 수 없는 광경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5. 다섯번째 기억 - 간쓰매 뚜껑따기
지금도 어디선가 “간쓰매" 라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초등학교 어린시절 “복숭아 통조림”이나 “포도 통조림”, “파인애플 통조림"을 통틀어 모두 “간쓰매”라고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었다.
아버지께서 당시 그 귀한 “복숭아 간쓰매" 하나를 집에 가지고 오시는 날이면 온가족 식구들의 모든 시선은 “간쓰매”로 집중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철재 깡통으로 밀봉된 통조림 뚜껑을 개봉하는 일이다.
지금에야 원터치 방식의 캔 제품이 대부분이고 통조림 캔 오프너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미제 손톱깎이에 달려있던 갈고리 모양의 쇠 붙이가 손톱, 발톱 사이를 청소하는 보조 도구인줄로만 알았었다.
“간쓰매"를 중심으로 행복감에 젖어 둥글게 모여 앉아있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뜬금없이 손톱깎이를 찿으신다.
손톱, 발톱 소재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용도가 바로 캔 오프너이었던 것이다.
이런,,,,,,멘붕 ~ !
캔 오프너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어야 알지요, 자고로 예나 지금이나 비디오 교육이 참 중요하다.
그제서야 손톱깎이에 붙어있던 그 쇠붙이의 정확한 용도를 알게 되었으니,,,,
그러나, 머피의 법칙은 항상 적용되어 정작 그것의 용도를 알고 제대로 사용하여보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좀처럼 손톱깎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어린시절 나의 맥가이버 아버지께서 부엌 칼과 다듬이 방망이를 가지고 오셔서 “간쓰매”를 양발 사이에 넣어 고정시켜 부엌 칼의 뽀족한 부분을 통조림 가장자리에 꼽은 후 방망이로 칼등을 살살치니 통조림 원형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그란 모양을 그리며 철재 캔 뚜껑이 잘려 나간다.
드디어 개봉,,,,,
“간쓰매” 속에 들어있던 뽀얀 아이보리색깔의 복숭아를 보기만 하여도 환상 그 자체였다.
난생 처음 맛보던 달착지근한 국물과 삶은 듯 부드러운 맛의 복숭아 통조림 중독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매력적인 유혹은 잊혀 지지가 않는 기억들 중의 하나이다.
6. 여섯번째 기억 - 흑백 텔레비전 & 드라마 여로
[ 텔레비전 들여오던 날 ]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던 기억은 동부시장 식육점으로 심부름을 가서이다.
때마침 그 가게 내부에 설치된 흑백 TV 뉴스방송에서 아폴로 11호 달 착륙(1969년 7월)이 방송되었던 것이 TV 시청과 관련된 나의 최초기억이다.
그 후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1972년 4월초 어느 날 우리집 철재 대문이 활짝 열리고 리어커에 실려 있는 커다란 박스 하나가 안방에 내려진다.
모양도 생소한 포타블 타입의 “일제샤프 흑백 텔레비전”이 우리 집으로 들여오는 날이다.
당시 흑백 텔레비전의 가격이 워낙 비싸서 그것을 훔치려는 도둑들도 많았었기에 텔레비전은 안방 옷장 안에다 신주단지 모시 듯 고이 모셔지게 되었다.
그 즈음에 월남 파병 장병들의 귀국과 함께 여닫이 문과 다리가 길게 달린 “동남샤프 흑백텔레비전”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많이 보급되고는 있었지만,,,,, 절대 부족의 시대였다.
[ 동네 씨네마 안방극장 ]
기술자 아저씨가 굴뚝에 TV안테나를 서울 남산 방향으로 설치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 안테나 선을 연결 후 TV전원을 켰다.
처음엔 소리만 들리고 잠시 후 브라운관에 화면이 나타난다.
이런 “써프라이즈 ~ !” 이래서 무조건 오래 살고 볼일이다....
그 당시 텔레비전은 진공관 타입이기 때문에 전원을 켜고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이제 극장을 가지 않아도 편안하게 안방에서 문화혜택을 받을 수 가 있구나.....
처음 TV가 집으로 들어오던 날 동네에 소문이 퍼져 안방과 마루에 그것을 보기 위한 동네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온 가족이 신기하고 들뜬 기분으로 턱, 턱 묵직한 소리를 내는 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본다.
때마침 KBS에서 드라마 “여로”의 4회 방송이 시작되었고 최고 시청률 기록의 드라마 “여로”와는 그런행운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부터 “영구”와 “달중이”로 유명해진 드라마 “여로”가 70%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종료되는 가을까지 우리집 텔레비젼은 한동안 동네 TV가 되었었다.
함께 모여 TV를 보는 것 자체는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방송 시작 전 화면조정 시간부터 안방과 마루를 점거 당하다 보니 우리 가족의 저녁식사는 사람들에 둘러 싸인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이 되돌아 간 자리에는 흙과 모래 등으로 매일 밤마다 청소를 두 세번씩 더 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KBS 드라마 “여로”와 MBC 코메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이겠으나, 그런 기억들은 우리 모두가 대부분 공유하는 기억들이고 나는 토요일, 일요일 늦은 밤에 방송되었던 “주말의 명화”를 잊을 수 가 없다.
그 당시 밤 잠을 설쳐가며 보았던 여러 흑백 영화중에서 "오드리 햅번", "그레고리 팩“ 주연의 “로마의 휴일”, 안소니 퀸 주연의 “길”, 비비안 리의 “애수”, 진 캘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등 내게 주옥 같은 흑백 주말 명화가 나의 머릿속에 각인 되었었다.
지금도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과거 추억의 명화가 재방송되면 나도 모르게 채널이 고정된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지금은 지난시절 추억의 명화를 인터넷으로 내려 받아 볼 수도 있고 이미 칼라시대를 뛰어넘어 DIGITAL TV 3D 입체영상을 지나 4D를 이야기 하고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불과 한 두세대전의 사람들은 구한말 시대의 삶과 크게 다를 바 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연탄의 사용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궁이 사용으로 부엌 천장은 검은색 그으름이 가득하였고
성냥 조차도 귀하던 시절 아궁이의 불씨 조차도 꺼트리면 안 되었나 보다.
물도 우물에서 길어다가 먹었으며,,,,, 개울에서 여자들이 옹기 종기 모여 수다 빨래를 하였기에 그들만의 공식적인 미팅 장소였다.
전기 보급률이 매우 저조하여 해가지기 전에 부엌 설거지 까지 모든 것을 하여야만 하였고,,,,
새벽 먼동이 틀 때면 닭 울음 소리와 함께 하루 아침을 시작하는,,,, 그런 생활들을 하셨다.
그 당시 라디오는 자신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건전지를 등에 이고 포대기 고무줄로 꽁꽁 묶인채 잡음을 지글 거리며 흘러나오던 라디오 방송을 듣기만 하여도 그 라디오 속에 난쟁이 나라 사람들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던,,,,
우리 초등학교 시절 오후 5시쯤이였던가 ~ ?
라디오에서 당시 어린이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 청취되었고,,, TV는 생각지도 못하던 그런 시대를 살았던 지금,,,
이미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으니 우리 세대는 행운아 인가 보다.
7. 추억의 시간 여행을 마치며,,,,
흔들리는 유아치 하나를 빼려고 모든 가족이 합심하여 해결한 후 나지막한 지붕위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 라는 주문을 하며 빠진 치아를 지붕 위로 던지던 아름다운 시절
밤새 잠자리를 뒤척이며 어렵사리 작품성이 뛰어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는 날 아침이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신 어머니의 강압에 의하여 머리에 “키”를 뒤집어 쓰고 앞집 대문 앞을 서성거리야만 하였던 그 오줌싸개의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이였던 그 시절.
이제 까마득한 옛날 기억들 중 한 부분으로만 남겨져 있다.
그 같은 공간과 시간들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 중에서 안타깝지만 이미 소천(召天)한 친구들도 있고
세상에 남겨진 우리 친구들끼리 오늘 이렇게 과거의 기억들을 공감하고 있다.
전작 “기억의 공감” 보다는 리얼리티가 덜하였겠지만,
과거 어린시절의 아련하고 아쉬운 추억의 이야기들은 이쯤에서 마감 하고자 한다.
다른 친구들에 의한 “기억의 공감”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이제 중년과 초보 노년이 된 친구들이 먼 훗날 경로당에 모여 치매와 제정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지금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하여 본다.
침침한 노안의 눈으로 두서없이 쓴 글을 끝까지 함께 공감하여 준 친구들께 감사 합니다.
우리 친구들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며,,,
몇 십년이 지난 후 다시 우리들의 입으로 회자될 우리들만의 “기억의 공감”을 지금부터 다시 만들어 보자...
2012.12.14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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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 쒸~~~ 우리의 재능돌이 명실이의 2탄 기억의 공감. 오늘도 내 가슴은 아련히 .... 고마워 자네가 옆에 있어 나ㅡㄴ 행복하다네
나두 행복하다 추억으로
잠시 침침한 눈으로 추억을 ~~어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