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사(舍那寺)와 옥천면의 불교 유적
안녕하세요? 물 맑은 고장, 친환경농업의 메카인 이곳 양평에서 여러분을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양평군 문화관광해설사 이순덕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오신 이곳 사나사는(舍那寺)는 용문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샘물이 옥구슬 같이 영롱하고 맑아 옥천이라 일컫는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의 맑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에 속해 있습니다.
사나사는 대경대사 여엄(麗嚴)(862-930)이 고려 태조 6년(923)에 그의 제자 융천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하나 사료는 분명치 않으며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하고 10년 뒤 다시 사나사도 창건하였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여엄은 고려 태조가 극진히 섬긴 형미, 이엄, 경유와 함께 해동사무외인(海東四無外人)의 한 분으로 태조의 국정자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상과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사나사의 ‘사나’는 삼신불 중의 한 분인 노사나 부처님의 약칭으로 사나사에 노사나 부처님을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건국당시 흐트러진 사회분위기를 불법으로 제도하고 국가 안위를 기원한 화엄사상의 호국기원 사찰로 사나사를 창건하면서 수행을 통해 부처님이 되신 연회장 세계의 교주로 자비와 지혜를 구족하신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佛을 모셨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극정성으로 발원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극고한 연화장 세계의 중심도량이 사나사인 것입니다. 창건 당시 웅장했던 대가람은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과 화재로 인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현존하는 당우는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 미타전, 산신각, 함씨각, 일주문, 요사채 등 입니다.
※ 사나사의 유래
사나사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여엄이 고려 태조와 함께 이상적인 불국토 연화장 세계를 건설하려는 뜻으로 노사나보신불상(盧舍那報身佛像)을 봉안하고 사나사라 이름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화주승(化主僧)이라 하는 범사(梵師)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려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천장노사나불(天藏盧舍那佛)이 출현하여 즉시 그 불상을 제작하여 절에 모셔 사명(寺名)을 ‘사나사’라 하였다는 설입니다.
※ 사나사 출토 유물 중 소실된 유물
사나사(舍那寺)의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이 철불(鐵佛)은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철불을 마지막으로 보고 사진으로 촬영하여 보관한 것은 정영호(鄭永鎬)라는 분인데, 그는 1970년 7월에 사나사에 다시 왔을 때 이미 없어진 뒤였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대정 5년(1915)에 간행된 「朝鮮古路調査報告」에도 철불의 우수성을 말하고 특별한 관리를 요망한 바 있었을 정도로 귀중한 보물이었습니다.
「朝鮮古路調査報告」에는 “조선의 철봉중 우수한 것으로 시대로는 신라 혹은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화재 때문에 오른 손의 팔꿈치, 양손의 손가락과 왼 무릎 두정(頭頂)이 결실되었고 二條의 열상(裂傷)이 있다. 지금 이 절의 구석인 다음에 기록할 石貸의 부근에 극히 조잡하게 지어진 오두막에 방치되어 비바람을 피하는 데도 급급하다. 이러한 우수한 불상은 관부(官府)에서 특별히 수리 보호 되기를 바란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철불은 현존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몇 개 없다고 합니다. 이 철불이 남아 있었더라면 양평군의 귀중한 문화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나사 유물, 유적
원증국사석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이 석종은 고려 후기의 승려인 태고보우(1301∼1382)의 사리를 모시고 있습니다. 보우의 호는 태고이며, 시호는 ‘원증’이고, 탑의 이름은 ‘보월승공’이라고 합니다. 보우 스님의 사리를 봉치한 곳은 모두 네 곳이 있는데,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태고암이 그것입니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돌종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습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에 고려 우왕 9년(1383)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증국사석종비(圓證國師石鐘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이 비는 태고보우(1301∼1382)의 비입니다. 비는 고려말·조선초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받침돌 윗면에 비를 꽂아둘 네모난 홈을 파서 비몸을 세우고, 그 양 옆에 기둥을 대어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비문은 파손되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려 우왕 12년(1386) 보우의 제자 달심이 세운 비로,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의문이 글씨를 썼습니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도움을 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1호)
사나사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으로,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 머리장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닥돌 위에는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로 보이는 부재가 놓여 있고, 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습니다.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을 다른 층에 비해 월등히 높게 만들어 놓아 독특한 모습입니다. 지붕돌은 윗면에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위로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당산계불량비(堂山契佛糧碑)
경내에 세워져 있는 <유명조선국경기좌도양근군당산계불양비>를 통하여 영조51(1773)년에는 양평군 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堂山契)를 조직하고 향답(鄕畓)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佛糧畓)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량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로 사나사가 군민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시대 후기에 탄탄한 경제적 기반 위에 번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총 높이 2.1m, 빗몸높이 1.5m, 폭 65㎝, 두께 20㎝, 빗몸은 운모질이 다량 섞인 질 나뿐 돌이어서 많은 부분이 크게 파손되어 전문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18세기경 이 지방의 사람들이 계를 조직하여 사찰의 경영에 협조했을 만큼 불사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생각됩니다.
함씨각
원증국사석종비의 왼쪽에는 양근(楊根) 함씨(咸氏)각이 산신각과 함께 나란히 있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함씨 시조의 영정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사나사에 함씨각이 들어서게 된 것은 부근의 함왕혈이나 함왕성 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함왕혈(咸王穴)은 용천을 따라 사나사 절골로 들어서다 보면 길 오른쪽 계곡에 있습니다. 함왕혈에는 함씨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하는 고려태조 공신 광평시랑(廣評侍郞) 함규(咸規)의 탄생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함규 장군은 신라의 호족세력으로 고려태조 왕건이 신라와 후백제 지방호족세력을 통합하며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개국공신으로 활약한 인물인데 고려 12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함유일(咸有一)의 5대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양근지역에는 함씨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며 현재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1973년 세운 것으로 알려진 함씨각은 불심이 강했던 함씨 후손 함명기의 부인 신씨가 사나사 재건에 공헌했다는 비문을 통해 간략한 소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사나사가 함씨가문과 1천년의 동거를 해오고 있음을 반증하는 재미있는 사사(寺史)라 할 수 있습니다.
함왕성지(咸王城址)(경기도 기념물 제123호)
옥천면 용천리 산27 소재하고 있습니다. 함왕성터는 신라말 고려초 유적이라 전해지는데 사나사에서 용문산으로 약 2㎞정도 올라가다 보면 작은 돌로 성을 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돌 크기는 비록 작지만, 쌓아 놓은 성터의 규모는 굉장히 큽니다. 아직까지 복구를 하지 않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상태이지만, 원형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줄기 남서쪽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함공성’또는‘함왕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자연석으로 쌓은 성곽의 길이는 29,058척(약 8,805m)이라고 전해지나, 현재는 700m 정도 남아있으며 성벽은 높이 1.6m 안팎이고 북·서쪽의 성곽이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 북동쪽에는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있으며 그 주변에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함씨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하는 고려태조 공신 광평시랑(廣評侍郞) 함규(咸規)의 탄생설화가 전해져 오는 함왕혈이 사나사 입구에 있습니다.
함왕혈(咸王穴)
옥천면 용천2리 사나사 입구계곡에 큰 바위굴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始祖)인 성주 함왕(咸王)이 이 혈(穴)에서 탄생(誕生)했다고 합니다. 씨족사회가 번창하던 먼 옛날 함왕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여망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나갈 적격한 지도자가 없어서 항시 문제가 돌출하였고 또한 해결할 수 없어 고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정해 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함왕혈(咸王穴)에서 튼튼하고 총명한 눈동자를 가진 옥동자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를 하늘이 점지하여 준 자기의 지도자라 생각하고 왕(王)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함씨들은 자기들의 여망하는 국가를 형성하였고 자기들의 성지(城地)을 축조(築造)하기 시작하면서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번창 일로를 걷던 양근 함씨 씨족들은 얼마가지 못하여 다른 씨족들의 침입으로 오랜 세월동안 이룩한 성지가 무너지고 위대한 왕도 죽어 함씨들의 국가는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그 옆을 지나던 과객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저렇게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니 국가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양근 함씨들은 선조인 왕이 태어난 바위를 밖에 두고 성(城)을 쌓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 그들은 성지를 양근 함씨 선조의 어머니인 바위를 중심으로 성을 쌓아 번창하려 하였으나 함왕은 죽고 또 다른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국가는 융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양근 함씨들이 모두 흩어져 살아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 있는 것이라 하는군요. 그 후 현재에 이르도록 양근함씨 후손들이 그 바위에 보호책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선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옥천리 삼층석탑(양평군 향토유적 제33호)
높이는 243cm입니다. '전탑산리 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 옥천읍 파출소 뒤편에 정자와 함께 공원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석불좌상, 석상, 허씨며느리비 등이 모여 있습니다. 탑은 상륜부가 없어졌고 지대석과 2, 3층 탑신석은 새로 만들어 넣어 복원하였습니다. 탑신부는 3층으로, 1층 탑신석의 형태는 좌우 모서리에는 귓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탱주가 있습니다. 지붕돌은 아래쪽에 3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위쪽에는 1단의 낮은 받침이 있습니다. 하대 면석은 귓기둥이나 옆받침돌이 없이 각 면에 안상을 3개씩 음각하였는데, 안상의 중앙에는 화엽문이 있습니다. 하대 갑석은 위쪽에 면석을 받치기 위한 2단의 받침이 있다. 상대 면석은 각 면마다 좌우에 귓기둥이, 중앙에는 옆받침돌이 있습니다. 상대 갑석은 아래쪽에 1단의 덧서까래가 있으며 위쪽에는 3단의 받침을 두어 탑신석을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대 면석에 새겨진 안상의 양식과 세부 양식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옥천리 幢竿支柱(옥천리 479-4)
현재 옥천리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사찰의 문 앞에 꽂는 기치의 하나인 당간을 세우기 위해 좌우에 지탱하도록 세운 석조지주인데, 본래는 2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하나 뿐입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일인 경찰서장이 지주 1기를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하나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주 1기는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멸실되어 최근에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해 놓았습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이 고장 옥천리와 용천리 일대에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대원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나사와 옥천리 일대의 불교 유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