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을 벗어 버리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롬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 사람(팔라이오스 #3820)의 원어적 의미는 ‘본래의, 고대의, 오랜 전의’ 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 먹은 본래적인 모든 사람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의, 자기자랑, 자기사랑, 자기주장으로 형성된 자아를 말한다. 이것이 마귀적인 것이다. 그가 비록 윤리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고, 바르게 살며 이웃에게 선을 베푼다 할지라도 죄인이요 악인이다. 그 동기가 자기사랑에서 유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욥의 체험에서 이를 명확히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님만이 의요, 신령세계에 효력이 있는 것이 의다. 이것을 덧입히는 것을 생명과를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 생명과는 에나멜이라는 특수 코팅이 되어 있어서 옛 사람이 먹어서는 전혀 효험이 없다. 생명과는 새사람에게만 소화 흡수되게 설계되어 있다. 이것을 모르고 옛사람이 지식적으로 매료되어 진리를 접해서 배운다 해도, 전혀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이 증가될수록 교만이 더해질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공의다.
<고전11:29> 주의 몸(주의 떡과 잔/ 생명의 가르침)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기에 하나님은 영생의 생명과를 우리에게 먹이시기 위해 나의 옛사람을 처리하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십자가라고 한다. 십자가의 내용은 자기중심적 속성. 즉 자아를 죽이는 일이다. 이 공사는 너무도 어려운 고난도의 일이요, 우주적인 대공사다.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대상자인 사람의 순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가롯유다가 산 증거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에도 단계가 있다. 인생의 채찍으로 비유되는 물질의 고난, 건강의 고난, 명예의 실추 등과 같은 많은 경우가 있지만, 가장 최종적인 마침표는 사람 막대기에 의해 단련되는 일이다. 가장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사실 가장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이다. 이것을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받는 고난’이라고 표현했다.
<벧전2:18~21>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애매히(아디코스 #95)란 말 그대로 ‘부당하게 받는 능욕’이다. 정작 아무 잘못이 없는데 핍박하고, 무시하고, 자존심을 뭉개며, 정죄한다고 생각해보라. 인격의 세계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다 묵살되어 자신의 의가 악이 되고, 상대의 악이 선이 될 때의 총체적인 충격은 아무도 감당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존재가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건이 본래적인 나를 처리하기 위해서 조성하신 하나님의 손길이란다. 따라서 철갑을 두른 듯한 완고한 상대의 어거지에 대해 분기탱천 하지 말라는 말이다. 너무도 억울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잘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것을 참고 다스리라고 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라고 한다. 이성적, 합리적인 네 옛사람의 생각으로야 네가 맞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네가 틀리다는 것이다. 천연적이고 마귀적인 네 의가 죽어야 새 생명이 탄생이 된다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관용과 사랑을 베풀라고 한다.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일이다. 원수는 나의 옛 자아이다. 거기에 사단이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함과 좋아함은 서로 근원이 다르다. 사랑은 의지에서 발원하는 것이고, 좋아함은 감정에서 저절로 분출하는 것이다. 감정은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속성이라 자연 발생적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감정은 어린아이의 것이지만, 사랑은 장성한 자의 것이다. 옆의 까다로운(원수)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의지를 소유해야한다. 사랑은 타를 위해 나를 한계를 넓히는 대수술이기 때문이다.
애매한 고난이 닥쳐와 피가 거꾸로 솟는 때에는 하나님은 안 보인다. 자존심이 뭉개질 때는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 당장 나의 의가 증명만 된다면 지옥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온 땅(마음)에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임한다’고 한다. 주님이 운명하실 때에 그러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사투를 벌일 때도 그러했다. 하나님이 역어 놓으신 사건과 환경에서 십자가는 홀로 져야 한다. 아무도 거들거나 대신 져주지 않는다. 그리고 첫 아담의 세계는 끝난다.
부연컨대, 십자가는 내가 홀로 지는 것이지 하나님이 거들어 주시지 않는다. 이렇게 나의 옛 사람이 끝나는 순간을 하나님도 차마 못 보시고 외면하신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일성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이다. 한 존재가 죽어 없어지는 순간이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떠나는 순간이다. 이 엄청난 순간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한다. 처음 세상이 종결되고 새 세상이 시작된다.
십자가는 이렇게 휘장이 찌어져야 완성된다. 새 존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탄생된 새 사람이다. 이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 탄생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이 기쁨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셨다. 내가 죽고 다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 분은 성안에서 안주 하실 것이다. 이 날이 안식의 날이요, 영생의 날이다.
새 사람을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처럼 다스린다’이다. 첫 사람의 상징인 환도뼈가 절단나서 절뚝거리는 이스라엘의 속사람은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의 앞에서 다가오는 ‘에서’가 더 이상 미움과 반목의 대상이 아니다. 주의 사랑이 넘치게 흘러나와 그를 포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그는 에서를 향해 엎드린다. 그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싸움이 끝난 자는 사랑과 평화의 뭉텅이가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같이 자신의 본성을 세세토록 다스리는 왕이다. 세세토록~(주님과 함께)
첫댓글 아멘...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19:26
아멘~^^ 옛사람자체는 관용도 사랑도 자기본위적인 것 뿐이다.
네 의는 네 인생에만 유익할 뿐 하나님 나와는 상관이없다 하신다
과연 그본질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만들기위해서는 그분의 생명이 필요할뿐이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때...
진리 지식을 모를때에 힘써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대적 할때가 생각나네요 시끄럽고 다툼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섬기고 있다고 착각 했지요 그때 주님은 환경을 통해서 불칼로 저를 난도질 하시더라구요. 그제서야 주님앞에서 참으로 죄인것을 고백 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저에 의가 더럽고 주님이 흠향 하실수가 없어겠지요
아멘~~~
그렇습니다~~~
겉 사람을 처리하는 십자가를 통과 하고
그리스도로 채워진 속사람(새사람)안에서
표현되는 생명이 참이며 빛이며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는 신의 성품이요 인격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