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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B. 피터슨 지음/ 김진주 옮김, 『의미의 지도』,앵글북스, 2021.
Maps of Meaning
○ 조던 B. 피터슨(Jordan B. Peterson):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
-책 내표지에 있는 글
“사물의 범주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형이 변하면 잘 다녀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해서는 목표 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 변화에 발맞춰 습관과 신념을 바꾸지 못하면 스스로를 기만하고 세계를 부정하며 곧 으스러질 소망으로 현실을 대체하게 된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결과, 자기 삶의 토대를 무너뜨려 불안한 미래를 맞으며 안식처가 되어 주던 과거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타고난 한계를 의식하고 그 결과를 이해할 때 개인의 주관적 경험의 본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주관적 경험 세계에 적응하려는 시도가 강화된다. 바로 이것이 버림받은 자, 병자, 맹인, 절름발이와 같이 구제받지 못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주관적 경험, 즉 우리를 착각으로 몰아넣는 집단의 제약을 벗어난 개인적 현실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면 기존에 따르던 도덕률은 완전히 붕괴한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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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게 됐는데, 이 책은 사회주의 이념뿐 아니라 이념 자체에 대한 내 믿음을 뒤흔들었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인 브리티시 레프트 북클럽의 청탁으로 쓰였지만 출판사를 낭패에 빠뜨린 이 책의 말미에는 유명한 산문이 실려 있다. 그 글에서 오웰은 사회주의의 치명적인 결점을 설명하며, 사회주의가(최소한 영국에서는) 민주적인 세력을 끌어들이고 그 세력을 유지하는 데 어째서 실패했는지를 밝혔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근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저 부유한 사람들을 증오할 뿐이었다. 오웰의 지적은 정곡을 찔렀다. 사회주의의 이념은 실패에서 비롯된 분노와 증오를 감추는 가면이었다. 내가 만난 수많은 당원들은 사회정의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개인의 복수 추구를 합리화하고 있었다.(14쪽)
이념의 틀로 보면, 사람은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념의 신봉자들은 불쾌하고 용납되기 어려운 자신의 환상과 소망을 이념으로 가린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사회주의 이념은 물론, 이념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15쪽)
내가 믿었던 생각은 모두 내 눈에는 선하고 용맹하며 흠모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져온 생각이었다. 대부분은 책에서 얻은 것이었다. 나는 어떤 생각을 관념적으로 ‘이해’했다면 그 생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생각인 것처럼, ‘나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내 머릿속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내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주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은 아니며, 어떤 생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그 권리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무렵 읽은 칼 융의 책은 이런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융은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페르소나는 ‘인격을 가장하는’ 가면이며, 사람들은 이 페르소나가 진실하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페르소나를 분석해서 가면을 벗겨 보면 개인적 요소라고 생각되던 것이 실제로는 집단적 요소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페르소나는 집단 정신의 가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페르소나는 허구이다. 각자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개인과 사회가 타협한 결과이다. 우리는 이름을 택하고, 직함을 얻고, 역할을 수행하며, 어떠한 사람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진짜 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부차적인 현실이자 타협안일 뿐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과정에는 그 자신보다 타인이 더 많이 관여한다. 별칭하자면, 페르소나는 겉모습이고 2차원적인 현실이다.
나는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그건 허상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란 괴로웠다.(22쪽)
세계는 행동의 장 혹은 사물의 공간으로 해설할 수 있다. 과학은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신화나 문학, 연극과 같은 이야기는 세계를 행동이 벌어지는 무대로 그린다. 이 두 가지 세계관은 우리가 각각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탓에 지금껏 불필요하게 갈등을 일으켜 왔다. 과학은 객관적인 세계를 설명하고, 모두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이야기는 가치의 세계를 설명하고, 정서와 행동의 관점에서 현 상태를 평가하고,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29쪽)
행동의 장으로서 세계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영역은 ‘미탐험 영토’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이며 위대한 어머니 신, 창조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자연, 모든 유한한 존재의 근원이자 마지막 안식처이다. 두 번째 영역은 ‘탐험된 영토’이다. 이것은 알려진 세계이며 위대한 아버지 신,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문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이다. 세 번째 영역은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흔히 신의 아들, 개인의 원형, 창조적 탐험가(영웅)와 복수심에 불타는 적대자로 비유된다. 인류는 객관적인 세계에 적응한 만큼 이러한 신들의 세계에 적응해 왔다. 인류가 이 두 세계에 적응해 왔다는 사실은, 세계가 실제로 사물의 공간일 뿐 아니라 행동의 장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아무런 보호 없이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면 의례를 통해 위대한 아버지 신을 모방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집단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뜻이며, 이때 사물의 의미가 정해지고 사회적 상호작용이 예측 가능해진다. 하지만 집단과의 동일시를 절대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며 미지의 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 창조적 탐험은 억제되고 집단은 정체된다. 이렇게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 집단에서는 집단적 공격성이 발현될 가능성이 커진다.
미지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은 영웅의 영원한 숙적인 ‘사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 곧 세상의 전부이므로 그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탄처럼 교만하다. 이는 전체주의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안다는 식으로 전지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이나 혹은 ‘이성’이 신의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하는 꼴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몰아간다. 인생에 납득할 만한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가 삶에 적응하도록 돕는 가치 체계는 창조적 탐험을 통해서만 수립되고 유지되는데, 이는 우리가 겸손하게 미지의 세계를 인정할 때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탄과의 동일시’는 집단 정체성에 내재된 위험들을 증폭시켜 우리를 병적인 어리석음으로 몰아간다. 미지의 영역을 거부하는 치명적이고 끈질긴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의 관심사, 즉 인생의 주관적 의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개인의 관심사는 ‘탐험된 영토’와 같아서 ‘미탐험 영토’의 경계에서 드러나며, 개인과 사회가 환경의 변화에 계속 적응해 나가는 탐험 과정을 행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개인의 관심사에 충실한 사람은 순응을 요구하는 집단의 압력에 맞서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말씀이며 창조주라고 끝까지 주장했던 ‘구세주’, 즉 영웅의 원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은 영웅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나아가 집단에 속하면서도 집단을 초월할 수 있다.(29~31쪽)
제1장 경험의 지도
실증주의가 태동하기 이전, ‘자연스러운’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대상의 객관적 특성이 아니라 대상의 의미, 즉 대상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주로 관심으 보였다. 신화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현대의 과학적 사고로 개념화한 대상의 형식은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모두 빠져 나가고 남은 무의미한 껍데기일 뿐이다. 실증주의 이전 시대에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즉 정서나 감정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의 감각적 특성에 깃든 ‘의미’를 중심으로 인식했다. 사실 실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의 구체적인 감각적 특성과 더불어 그 대상이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안다는 의미이다. 이를 동기적 관련성motivationa relevance이라고 한다.(37~38쪽)
데카르트와 베이컨, 뉴턴이 등장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의미가 풍부하고 도덕적 목적의식에 고취된, 영적으로 활기찬 세계에 살았다. 도덕적 목적의식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우주의 구조와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려 주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따르면서 한때 이 세게에 존재했던 영적 존재들은 사라져 버렸다. 실험이 등장하면서 신화적 세계는 사정없이 파괴되었다.(42쪽)
제2장 의미의 지도
미지와 기지, 인식자는 하나같이 매우 양가적인 특성을 지닌다. 자연의 영역을 다스리는 위대한 어머니는 창조적인 측면과 파괴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와 파괴가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낡은 것이 파괴되면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 수수께끼인 만물의 근원은 곤 만물이 되돌아갈 목적지이다. 문화의 영역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 역시 질서인 동시에 압제를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신체와 소유물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그 대가로 절대적 자유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주체인 인간, 즉 인식자도 양가적 존재이다. 인식자는 땅 위의 작은 신이자 죽을 수밖에 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이며, 용맹한 동시에 비겁하고, 영웅인 동시에 기만하는 자이며, 위대한 동시에 위험한 잠재력을 지녔고, 선과 악을 안다. 미지는 그 정의상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기지는 너무 복잡해서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도 인식자(의식을 지닌 인간)도 자기 자신의 이해 능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처럼 근원적으로 불가해한 ‘존재’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이루며, 우리는 그곳에서 행동하고 적응해야 한다. 이런 세계에 맞춰 행동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연적 범주들은 이 구성을 반영한다. (209쪽)
제 4장 변칙의 출현
샤먼은 고대의 산물이나 과거의 기인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권에서 과거 인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구현된 존재이다.(500쪽)
제5장 대립하는 형제들
신념 체계에 관한 논의에서 ‘악’을 짚고 넘어가기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악’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종교를 중시하지 않는 문화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구식 용어로 치부되고 인기를 잃었다. 한때 악으로 규정되던 행위는 이제는 그저 불공평한 가정‧사회‧경제 체계의 결과로 인식된다.(요즘 들어 예전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견해이다.) 또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잔인하고 파괴적인 범죄 행위가 신체적 질병이나 선천적 결함의 발현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요즘은 보통 악한 행동을 공포와 고통의 미학에 사로잡힌 사람이 저지르는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로 보지 않는다. (563쪽)- 제5장 첫 문단 글.
신화는 혼돈과 질서는 물론 모든 인간에 내재된 악한 본성을 인격체로 담아낸다. 인간의 어두운 측면은 영웅의 적수이며, 자발적으로 다가가서 미지를 탐험하는 대신 미지와의 대면을 회피하거나 미지의 존재를 부인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적수는 사회를 쇄신하는 대신 왕에게 간언을 하여 사회의 몰락을 부추긴다. 이 적수의 심상은 ‘악’이라는 현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에 걸쳐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두렵지만 유익한 일이다. 인류에게 이같이 유익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신화와 기억에 ‘악’을 담아낸 목적이다. 한 예로 기독교 전통에서 만든 악마의 심상은 악의 본질을 드러내는 훌륭한 사례이다. 암묵적, 명시적으로 악마를 모방하면 재앙이 초래된다. 악마의 특징을 묘사한 이야기들은 원한과 증오와 교만과 질투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규칙 위반이나 폭력, 공격성, 분노, 고통, 실망, 불안, 공포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나쁜 결과를 낳았던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다. 때문에 인생은 끝없이 복잡해진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메타 영격에서 찾아야 한다. ‘선’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계속해서 적절히 찾아낼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선’이란 도덕 지식을 구축하는 과정이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돕는 환경이자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무엇이 악인가?’의 문제도 이와 유사하게 다루어야 한다.(566쪽)
악은 창조적 탐험을 거부하며 기를 쓰고 저항하는 것이다. 교만하게 미지를 거부하며, 사회를 이해하고 초월하고 혁신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결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그들이 고결하고 용감하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다. 악은 어둠을 사랑하기에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을 퍼뜨리려 한다. 세계의 노쇠를 가속화하는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악한 영혼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런 행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로 쓸어 파괴하려는 신의 욕망을 부채질한다.(566쪽)
거대한 악은 적어도 돌이켜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대개 타인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없이 세우고 역사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홀로코스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이 그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무슨 행동을 했고,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또 도대체 무엇이, 누가 독일 사회로 하여금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명령을 따르는 마당에 도대체 히틀러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획득한 절대권력의 유혹에 저항하려면 얼마나 인격이 올곧아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계속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인격에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은 사회 환경의 제약 아래에 놓여 있다. 우리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할 때, 주위 사람들은 그 잘못에 대해 불평하고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의 신경적 성향을 억누른다. 만약 당신의 결점을 지적해 주고, 당신이 자신의 결점을 의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구세주라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히틀러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히틀러도 단지 인간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히틀러도, 스탈린도, 이디 아민도 모두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567쪽)
인간이 포악하고 퇴폐적인 성향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한계 때문에 대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분에 따라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게게 그런 일을 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권력자가 아니기에 주위 사람들을 난폭하게 대하는 선에서 만족하고는 스스로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자부한다. 우리는 타인을 자기 뜻대로 굴복시키기 위해서 공격하고 힘으로 제압하며, 힘이 없을 때는 자신이 아프다거나 나약하다는 점으로 동정심을 이끌어 내고 교묘히 타인을 조종하려 한다. 그런 일은 거의 없겠지만 사회가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헌신하며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고 가정해 보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중에 히틀러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해서 권한 부족이 도덕성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568쪽)
수많은 왕들을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폭군이 되거나 타락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폭군으로 살거나 혹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산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함으로써 “그런 악한 역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그 밖에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 등)과 같은 도덕적 재앙을 일으킨 이들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재앙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치명적인 적수, 악한 쌍둥이 형제를 알아보고 이해해야 한다.(568쪽)
구세주로 표상되는 인간의 영웅적 성향은 인간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다. 하지만 영웅에 ‘대항하는’ 성향도 영원히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끝없이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존재를 고통 속에 몰아넣으려는 욕망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 박힌 본성이다. 위대한 극작가와 종교 사상가들은 우리 내면의 악한 본성을 적어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이야기와 심상으로 전달했다. 현대의 분석적 사상가들과 실존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생각을 ‘상위 의식’ 차원으로 추상화하여 논리적이며 의미론적인 형식으로 담아 냈다. 이제는 자료가 충분히 쌓였기 때문에 우리는 악의 초상화를 명확히 그려 낼 수 있다.(569쪽)
악마의 이미지는 좋든 싫든 서양에서 악이라는 개념이 취한 형태이다. 우리는 아직 악마라는 신화적 표상을 잊고 지나쳐도 좋을 만큼 악에 대한 명시적 모형을 만들지 못했다. 현대인은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낡은 개념이라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합리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교만한 생각이다. 심리학이 발전한 현대는 악한 본성에 사로잡히는 것이 어느 때보다 위험해지게 될 기술력을 갖게 됐지만,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상들보다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상들은 적어도 악이라는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574쪽)
“문명은 생각하지 않고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활동의 수가 늘어날수록 진보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사물에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말은 생각하지 않고도 자동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고, 한눈에 범주화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지나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예측 가능한 대상은 고려하지 않고 한정된 인지 자원을 유용한 영역에 집중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변화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곳, 아직 적절한 행동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곳에 주의를 기울인다. 인간의 의식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일에 특화되어 있다. 상위 인지 처리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는 경험의 장 안에서 가장 뜻밖의 요소가 자연스럽게 주의를 끈다. 인간의 신경계는 불규칙적인 변화에 반응하고 규칙은 무시한다. 예측 가능한 사건에는 긍정적 정보든 부정적 정보든 정보 자체가 별로 없다. 반면 생소한 사건 보상과 처벌이 무한하게 존재하는 ‘초월적 공산’으로 난 창문과도 같다.(282~283쪽)
그래서 자의식의 출현은 곧 어머니와 아버지의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에덴에서의 추방은 ‘진정한 낙원’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며, 인생의 변덕스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해도 무시무시한 미지를 지속 가능하고 생산적인 세계로 바꿔 나가는 영웅의 정체성을 수용하기 위한 길이다. 경험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인간의 경험 세계를 특징짓는 죽음의 한계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식해야 한다. 주관적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이다.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역설적인 겸손이다. 이처럼 영웅의 겸손한 태도는 지금 현재 상태가 얼마나 강하고 안정되어 있든지에 관계없이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맞닥뜨리고 수용해야 한다는 믿음에 토대를 둔다.(611쪽)
전체주의자들은 완고할 뿐 아니라 잔인하며, 자기 안정을 희생하면서까지 잔인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한 예로 나치는 유대인을 박해하는 것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데 부담이 될수록 더욱더 가혹하게 박해했다.(625쪽)
전체주의자의 잔인성은 질서가 병적으로 강화될 때 나타나는 정서적 결과이다.(중략)
오류를 범할 때마다 미지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체주의자는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하지만 오류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험에서 매번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렇듯 계속 적응하지 못하면 미지는 머지않는 미래에 반드시 부정적인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환경은 서서히 끊임없이 변하므로 여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현실과 환상의 괴리가 커지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쌓여 간다.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일수록 더욱 오랫동안 변화를 회피한다. 하지만 곧 미지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서 더 이상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 시점에 이르면 혼돈의 용이 지하 세계에서 등장해 그를 통째로 집어삼싴나. 그러면 그는 용의 배 속에서, 어둠 속에서, 지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는 증오가 찾아들기 마련이다.
한편 퇴폐주의자는 입버릇처럼 세상에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무언가를 성취해 볼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권위적인 전체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류로부터 자유롭다. 오류도 무언가 가치 있고 바람직하며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627)
습관적인 회피와 거부는 매우 직접적으로 인격을 약화시킨다. 인격은 탐험한 영토가 넓고 적절히 행동할 줄 아는 상황이 많을수록 더 강인해 진다. 학습을 통해 강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 양식은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탐험을 통해서 생성되고 새로워진다. 이전과 다르거나 새로운 경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이 처한 환경은 단순히 성장의 결과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해 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 더욱이 미래를 준비하려면 현재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변칙은 말 그대로 영혼의 ‘양식’이다. 미지는 탐험 과정에서 인격을 만들어 가는 원료인 것이다. 변칙을 거부하면 인격은 굶주리고 노쇠하며 점점 더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진실을 마주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미래에 진실을 마주할 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된 사람은 모든 지식이 솟아나오는 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자기 인격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키기도 한다. 이 같은 인격 해체는 저절로 가속화된다. 인격이 조금씩 나약해질 때마다 앞으로 더 나약해질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5절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증거를 외면하는 사람은 현재의 신념에 위협이 되는 모든 정보를 억압하고 파괴하려 들 가능성이 크다. 회피하고 억압하여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인격의 부분들은 의식적인 적응 과정에 활용될 수 없고, 왜곡되고 무시당했기에 도리어 적용에 저항한다. 이처럼 행동과 심상과 사고가 분열될 때 인격은 약해진다. 나약한 인격으로는 의식 세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외부 사회와 내면화된 사회의 표상을 지키기 위해 개인차를 억압한 결과는 미지 앞에서의 나약한 인격으로 드러난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 -「마가복음」 3장 25절 (629쪽)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모슨 상을 받겠느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장 43절~48절
예수가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굻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마가복음」10장 17~26절
생명의 길은 ‘메타노이아’로부터 시작된다. 메타노이아는(공인된 성경 번역에 따르면) ‘회개’라는 단어로 번역되는데, 회개라는 단어를 언뜻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라’는 식의 도덕적 금지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생을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관점을 전환하고 영적으로 변화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너른 시야를 갖게 되면, 무엇보다 그 당사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것에 애착을 갖게 된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태복음」3장 8절)라는 세례요한의 말은 유대인을 향한 것이었다. 뒤이어 요한은 유대인들이 중시하는 사회적 정체성(아부라함의 자손)이 영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메타노이아와 죄의 변증법은 이 세계를 예수가 ‘집’이라고 표현한 진실한 정체성의 왕국과 『구약』 성경에서 죽음이나 무덤의 형태로 나타나는 지옥으로 나눈다. 지옥은 죽음과 무덤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이 역사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스러운 세계이기도 하다. -Frye, N.(1882),p.130.
메타노이아는 적응 그 자체이다. 스스로 자기 오류를 극복할 수 있음을 믿고 오류를 인정하며, 그 결과 ‘대립하는 가치 사이에 끼인 불쾌한’ 분열을 겪고 나서 내외적으로 재통합을 이루고 회복하는 것이다.(675쪽)
신화는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목표가 변해 온 과정이 극적으로 드러나며, 역사가 오랜 세월 인간의 행동에 미친 영향이 일화 및 의미 차원의 정보로 담겨 있다. 신화는 역사 속에서 확립된 행동 양식과 그것이 수립된 방식에 관한 일화 표상이다. 신화는 인생의 목적이 일화 기억 체계에 저장된 것이다. 신화적 진실은 과거의 경험에서 끌어올린 정보이며, 과거의 행동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이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인간의 동기와 정서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행동을 기록하여 역사의 중심을 설정한다. 이야기는 행동의 심상을 의미 차원에서 묘사하며, 이 묘사는 심상 및 일화 차원의 사건으로 역으로 번역되어 모방 행동을 일으킨다. 신화 속 이야기는 ‘바람직한 이상’을 제시하는 도덕률을 극의 형식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서 과거의 의미, 즉 과거의 삶이 현재와 미래에 해야 할 행동에 관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다루며, 이는 행동을 체계화하는 토대가 된다.(708쪽)
선조들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둘러싸며 신비한 힘으로 우리를 어둠과 혼돈으로부터 지켜준다. 그 보호막이 깨질 때, 선조들의 영혼이 표상하던 원칙이 비판이나 다른 영웅의 행동, 다른 이데올로기, 개인적 경험 등으로 무너질 때, 지식은 맥락을 잃고 기지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 뒤로 바뀐다. 그렇다고 해서 무서운 어머니가 인간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천 년 전 무서운 어머니의 존재 이유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다. 라마르크 학파에서 말하듯 기억이 생물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인간이 보편적 경향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이 조건은 개인을 보호하는 문화적 장벽이 무너질 때마다 생겨난다. (709쪽)
구세주는 신화의 정수를 현실에서 구현한 사람으로, 서양 문화에서는 누가 뭐래도 예수 그리스도이다.(710쪽)
기독교와 유대교가 대다수 동양의 종교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사회에 대항하는 혁명적, 예언자적 측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역사에 변증법적 의미를 제시하여 역사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에 존재하는 악의 뿌리를 무지로 볼 수 없고,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깨달음을 제시할 수도 없다. 잔혹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너무나 흉측하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한 의지만이 그 문제에 대한 가장 가까운 진단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부처처럼 그저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물론 백성들을 깨우치려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으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순교와 죽음으로 하강을 경험했다. 지금 논의의 목적에서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단순히 역사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싸우며 역사를 헤쳐 나가야 한다. 둘째로 기독교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를 비롯하여 모든 사회는 완전한 개인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710~711쪽) -Frye, N.(1882),pp.132~133.
도적적인 인간은 자신과 타인이 창조적 적응의 원천, 다시 말해서, ‘세계’의 원천인 것처럼 인정하고 존중하며 경의를 표한다. 인간을 구세주, 다시 말해서 구원자의 원형이자 문화의 담지자이자 신성한 영웅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는 적응 행동의 출처를 인정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통에 대한 엄격한 순응을 기초로 하는 도덕률을 위협한다.(711쪽)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마태복음」22장 32절)이었다. 그리스도는 도덕률을 성문화된 전통(명시적인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따르는 것 이상으로 만들었다. 전통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이 늘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 12절
하지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로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태복음」 5장 17절
이는 곧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전통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전통을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이 성경 구절에는 전통을 쇄신하는 과정이 전통에 의해 암묵적으로 담겨 있고 전통에 의해 촉진된다는 의미도 있다.(715쪽)
그리스도는 사실상 두 번째 모세로 나타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땅을 영적(정신적) 왕국으로 제시한다.(716)--프라이의 말
<프라이> 모세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조직했고, 예수는 열두 명의 제자를 불러 모았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홍해의 맞은 편에서 하나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했고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다. 이 세례로부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시작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아마도 더 나중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았고,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머물렀다.(916쪽 주석에서)
그리스도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이방인뿐 아니라 당시 도덕률의 관점에서는 하잘것없는 죄인으로 취급되던 창녀, 세리, 병자, 정신병자, 적수 등 모든 이를 포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률의 종말이나 모든 것이 똑같아져서 모두 다 가치를 상실한 무질서한 ‘공동체’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만 과거의 이력이나 출신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것으로 현재의 가치나 미래의 가능성을 못 박지 않는 나라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속한 공동체의 전통주의자들은 이처럼 지극히 혁명적인 사상을 접하고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리스도의 본보기는 그들의 행동을 책망했고, 그리스도의 철학은 전통주의자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전통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범죄자나 이단으로 몰기 위해 말실수를 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덫을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이 그 덫에 걸릴 때가 많았다.(731~732쪽)
이와 같이 구세주의 본질을 구현한 삶을 동양에서는 도道 위의 삶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도’는 신성한 남성적 원리와 신성한 여성적 원리 사이의, 때로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안전한 질서와 때로 인간을 파괴하는 혼돈 사이의 면도날처럼 좁은 길, 의미 있는 길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전통의 충실한 수호자이자 용맹한 미지의 탐험가가 되어 인생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행복과 안정을 누린다. 또 안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사회를 수립하고 지속시키고, 심리적으로 통합되고 영적으로 평온한 길 위에 굳게 서게 된다.(743쪽)
순전히 무고한 고통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 인격은 파탄된다. 반면 진솔하게 비극을 맞닥뜨리면 인격은 고양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고 거기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온전한 동일시를 구했다.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동일시 덕분에 그리스도는 자기 운명을 견뎌 내고 거기서 악을 제거할 수 있었다. 반대로 자기 인격을 스스로 격하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비극적 조건을 악으로 뒤바뀌고 만다.(838쪽)
인간적 한계의 핵심은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한계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외면하고 타락하는 까닭은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에 필요한 존재의 비극적 조건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생을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지진이나 홍수나 암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견뎌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고결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인생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타락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안기는 무의미한 고통, 우리 자신의 악이다.(842쪽)
정확히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탐욕과 욕망은,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진리가 될 수 없다.(845쪽)
진리는 고통스러우리만큼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서 그걸 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온 마음과 행동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그 무엇보다 진리를 섬기라는 뜻이며, 주위 사람들을 자기처럼 대하라는 뜻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꺾는 동정심으로가 아니라, 상대보다 자신을 높이는 정의로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여전히 빛을 볼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서 존중하라는 뜻이다.(845쪽)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진리이다.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나라를 다스리려 든다. 거리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마당에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은 너무 시시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을 고치는 것보다 자기 인격을 단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계를 고치겠다는 운동은 대부분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사랑을 가장한 이기심과 지적 자만이며, 올바르기는 하되 그 무엇도 올바로 잡지 못하는 행위들로 세상을 오염시킨다.(845쪽)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으나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우리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계를 지옥으로 뒤바꾸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자기 기만과 비겁함과 증오와 두려움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846쪽)
기독교 신화의 원형적 내용물은 많은 사람의 불안하고 절박한 무의식을 만족스럽게 표현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화는 여론의 합의에 의해 문화를 지배하는 보편적 진리로 격상되었다. 물론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보다 더 효과적인, 비합리적 사로잡힘에 인한 것이었다.(847쪽)
개인이 신성하다는 사상은 수천 년에 걸쳐 꽃을 피웠으나 여전히 직접적인 공격과 교묘한 반대로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사상의 밑바탕에는 개인이 바로 경험이 발생하는 중심지라는 깨달음이 놓여 있다. 현실에 대한 지식은 모두 경험에서 온다. 그러므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경험이라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점차 펼쳐질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신성한 것은 경험의 객관적 측면이 아니라 주관적 측면이다. 객관적이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동물이며, 각 시대가 규정하는 견해와 가능성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신화적 세계관으로 본 모든 개인은 유일한 존재이며, 새로운 경험의 집합이고, 새로운 우주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능력, 창조 과정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창조적 능력을 표현할 때 인생의 비극적 조건은 견딜 만하고 놀랍고 기적적인 것으로 변모한다.(867쪽)
인간이 아동기에 경험하는 낙원 상태는 의미 있는 대상에 온전히 몰두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몰입은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진솔하게 발현시킨 결과이다. 관심은 미지를 개인이 주관적으로 결정한 방향과 속도로 진솔하게 추구할 때 생긴다. 자애로운 얼굴의 미지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며 모든 중요한 가치의 근원이다. 이때 문화는 개인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개인을 훈련하고 능력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미지를 대면하는 개인의 힘을 키워 준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문화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아이는 부모가 제공하는 보호막 아래에서 미지를 탐험한다. 하지만 부모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어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각자가 스스로 문화의 신념과 목표를 받아들이고 집단 정체성을 획득한다. 두 번째로 맞이하는 이 보호 체계는 개인의 능력을 놀랍게 확장시키고 가다듬는다.
위대한 혼돈의 용은 개인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좇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의지와 희망을 집어삼키는 용과의 싸움은 영웅이 신화의 세계에서 겪는 싸움이다.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따라가면 반드시 이 용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허용되기만 한다면, 개인의 정신에 깃든 위대한 힘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영웅은 자발적으로 용과 전투를 벌인다. 거짓말쟁이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개인적으로서의 관심도, 발전할 기도도 모두 포기한다.
관심은 곧 의미이다. 의미는 개인이 성스러운 적응의 길 위에 있음을 드러낸다. 거짓말쟁이는 안전과 안정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저버린다. 이는 곧 의미도 신성도 모두 저버리는 행위다.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달래려고 자신의 삶을 재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식의 거짓말은 진실한 경험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내뱉는 말이다. 이 거짓에 속아 넘어가면, 세계를 무대로 자신이 개인성을 시험하며 자신의 능력을 확장할 기회를 잃는다. 그 결과 인격이 약화되고 인생의 의미도 고갈된다. 의미 없는 인생은 의지할 곳 없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기에 치명적이다. 의미 없는 인생은 구원의 희망이 없는 비극이다.
인생의 의미를 포기하면 반드시 악마의 적응 양식을 따르게 된다. 인간은 의미 없는 고통과 좌절을 증오하기에 그것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만하게 군 탓에 삶이 견딜 수 없어지면 삶에 복수를 감행하려 든다.
부활이란 곧 개인의 능력을 확장하는 문화의 정체성을 수용한 이후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되살리는 일이다. 관심이 되살아난 개인은 미지와 기지의 경계로 향하며, 그 결과 사회가 확장된다. 현대 사회에서 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행동하고 역사의 경계를 확장한다.((967~869쪽)
-이 책의 본문 마지막 부문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