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의 정체와 교리 비판 (1)
1. 서론 2. 교리적인 비판 1) 배타적인 구원관 ➀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➁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구원파 주장 ➂ 구원의 시제 2) 죄관 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가? ➁ 종교개혁자들의 주장 3) 칭의 4) 회개는 단회적인가? 5) 이원론적인 주장 ➀ 육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➁ 죄는 전인적으로 마음에 있다. 6) 기타 이단성 ➀ 양태론 ➁ 종말론 ➂ 극단적세대주의 ➃ 알레고리(풍유)적인 성경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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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나라 구원파의 가장 큰 패밀리는 3개파로 구분되어진다. 첫째는 유병언(권신찬) 계열이며 둘째는 첫 번째에서 분열되어 나온 이요한(본명 이복칠) 계열, 셋째는 박옥수 계열 등 3개파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서달석등 유사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곳이 있으며, 이요한으로부터 분열된 구영석(새생명선교회), 유병언계열의 녹색회등이 있다. 구원파는 네델란들의 길기수(Case Glass), 미국의 딕욕(Dick York)등의 선교사로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폐쇄적인 형제교회(Brethen Church)의 한 분파로 알려져 있다.
1) 유병언, 권신찬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오대양 사건과 ㈜세모, 녹색회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병언과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모든 구원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권신찬(현재 고인)은 예장 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네델란드 자칭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길기수: Case Glass)의 영향으로 1961년 11월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 합동총회 경북노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아 목사면직을 받았다. 박옥수의 주장에 의하면 대구성경학교에서 권신찬은 정식 수강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고 한다.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었다. 유병언은 박옥수와 함께 1960년대 초 외국인 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6개월간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으나 1963년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구축, 1969년부터 1981년까지는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1981년 11월부터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에 딕욕에게 함께 성경공부를 한 사람은 박옥수, 권신찬, 유병언과 우리나라 네비게이토 대표인 유강식과 하진승도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유강식은 현재 기독교복음침례회의 본부이며 소위 삼각지교회(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231-23 소재)라고 불리는 서울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거듭남, 죄사함, 복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에 미혹된 미국국제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현 극동방송을 설립한 선교단체)는 유병언을 극동방송 부국장에 임명했고, 그의 장인 권신찬을 방송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권신찬은 1969년부터 1974년 극동방송국에서 쫓겨나기까지 <은혜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기존교회의 “예배행위, 십일조 헌금, 장로집사 제도, 새벽기도,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등을 종교로 규정하고 “종교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교했다. 정통교단은 그의 이단사상에 항의하여 극동방송 청취거부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팀선교회는 1974년 구원파 소속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게 된다.
유병언은 1974년 ‘삼우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인수,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하였고, 1980년대에는 ㈜세모라는 이름으로 스쿠알렌, 컴퓨터, 조선, 유람선 등의 사업을 하였다.(현재 한강 세모 유람선을 타인에게 매도함) 오대양 사건과 연관되어 4년을 복역하고 나온 후에는 유병언은 “우리는 천국의 스파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유병언은 자신을 ‘자선사업가, 새마을 운동가, 환경보호운동가, 권투프로모터’와 같은 사업가로 부각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복음침례회 출판부라는 명칭의 출판사를 갖고 있다. 유병언은 1982년 자연보호운동을 기치로 내세우며 한국녹색회(회장 정윤재)라는 단체를 만들어 2002년부터는 경북 청송군 현서면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여 집단촌을 형성하여 환경친화적인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이른바 ‘청녹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데, 청송군민들은 “한국녹색회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송 외에도 유병언은 안성과 제주도에 농장을 운영하면서 집단생활을 유도하고 있다.
2) 이요한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이요한(본명, 이복칠)은 중학교 졸업 후 6.25 동란 중 대구임시신학교에서 권신찬에게서 사사받은 것이 교육배경의 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2년에 깨달음을 경험하고 거듭났다고 주장하며, 1971년에 권신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전남 목포에서 ‘평신도복음전도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였다.
1974년말 유병언은 부도위기에 놓인 삼우트레이딩을 매입하여, 교인들의 헌금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이요한은 1983년 교회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유병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다가 집단 구타를 당하고 쫓겨난다. 결국 이요한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를 설립하였다가 1995년에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에 1천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서울중앙교회를 건축하였고, 생명의말씀 선교회라는 단체를 운영하며 출판사로 영생의말씀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요한측의 교리는 구원파의 교리와 조금 수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의 스승인 권신찬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다. 박옥수측과 유병언계열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 비교적 외부에 노출되지 않음으로 현재 많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3)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기쁜소식선교회: IYF)
박옥수는 경북 선산군에서 1944년 6월 출생하여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후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의 금오산 집회에서 “1962년 10월 7일에 자신의 죄가 희게 씻어지는 경험을 하였다고 말한다. 그후 1968년 전역 후 김천에서 전도하기 시작, 딕욕 선교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예수교복음침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는데, 현재는 기쁜소식선교회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대구 계명대 앞에서 중앙교회라는 간판아래 활동하다가 1980년대 말에 활동무대를 대전으로 옮겨 한밭중앙교회를 담임하다가 2005년 서울 서초동 양재동에 있는 기쁜소식강남교회를 중심으로 IYF와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4ㆍ19 혁명 직후 딕욕 선교사는 대구로 와서 YWCA홀을 빌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도집회를 하면서 삼덕동에 있는 일식집 하나를 빌려 선교학교를 시작했는데 박옥수는 이 선교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 딕욕이 한국을 떠나면서 박옥수가 선교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딕욕은 박옥수측과 교류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박옥수가 변질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을 한 바 있다. 또한 딕욕은 목사제도가 없어야 하는데, 구원파 목사들이 자신을 목사라고 한다고 비난한 적도 있다.
1983년 기쁜소식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는데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전국 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세력과시를 하며 성경강연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기쁜 소식>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며, 특히 일간신문을 통해 대대적인 전면광고를 하였다.
박옥수는 최근 국제청소년연합(IYF)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세계 35국에 지부와 회원을 두고 있는데, 대학교에서는 영어웅변대회, 창조과학세미나, 영어교육, 컴퓨터교육, 연극교육, 자원봉사자모집등으로 교묘히 위장하여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특히 이들이 매년 주최하는 ‘IYF세계대회’는 주요 매스컴에 소개된 바 있다.
최근에는 박옥수는 또별(주 운화)이라는 건강식품을 암치료제, AID 치료제로 과대선전을 하다가 5백만원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으며, 운화의 주식을 고가로 판매를 하다가 고소를 당하는 등 끊임없는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4) 구원파의 포교
신천지는 성경공부를 유도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가정방문을 하여 설문조사를 부탁한다. 그리고 구원파는 성경세미나에 함께 참석할 것을 권유한다. 오랜만에 학교친구나 예전의 교회친구들에게 연락이 와서, 세미나에 함께 참석하자고 한다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여야 한다. 일반 성도들은 세미나에 참석하여도 그 문제점이나 이단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세미나를 주최하는 곳이 위 세곳의 명칭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하여야만 한다. 특히 십자가 무용론을 주장하므로 교회에 십자가가 없으며, 새벽예배를 율법주의라고 비판한다.
2. 구원파교리
1) 배타적인 구원관
➀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구원파는 예수가 우리 죄를 모두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가르친다. 더욱이 그것을 깨닫는 날이 곧 이미 구원을 받은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에 “몇년 몇월 몇일에 구원을 받은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받은 날이 곧 구원을 받은 날이며, 거듭날 날이므로 그 날짜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가 죄를 씻어주었다는 결과만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며, 그렇다면 왜 구원파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죄사함은 모든 기독교가 다 가르치는 내용이다.
- 이번 집회를 통하여 확실하게 죄를 씻음받은 사람은 하룻밤을 지내보면 내 마음에 성령이 들어와서 내가 변화된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런 분들 있지요?” 하룻밤만 잠을 자고 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온 걸 알게 되고, 내가 변화된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는 일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있는 죄가 확실하게 씻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박옥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1996년, 203쪽)
구원파는 죄에 대한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죄는 관계적이며, 구원파는 의인과 죄인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적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구원파는 칭의와 중생, 성화에 대한 구원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는 곳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단편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
구원파에서 아래 골1:6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자체가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성경에 수없이 기록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모두 외면하고, 부분적인 몇 개의 구절만을 인용하여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절이 수백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왜 인용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과연 본문이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일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1:4-6)
성경은 구원파 교리와 같이 깨달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난다"고 말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본문은 그당시 골로새서 교인들이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날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열매를 맺고 자라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➁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구원파 주장
혹간 사람들은 구원파의 교리가 개혁주의 예정론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파는 예정론을 매우 강하게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오직 다섯 번째의 견인교리 하나뿐이며, 그들의 견인론은 구원파 교리를 깨달으면 그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섭리를 강조한 것이며, 구원파와 같이 자신이 어떤 교리를 깨달음으로 자의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하여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파에서는 예정론을 지옥에 가는 교리라고 가르친다.
- 예정론의 5대 원칙(TULIF) : 1. 전적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5. 무조건적 견인(Final Perseverance)
- 그중 에베소서 1장을 잘못 해석하여 예정론의 가장 큰 기초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 성경을 잘못 가르치면 영원히 멸망합니다. 예정론을 배우는 신학교 내에서도 ‘사람들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무엇하러 전도를 하느냐? 전도할 필요가 없지않느냐?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냐?’ 등의 질문들과 ‘하나님이 절대 주권으로 예정하셨으니 사람들이 불평할 수 없다. 정 궁금하면 천국에서 물어보라.’라는 식의 대답으로 많은 변론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의말씀선교회, 질의와 응답, 자유의지와 예정론)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2.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3.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 4.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피구원자인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유지하여야 하며, 죄와 멀리하여야만 하며, 구원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피구원자인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란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나는 더이상 죄와 상관이 없다"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이라고 부른다.
또한 거듭남(중생)에 대해서도 구원파는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거듭남은 무엇을 깨달아야만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언을 한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➂ 구원의 시제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시제”는 세가지로 언급된다. 즉 이미 얻은 구원(과거적 시제의 구원)과 현재 걷고 있는 구원의 길(현재적 시제의 구원)과 궁극적으로 얻게되는 구원(미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한다. 물론 구원의 개념이 세가지라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원에 대한 시제적인 표현이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과거의 시제가 기록된 성경구절만을 선택하여 그것을 강조하여 가르친다.
과거적인 시제 :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9)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현재적 시제 : 성경은 현재형의 구원을 함께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who are being saved)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장래적인 시제 : 성경은 장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특히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구원의 시제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장래이든, 인간은 구원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심을 알아야만 한다. 즉 인간은 구원에서 피동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조건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확증이어야만 한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는 이미 얻은 구원과 현재 이루고 있는 구원과 함께 궁극적으로 우리가 얻을 구원의 세가지 시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나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순간 순간의 현재진행형의 구원에 대한 연속적인 확증이어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의 연속성”이어야만 한다. 구원은 한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요, 과정을 말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또한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지가 구원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다거나 어떤 교리를 깨달았다는 과거적인 사실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다.
2) 죄관
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가?
구원파는 이미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없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구원파는 본문을 인용하여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본문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내용인가? 성경은 분명히 죄가 있다고 말하며,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자백만 하면 된다는 구원파 주장과 다르다. 성경은 죄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하고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죄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구원파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며 스스로를 속이는 주장이 될 것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았을까? 물론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셨다. 그러나 "죄사함"은 실제로 죄가 없어져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고 죄책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셨고, 무리들이 흩어지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죄는 죄책과 죄성으로 나누어 진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책을 사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즉 죄가 있지만, 죄책(정죄함)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죄성, 즉 오염과 부패된 성향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1-23)
구원파에서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죄가 없으며, 그것을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에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이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 구원파 교인중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된 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 구원파는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할 것이다. 곧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스스로의 판정은 실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성경은 깨달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과연 성경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이미 죄가 없다고 하는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➁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구원파들은 마틴 루터, 웨슬레, 캘빈등의 예를 들며, 종교개혁자들도 자신들과 같은 깨달음을 체험하였는데 기독교가 그 복음을 변질시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거듭난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는지, 혹은 죄가 완전히 없을지 유명한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와 웨슬레, 루터, 캘빈의 주장을 살펴 보자.
-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골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 (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을 전연 느끼지 않으리 만큼 충분히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계속 싸워야 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로 인해 그들은 훈련받는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모든 저술가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유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거기에서부터 욕망이 끊임없이 튀어나와 죄를 짓도록 유혹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캘빈 기독교강요, 3권, 3장. 10)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 죄와 죄 용서 1) 원죄에 대한 스콜라 교의의 그릇됨 2) 우리의 모든 의는 불결하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는 여전히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4) 선을 좇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5)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6) 원죄(죄성)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고 죽어가고 있다. 7)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 (루터신학개요, 한국장로교출판사, 132-136)
어느 누구도 구원파와 같은 깨달음을 갖고 있거나, 구원파의 교리와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를 깨달은 것이지, 구원파의 이상한 교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깨달음이나 행위로 거듭난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주장하였으며,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중요한 과정으로 강조하였다. 어느 누구도 모든 죄가 없어졌으므로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자백만 하면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특히 구원파는 웨슬레도 몇월몇일에 회심을 하였다고 주장을 하므로 구원파와 같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자신의 일기에 회심을 한 날짜를 기록한 것이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더욱이 웨슬레의 구원관과 죄관은 구원파와 전혀 다른 정통신학적인 내용이다.
3) 칭의
칭의는 죄가 없게 하여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칭하심을 받는다는 법적이며 신분적인 용어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바울의 서신문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의 용어의 개념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하여, 일련의 헬라어에 대해서 주목하여야 한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바르게 하다), 디카이오마(의롭다함, 심판), 디카이오시스(무죄선언)라는 용어는 주로 법정용어로 사용되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력과 의지, 또는 행위로 의인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되어진다. 즉 우리가 의인이 되는 대가(보상)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의롭다하심이라는 법적인 무죄선언을 통하여 의인으로 여기신다. 우리가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고, 가리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차를 운전하다가 사람을 인명피해의 사고를 내었다고 가정하자. 사고를 내어 구속된 사람이 그 피해자 측과 다행히 합의가 되어 보상을 하고 풀려났다고 하자. 가해자는 보상을 통하여 무죄선언을 받고 석방되어진 것이다. 그는 보상을 함으로서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죄가 남아 있다. 이것이 칭의의 단계이다. 즉 법적 신분적 변화로 석방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 대한 보상을 하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대속이다.
칭의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 무죄선언하시는 사법적인 행위이다. 아담 안에서의 정죄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의 관계로 전환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나의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가 없어지고 완전한 의인이 되므로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 밝혀지는 것이다. 구원파의 교리에 의하면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더욱이 그 교리를 깨달으면 거듭난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구원관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렇다면 칭의는 중생과 어떻게 다른가? 중생(거듭남)이 실제적 변화라면,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를 말한다. 중생이 내적, 주관적 변화라면, 칭의는 외적, 객관적 변화가 되어진다. 중생이 죄의 능력을 제거해 주는 것이라면, 칭의는 죄책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in me"(나의 안에서) 하시는 것이라면, 칭의는 하나님이 "for me"(나를 위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딛3:7)
물론 칭의와 중생은 별개의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개념은 구별된다고 하지만, 시간적으로 나타나는 순서를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서로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중생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모든 죄가 씻어져 의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부분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잘못된 구원론이다.
“여러분, 예수님 왜 믿습니까?” “죄사함 받으려고 믿습니다.” “죄사함 받았습니까?” “받았지요” “그럼 죄 없겠네요?” “그렇지만 죄야 있지요”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다 씻었으면 없어야 하는데, 씻어도 죄가 있으면 씻으나마나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씻었다고 했는데, 죄가 남아있으면 주님이 죽으나마나 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그렇지요? (박옥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1996년,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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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게 이단들은 비성경적인 부분들이 문제를 일으키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주, 돈, 성도의 관계가 밀접합니다. 문선명, 박태선, 정명석 등을 보면 돈의 힘이 교주의 교권을 강화시커줍니다. 개신교 정통교단도 하는 행위에 있어서 여러교회에서 우려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리 문제를 떠나서 헌금과 교권이 한몸이 되어서 추한 냄새를 나게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