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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장마비에 집에만 틀어박혀 좀이 쑤시는 차에 반짝 비개인 오후를 틈타 아내와 함께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회암사지를 들렀다. 몇일째 내리는 비 때문에 삼각산이 그렇게 맑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다. 청정한 공기에 마음은 한층 상괘했지만. 또 언제 쏫아 부을지 조마조마하다.
회암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회암사지의 가장 북쪽에 세워져 있는 높이 6m의 팔각원당형 탑돌로 주인공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탑은 높이에 비해 안정감이 있고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난 점을 볼 때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용 머리와 흡사한 비말 조각. 몸에 조각된 문양도 몸은 말 같으나 조각은 용비늘을 사실감 있게 조각했다. 운용 문양 . 회암사의 중창과 중흥의 배경에는 유명한 고승들과 왕실의 후원이 있었으니. 조선초에는 태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회암사 주지로 또한 세종(世宗)의 형(兄)인 효령대군(孝寧大君)도 이곳에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목은집"에는 거대한 수통과 맷돌.
당시 회암사 전체인원이 마실 수있는 우물. 사각 수통이 . 수구가 아름답게 만들어 졌음. 탑 뒤편에 있음.
이처럼 당당하였던 회암사의 위세는 문정왕후 사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1997년부터 시행된 발굴 성과물을 보면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또한 8단지의 화계나 정청은 궁궐건축 양식과 유사하여 회암사가 400여년 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회암사는 조선최대 국찰이였으며.
당간지주. 대체로 당감지주는 길다란 두 돌 기둥을 세워 만들어 지는데. 이 지주는 통 돌로 만들어 졌다. 사진 반대편 쪽이 트여있다. 사진 우측에는 전통적인 당간지주도 있다.
< 아래 부도탑과 비문의 주인공 스님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시는 바로 나웅화상의 시 이다. 대 선사들은 이 시 처럼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 지공이 그랬고 나웅이 그랬고 무학대사가 그랬고 만공.경허스님이 그랬고 법정스님이 그랬다. 요즘 사찰에 가보면 이 시 구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이 보여 안타깝다.
회암사지에서 약 5~600m 산길로 오르면 조그마한 지금의 회암사가 있다. 가람이래야 서너채 . 최근에 대웅전을 3칸. 겹처마. 배흘림기둥. 팔짝지붕으로 새롭게 중창해 아직은 부처님을 봉안전이다.
이땅의 고유의 토속신앙등을 모시는 삼성각.
선각왕사비 이 비석은 고려말의 고승으로 흔히 나옹화상으로 알려진 선각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산불발생의 원인이 성묘객의 부주의에 따른 것이고,
요즘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그 인구수가 많이 늘어났다, 모두가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하여 바람직하다 하겠으나 가끔 그렇치 못한 등산객들도 더러있는것같다,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원래의 비가 서있던 자리 .아직도 비 받침 거북돌은 그대로 있다. 흩어진 파편들을 수습하여 겉모습이나마 겨우 짜맞춰 놓은 이 비석은
<원래의 선각왕사 비>
회암사 경내의 지공선사 부도 아래쪽에 있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본명은 혜근이다.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고,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였다. 회암사의 주지가 된 후 절을 중창하였고, 우왕 2년(1376)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부도는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8각을 기본형으로,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3단을 이루는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은 배가 불룩한 북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갔다. 지붕돌 위로는 하나의 돌로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석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3단의 받침 위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처마는 느린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회암사에 놓여 있는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다. 회암사에 서 있는 이 부도는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3단으로 올렸는데 그 중 가운데받침돌만 배가 볼록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탑신은 둥근 공모양이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이 두툼하며 처마의 각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리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운 것이다.
지공선사부도비 비의 총높이는 365cm로 네모꼴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식입니다. 원래 1387년에 세웠던 것이 도중에 파괴되어 1828년에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비 옆에는 비신을 올려놓는 흠이 없는 거북받침돌인 귀부(龜趺)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무학대사 홍융탑"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 나옹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이 놓이고 탑신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보물 제388호
지붕돌의 각진부분에 여러종류의 짐승이 새겨져 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무학대사의 묘비로 회암사터에 세워져 있는 무학대사의 묘비로, 바로 뒷편에는 그의 묘탑(보물 제388호)이 함께 서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조선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이고,무학은 그의 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입구에는 서넛대 댈 수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바로 옆에 작은 계곡물이 흐르는데. 연일 비가 내린 탓으로 깨끗한 계곡 물이 제법 많아졌다. 이 계곡을 건너 약 20m정도 산등성이에 오르면 이름도 모르는 작은 옛 부도탑이 외롭게 서있다 .. 금방이라도 비가 퍼 부을것처럼 또 날이 어두컴컴해 진다. 회암사지 바로 옆 동네가 희대에 방량시인 "김삿갓" <김병연>의 고향이란다 . 뭔가 볼것이 있을것 같아 빙빙 돌고 돌았지만 길따란 군 부대 담장에 김삿갓 고향을 알리는 그림외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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