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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판화가 열전(2-프란스 마세릴)
(2)프란스 마세릴Frans Masereel (1889-1972, 벨기에의 화가, 판화가)
‘글 없는 그림 소설(wordless graphic novels)
프란스 마세릴은 벨기에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그는 목판화 여러 장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림 소설을 최초로 세상에 내놨다. 이른바 ‘글 없는 그림 소설(wordless graphic novels)’이다.
그림과 서사를 결합한 그의 독특한 작업은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만화나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그의 그림 소설은 만화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연이어 그려진 그림만 있을 뿐 만화와 달리 글자가 전혀 없다.
만화란 한마디로 이미지와 글의 결합체인데, 거기에서 글이 차지하는 역할이나 기능은 생각보다 크다. 만화에서도 작가와 장면에 따라 그림과 글의 중요도가 다르지만, 이야기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그림은 거들 뿐, 글과 글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풍선 대사는 물론이고, 상황과 상태를 나타내는 여러 의성어와 의태어들, 이를테면 끼기긱, 철퍼덕, 헉헉, 흠칫, 와장창, 부웅~, 깨갱.... 등의 글자들이 상황에 따라 변형되고 크기도 달라지면서 그림을 압도하는 경우도 많다. 독자 중에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기 급급해 글을 빨리 읽기 위해 그림은 스쳐 지나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다면 영화나 에니메이션 등 동영상은 어떤가. 동영상에서는 비주얼 만큼이나 청각적인 부분, 즉 인물들의 대사와 음성, 배경음악, 효과음 등이 중요하다.
무성영화 시대가 있었지만 그때에도 중간에 글자와 소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마세릴의 ‘그림 소설’은 페이지마다 정지된 그림만 있을 뿐 글자도 소리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침묵 속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며 거기에 새겨진 이미지와 그것의 변화를 보며 이야기를 유추하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나 만화같은 (이런 매체에서는 실제로 과잉/과장된 정보가 많다) 매체에 중독된 사람이나 익숙해진 사람들은 ‘글 없는 그림소설’을 불친절하다며 몇 페이지 보지 못하고 내던질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하기 귀찮다며 외면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그림소설은 독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생각과 상상을 요구하고 유도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침묵-그림 소설
하지만 ‘글 없는 그림소설’을 즐겨찾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신문기사나 소설 같은 문장이 아니라, 시(詩)처럼 모호하면서도 비유와 은유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림 소설’을 대하는 독자들은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시각을 예민한 상태로 두어야 하며, 따라서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독자가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조립하고 전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독자의 경우, 어느 부분도 놓지지 않으려 시각을 확장하고 그림의 여러 구석을 더듬는 등 그림 자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작가가 최초로 발표한 <남자의 열정 25이미지, 1918>와, 작가의 대표적 작품으로 알려진 <열정적 여행 Passionate Journey, 1919>을 보자. 앞의 작품은 모두 25장, 그리고 뒤의 것은 158장의 목판화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소설처럼 여기에는 주인공이 있다. 작가가 20대에 그리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당시 작가의 나이의 청년이다. 독자들은 그 주인공을 따라가며 그가 만나는 여러 인물과 환경, 그가 겪는 희망과 좌절, 사랑과 이별 등을 상상하고 공감하며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다른 작품 <도시 The City, 1925> 같은 경우는 다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특정 인물이 없다. 대신 도시 자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 100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20세기 초 산업화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유럽의 근대 도시(‘모더니티의 수도-파리’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임)를 전지적 시점으로 이 구석 저 구석, 이 상황 저 상황을 보여준다.
이 책은 빌딩과 공장들 사이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거나 흰 연기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으로 첫 페이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도 초승달과 별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의 밤하늘이다.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와 더불어 매순간 사건이 일어나는 다이나믹한 도시 자체가 작품의 주인공이자 주제인 것이다. 한편 연기로 시작해 연기로 끝나는 이 작품은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환경 오염’이란 이슈를 예견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마세릴의 작품 일부를 오픈하고 있는 도메인을 소개한다. 이 도메인을 통해 독자들은 마세릴의 작품 5점을 볼 수 있다. 도메인 이름은 The Anarchist Library로 https://theanarchistlibrary.org/search?query=Masereel 를 클릭하면 마셀릴의 작품 목록이 나온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5점이다. <My Book of Hours : 열정적 여행Passionate Journey과 제목만 다를 뿐, 같은 작품이다> <아이디어> <정치적 드로잉> <남자의 열정 25이미지> <도시 The City> 등 작품들을 모니터를 통해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제공되고 있다. 특히 마세릴의 작품은 일부 몇 쪽만 보아서는 이야기를 가늠할 수 없어 걱정하던 차에 나는 이 사이트를 통해 독자들이 쉽게 볼 수 있게 됨으로써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세릴의 작품집 몇 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독자들과 나눠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위 도메인에서 작품사진을 다운 받을 수도 있는데, 다만 그것들을 판매하는 등의 상행위는 금한다고 기재돼 있다. 마세릴이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서관이라 자인하는 이 싸이트에서는 판권이라는 장벽을 치고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개방하는 무정부주의적 개념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란스 마세릴 이외에도 아나키즘과 관련한 의미있는 자료가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어 나는 즐겨찾기에 등록하고 있다.
전쟁과 자본주의 사회 비판
작품 <도시>의 첫 페이지는 공장과 빌딩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다. 이는 이 책을 시작하는 저자의 시선이자 자세를 암시한다. 둘째 장면은 연기를 피우며 들어오고 나가는 기차역, 셋째 장면은 기차와 그 주위에 모여있는 군중들이다. 그것들을 부감법으로 그려 보여준다. 기차역은 인상파 화가들도 즐겨 그렸던 것처럼 파리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4번째 그림부터는 빼곡이 들어찬 빌딩과 그 사이를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벌이는 여러 사건과 행태들이 이어진다. 산업화-근대화-도시화-인구집중,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가는 군중들. 한 곳에 모여 있으나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 도시 이 구석 저 모퉁이에서 제각각의 욕망과 쾌락에 열중한 사람들. 극장, 병원, 호텔, 백화점, 법정, 은행, 공장, 교회, 시위 군중과 경찰, 창녀와 포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사람. 자살하는 사람, 북적대는 길과 텅 빈 집, 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 도시의 구석구석이 그려지고 있다.
마세릴은 목판화의 달인이다. 쉽고 빠르게 슥슥 깎아 판을 만들고 종이에 찍는다. 그는 표현 스타일에 있어선 표현주의자이고, 내용에선 현실 사회, 전쟁과 자본주의, 인간 정신의 적응과 변화 등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룬다.
그는 일생동안 위와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 없는 그림 소설’을 40편 이상 완성했다.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 목판화’들을 유럽 여러 지역을 오가며 발표했고 그 이름을 떨쳤다.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가는 그의 작품집에 서문을 쓴 명사들, 예를 들면 토마스 만이나 로망 롤랑 등 이름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전세계적으로 이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린드 워드(Lynd Ward)와 그 후 세대인 에릭 드룩커(Eric Drooker), 캐나다인 조지 워커(George Walker)와 로렌스 하이드(Laurence Hyde), 그리고 독일의 칼 메퍼트(Karl Meffert) 등 작가들이 그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반전주의와 무정부주의자의 길
작가는 1889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5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와 함께 겐트(Ghent)로 이사해 성장한다. 어머니가 급진적 사회주의자이자 의사였던 남자와 재혼하자 마세릴도 그런 가정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1907년 18살에 그는 파리로 가 에꼴 드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09년 영국과 독일을 여행하던 중 동판화(eching)와 목판화를 접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11년 4년의 파리생활을 마칠 즈음 1차대전을 앞두고 고국 벨기에에서 징집영장을 받았으나 그는 입대와 귀국을 거부한다. 이후 그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생을 유럽을 떠돌며 작품생활을 이어갔다. 반전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은 확고한 것이었고 모든 작품에 그러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벨기에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추방인이 되었지만 안트워프에 있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미술과 문학 관련의 잡지 루미에르(Lumière)를 창간하여 거기에 일러스트 작품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스위스로 이민한 후에도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을 했고, 파리에 체류할 때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그곳을 빠져나와 남프랑스 도시들에 피해 있기도 했다. 한동안 베를린에 머물 때는 특히 게오르그 그로츠( George Grosz)와 가까웠다.
2차대전 후 1949년에 니스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1968년까지 그는 여러 목판화 시리즈를 출간하는 한편 극장의 의상과 장식품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는 1972년 아비뇽에서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망한 후에야 그는 고국 벨기에로 가 그가 성장한 도시 겐트에 묻혔다.
남성적, 서사적, 직설적 표현들
마세릴의 목판화 시리즈는 주로 사회비판적 내용에 형식은 표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를 유럽 전역으로 유명하게 한 작품들, 이를테면 <남성의 정열 25 이미지>(1918), <열정적인 여행>(1919)>, <태양>(1919), <아이디어>(1920), <글자 없는 이야기>(1920), <풍경과 목소리>(1929)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또한 마세릴은 토마스 만, 에밀 졸라, 스테판 츠바이크 등의 유명 작품의 삽화를 그렸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1년에 파리로 돌아왔을 땐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풍경화를 캔버스에 유채로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장의 작품이 소설처럼 이어져 한 작품이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회화나 판화작품과 달리, 한 장 한 장이 아니라 전체를 연이어 보아야 서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위에 있는 도메인 주소로 찾아가 마세릴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기를 권유한다. 참고 작품사진은 최초의 ‘그림 소설’이었던 <남자의 열정 25 이미지>로 시작한다. 비교적 짧고 작품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는 이 작품의 표지 그림이다. 사생아처럼 태어나 괄시를 받으며 자라다가, 사소한 일로 감옥에 가고, 출옥 이후 성인이 된 어느날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불의에 맞서는 남자. 그는 결국 사형을 당하는데 <남자의 열정 25 이미지>는 결국 예수의 일생을 압축하고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인다면, 앞서 게재한 판화작가 캐테 콜비츠(Kathe Kollwitz)의 작품과 마세릴의 작품을 비교해보며 그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여성적 섬세함과 감성에 호소하는 케테 콜비츠에 비해, 마세릴은 현저히 서사적이며 남성적이고 직설적이다. 이처럼 비교를 통해 각 작가의 성격과 특징을 알아간다는 일은 미술이라는 바다의 매력에 첫발을 담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