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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조 회장 제3회 한흑구 문학상 수상결정!!
-다음은 포항MBC 인터뷰 내용입니다.
포항MBC <라디오 열린세상> 표준FM 100.7
방송분류: 시사정보 프로그램
방송시간: 월~금 저녁 6시 5분부터 8시까지
진행: 박선환 아나운서 / PD: 이명우 / 작가: 박웅
명수필이죠. <보리>, 읽어 보신 분 계십니까?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작품은, 우리 지역의 문인이었던 한흑구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요. 강인한 보리의 생명력과 함께, 생명과 인생에 대한 관조가 돋보이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흑구문학상이 제정됐는데요. 매년마다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수상자가 결정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성기조 작가님이 이 상을 수상하셨다고 그러네요. 지금부터 한 편의 수필 같은, 이야기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1. 50여년이 넘는 세월을 글과 함께 해오셨는데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어릴 때 꿈이 작가셨다구요? 어떻게 해서, 작가의 꿈을 갖게 되셨더랬어요?
-충남 홍성 태생으로 예산에서 성장한 성기조 시인은 어렸을 때 논두렁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애들을 보고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사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스케이트 대신 동화책을 선물했다. 동화책을 읽은 그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책의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중학교 때 세계문학을 탐독한 그는 앞으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1-1. 그런데, 작가가 되기까지 어려움도 많으셨다구요?
-아버지는 문학은 배고픈 일이라며 아들에게 법과에 진학해 고시를 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국문과에 진학했다. 아들의 처사에 실망하고 화가 난 아버지는 학비를 대주지 않았고 서 시인은 고학으로 대학을 마쳐야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문학도로서 청마 유치환선생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를 읽은 유치한 선생은 격려어린 답장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성기조 시인은 문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2. 그런 고난을 딛고, 첫 번째로 쓰셨던 작품이 어떤 거죠?
-언제 작품이고..언제 나왔죠. 1958년 시와 시론에 시 ‘꽃 ’을 발표.
3. 첫 번째 라는 것, 그 어느 누구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첫 번째, 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기억나세요?
-그 때의 기분과 주위의 반응들...회상...
4. 그러다가 격동의 1970년대를 겪게 되십니다. 그때가 어찌보면, 문인들의 수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글쟁이는 가난하다며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우려와 달리 시인은 문인이지만 여유 있게 살았다. 교편을 잡으면서 다수의 책과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했다. 또한 사직공원과 장충공원에 국내 최초로 국제규격의 수영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70년대 말 반체제문인들이 구속되었을 때 변호사 비용이나 차입금, 생활비 등을 부담하곤 했는데 당시 문단에서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고 또 돌보았던 유일무이한 문인이었다.
5. 작가라는 꿈도 이루시고, 혹여나 아들이 가난하게 살까봐 걱정하시던 아버님의 짐도 덜어드린 셈인데요. 아버님 마음이, 참 흐뭇하셨겠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신다면요?
-평생 문인으로 유명했고 또 경제적인 면에도 유능했던 그를 보면서 1988년에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너는 늙을수록 일이 많아 바쁘니 얼마나 좋으냐”면서 비로소 전에 아들이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혼내고 심하게 반대했던 것을 사과하기도 했다.
6. 그간, 써 오신 작품들이 총 얼마나 되는지요?
6-1. 시부터, 소설, 수필까지...많은 작품들을 집필 해 오셨는데요. 작가님의 대표작을 한 번 꼽아보신다면요?
-인연설
6-2. 짤막하게, 낭독 부탁드려도 될까요?
7. 이번에, 흑구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이 문학상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7-1. 특정장르만이 아니라, 여러 문학장르를 아우르면서, 시대를 이야기 해왔던 점에서 한흑구 선생님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 포항에는 한 번 와보셨는지요? 어떠셨나요?
-비가오는 굳은 날씨에도 한국문인협회 성기조박사외 40여명 과 경주,포항,울산,영천 문인20여명이 포항을 방문하였다.
이번 방문은 포항에서 열리는 '제4회 포은문화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포은선생의 고향을 방문하고자 '포은문학기행'으로 이름하여 포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성기조박사외 일행들은 도착하여 먼저 '포항물회'로 점식식사를 하고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역사관을 둘러보고 포은선생의 위폐가 모셔진 오천서원과 천년고찰 오어사를 방문하였다.
9. 우리나라의 문학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계신데요. 후학을 위해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걸로 알구 있습니다...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신가요?
10. 앞으로의 계획 듣고 마무리 할까 합니다.
<참고자료1>
성기조 수필가 '흑구문학상' 수상
30여년간 수많은 작품으로 문단에 기여
제 3회 흑구(黑鷗)문학상에 성기조(사진) 수필가겸 시인이 선정됐다.
흑구문학상운영위원회(회장 서상은)는 17일 포항에서 흑구문학상제정운영위원회(위원장 김규련)를 열고 심사위원 8명 만장일치로 성기조 수필가를 제 3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소목(小木)김규련 수필가는 이번 수상자 선정 기준에 대해 수필이 문단에 끼친 공헌도, 작품의 질과 량(量), 작가의 인품에 대해 심사위원들과 심의를 했으며 성기조 수필가는 위 세 가지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필의 질과 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작품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또 한국문단에서 친일하지 않은 세 사람 중 한흑구선생이 포함된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조를 지킨 흑구문학상인만큼 만큼 순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 인품이 비천하지 않은 사람이 타야 한다"고 밝혔다.
흑구(黑鷗)문학상 제 1회 수상자는 소목 김규련, 제 2회 수상자는 윤재천 수필가가 수상했다. 때문에 3회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전국 각 문단에서 많은 신청자가 몰려 흑구문학상의 권위를 새삼 실감나게 했다.
성기조 수필가는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연필로 쓴 인생', '살어리 살어리랏다', '이길것두 질 것두 읎는 세상 얘기', '흰소리 잦힌소리','사랑이 바람처럼 날리어', '문단기행 1,2', '미운 얼굴 고운 말', '풍진 세상을 사는 지혜', '마음을 구름에 묻고', '삶과 예술적 희망', '예술이 꽃이되는 세상', '문화와 혁명', '문학적 삶 속에서', 그리고 지난 해 12월 '성기조 수필전집'을 펴냈다.
한편 흑구문학상제정위원회는 흑구문학관을 완성한 후 구룡포 해변에 문학공원을 조성한 후 문단 대표 작가들의 문학비를 세우기로 했다.
<참고자료2>
감성 심어준 문학적 고향 ‘예산’ 창작의 나래
고향으로 가는 길엔 /하늘이 높고 /흰구름이 피어 올랐다//
흰구름 그 뒤엔/ 남댕이 푸른 바닷가/ 널렸고//
간월도 건너/안면도 소나무가/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보리 누름에/ 살랑이는 바람은/ 짙은 고향 냄새를 날리고//
느르실 논두렁엔/ 개구리도 울었다//
서낭당 고개 넘어/배나무골은 오리/갈미 장터 가는 길엔/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인정이 구수하기/고구마 같은데/콩서리 모닥불에 입술도 검고//
고향으로 가는 길엔/피어 오른 구름처럼/마음이 부풀었다// -고향가는 길 전문
“고향은 언제나 편안함과 함께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안겨주는 곳입니다.”
산수(傘壽)를 앞둔 시인에게서 열정이 묻어난다.
등단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청하 성기조(77)시인이다.
1958년 시와 시론에 시 ‘꽃 ’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시인은 그동안 작가이자 교수로, 문단의 중요 정책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보였다.
중앙 무대에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그지만 고향은 언제나 활동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시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보낸 ‘예산’이 감성을 형성하고 추억을 만들어 준 문학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대표작 ‘고향가는 길’이나 ‘덕산집에서’를 비롯해 가야산과 금오산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샛바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장편 소설을 통해서는 해방 후 6.25 전쟁 발발까지 예산을 무대로 한 주인공의 험난한 삶을 그리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제 예산 지역 곳곳의 모습은 사실감을 부여했다.
이는 그가 예산에서 성장하면서 경험한 일들이 바탕이 됐다.
지금도 주말이면 덕산에 있는 작업실에서 글을 쓴다는 그는 예산에 대한 각별함을 보였다.
“텔레비전이나 심지어 라디오조차 없지만 덕산에 있는 작업실에만 가면 글이 술술 쓰여 밤에 작업을 시작했다가 새벽이 되기 일쑤지요”라고 말한다.
그간 수많은 작품을 내놓은 시인이 꼽는 자신의 대표작은 ‘인연설’이다.
어둠이 밀려올 때/눈이 사락사락 내릴 때/바람이 불어올 때/매서운 추위가 몰려올 때
목화같은 다사로움으로/바위 같은 침묵으로/풀꽃같은 향기로/무르익은 과육으로
개화하는 꽃잎의 부드러운 /눈짓으로/눈 오는 밤 당신이/내게 들려주는/사랑의 말씀//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 모두가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언제나 사랑이 묻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선을 담고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우리 생활 주변의 평범한 일상과 사물에서 이끌어내는 희망이 담겨있다.
예산에 세워진 시비 속 ‘고향’이라는 시도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50년대 호서문학회 활동에서 시작된다. 호서문학회는 1951년 정훈과 박용래, 한성기, 권선근, 홍성규 등이 중심으로 만들어진 충청 최고(最古)의 전통을 가진 문학회로, 본격적인 활동은 1955년부터 시작됐다.
이후 그는 ‘수필시대’, ‘문예운동’ 등 두가지 문예지를 발행하면서 활동을 더욱 굳건히 했다.
계간으로 발행되는 문예운동의 경우 지난 2008년에 수령 50년, 지령 100호 발간이라는 기록을 낳았다.
1958년 4월 20일 안양의 ‘시와 시론 동인회’에서 국판 90쪽 안팎의 동인지로 처음 창간된 책(인간사 발행)이 시와 시론의 효시였고, 이 책이 1998년에 계간 문예운동으로 제명을 바꾸어 2008년 겨울호로 100호를 발간한 것.
문예운동이 계간지 임을 감안할 때 100호의 의미는 놀랍다고 하겠다.
창간 동인으로는 김관식,박거영,이성교 등이 함께 했다.
당시 창간사를 통해 성기조 시인은 “이번에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사람이 모여서 시와 시론이라 이름하고 시지를 내게 되는 이유는 가치 있는 문학 활동 중 특히 시에 있어서 넓은 이론과 고도한 창작으로 봉사하고 광정하기를 인식함에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같은 행보는 한국문인협회 명예이사장과 한국문화진흥재단 이사장, 한구펜클럽본부 회장 등 그가 맡아온 굵직한 직책들에서도 알 수 있다.
후진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의 호 청하(靑荷)를 딴 청하문고를 조성한 것이 대표적.
청하문고는 그가 교원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마감하면서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예산캠퍼스)에 기증한 장서 1만 7000여권으로 구성됐다.
논문과 문집 1188권을 비롯, 철학·종교서적 406권, 사회과학서적 598권, 어·문학 관련 도서 1만1686권, 역사서적 342권, 외국서적 1326권 등 자신이 평생을 소장해 온 장서들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교원대에서도 장서를 기증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고향의 후배들과 지역 대학 교육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소장 도서를 기증하게 됐지요 ”라며 “이 중에는 희귀본도 상당수 있어 기증자로서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해마다 예산에서 청하 전국청소년백일장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최근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아울러 예술 교류 활동과 예술인의 복지를 위한 노력의 끈도 놓지 않고 있다.
“예술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고 문학 활동은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는 일을 해야한다”고 늘 강조하는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조 있는 문학 활동을 전개해 줄 것”을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그같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힘주어 말한다.
<참고자료3>
한흑구
본명은 세광(世光). 시·소설·수필·평론은 물론 미국문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문학가이다. 대표 수필 〈보리〉에서 처럼, 시적 구성의 아름다움과 생명과 인생에 대한 관조가 돋보이는 수필로 한국 수필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미국으로 망명한 아버지 한승곤의 영향으로 1929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템플대학교 신문학과를 수료하였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홍콩에서 발간되는 〈대한민보 大韓民報〉와 국내 문예지 〈동광〉지 등에 수필 〈젊은 시절〉과 〈북미대륙 방랑시편〉 등 여러 편의 시와, 〈호텔콘〉·〈어떤 젊은 예술가〉·〈사형제〉 등의 소설·평론을 발표하며 필명을 알렸다. 1934년 평양으로 돌아와 전영택과 함께 월간지〈대평양 大平壤〉과 문예지 〈백광〉의 창간을 주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39년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었으며, 이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도 친일문학에 손을 대지 않아 식민지 치하의 문학가로서 일제 35년 동안 친일문학에 관계하지 않은 문인 12명 중 1명으로 꼽힌다. 1945년 월남한 이후에는 수필문학 창작에 주력했고 1948년 포항에 정착했다. 1958~74년까지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의 시는 직선적이고 남성적이며 민족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소설은 미국 대공황의 후유증과 인종차별 문제, 한국 고학생들의 비애 등 당시 문단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독특한 소재를 담아냈다. 흑인시도 많이 번역했으며 〈최근의 미국문단〉(1947)·〈이마지스트의 시운동〉(1948)·〈흑인문학의 지위〉(1948)·〈윌터흿트맨론(論)〉(1950) 등 미국문학 및 작가론도 발표하였다.
대표 수필 〈보리〉 외에 〈하늘〉·〈바다〉·〈사랑〉·〈눈〉·〈노년〉·〈갈매기〉·〈흙〉 등의 작품이 있고, 저서에 〈현대미국시선 現代美國詩選〉(1949), 수필집 〈동해산문〉(1971)·〈인생산문〉(1974)이 있다. 〈가을 소식〉·〈파도〉·〈옥수수〉등 1978년에 집필한 수필 3편이 발굴되었고,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쓴 시 40편, 단편소설 14편, 장편소설 1편, 평론 8편 등을 묶어 〈한흑구 문학선집〉이 출간됐다. 1983년 포항 내연산 보경사에 〈보리〉가 새겨진 한흑구문학비가 세워졌고,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09년에는 〈흑구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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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산 선생님께서 두번을 소개해 주시니
볼일 없는 이몸도 두번의 댓글을 달아 드립니다~~
아니 세번째 댓글인 것도 같군요~~
성기조 박사남의 '고향 가는길'도 너무 훌륭합니다~~
길가다 펼쳐진 풍경을
읽는 독자들 누구라도
자기의 고향인양 착각을 일으킵니다~~
이 것이 성기조 시인님의 시어입니다~~
너무 좋은 소식과 훌륭한 글을 소개해 주시어
떠블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