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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글판 2026년 봄편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2026년 봄날이 간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이제서야 광화문글판 2006년 봄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번 봄편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한 글자 사전>의 산문 '봄'에서 발췌했다. 산문 '봄'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을 부주제로 달고 있다. 시인은 생명이 약동하여 온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봄날의 풍경을 기적이라 보고 있다. 그 기적을 풀어 쓴 글이 산문 '봄'이다.
광화문글판 2020년 겨울편은 김종삼(金宗三, 1921~1984) 시인의 '어부'에서 발췌한 문구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이 구절은 평범한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며, 그 삶이 내일을 살아갈 기적을 만드는 힘의 원천임을 노래한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김종삼의 '어부(漁夫)' 전문. 소박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노래한 '어부'는 감동이 컸었다. 이 시의 기적과 달리 김소연(金素延, 1967~ ) 시인은 이 기적을 구체적인 봄의 일상 풍경 속에서 하나하나 열거 묘사하여 또다른 맛갈스러움을 준다.
"겨우내 조용하던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봄이 과연 왔나 보다 한다. 아이들은 가장 먼저 봄을 알아채고 골목에 나와서 몰려다니며 소리를 지른다. 놀이의 법칙을 발명해나가면서 티격태격하다 깔깔대고 소리치며 뛰어다닌다.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도 좀 끼워줄래 하며 나가보고 싶어진다. 어릴 때는 아이들이 노는 골목길가에서 애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애들이 심각하면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오래 앉아 있다가 슬며시 끼어들어 함께 놀았다. 애기똥풀을 꺾어 줄기 속에 든 즙을 짜내어 혀끝에 갖다 대본다거나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가지를 꺾어 호드기를 만들어 피리처럼 불었다. 새로 이사를 온 친구가 나처럼 그렇게 배시시 웃으며 구경을 하고 있으면 틈을 열어 끼워주며 골목을 쏘다녔다.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그게 궁금해서 알아보고 싶은데 아직 봄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선지 동네 놀이터에도 골목에도 아이들이 없다.
학교에 다니고서의 봄은 언제나 새 공책에 내 이름을 쓰는 시간이었다. 달력을 뒤집은 흰 면을 교과서에 입히고 새 연필 꼭대기에다 이름을 적은 견출지를 감아두는 시간. 새 공책에 새 글씨를 깔끔하게 채우고 싶어 책받침을 새로 사고, 과일 향 나는 지우개도 새로 샀다. 이 새 물건이 주는 새 기분은 새 학년을 꽤나 성실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선물했다. 오래가진 않았지만 포부가 커지는 맛이 있었다. 잘 모르는 담임을 쳐다보며 잘 모르는 반 친구들 속에 파묻혀 호기심 가득한 상기된 얼굴로 교실 속에 앉아 있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지만, 늘 이맘때면 허리도 꼿꼿이 펴고 앉고 책상 서랍 속에 교과서도 가지런히 넣어두곤 했다. 봄은 새 학년의 새 출발을 부려놓고 가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새봄엔 새 옷이 필요했다. 언제나 검정 아니면 잿빛, 그것도 아니면 누렇거나 푸른 옷이 전부였던 나에게 노랑이나 분홍, 혹은 빨강이나 연두 같은 옷이 필요했다. 이미 봄날의 내 얼굴은 연두거나 분홍이었을 텐데, 그땐 그걸 몰랐다. 그땐 다만 화단에 앞다투며 피는 꽃들의 화사함을 흉내 내려 했거나 친구들의 옷 색깔에 파묻히기는 싫었거나 했을 것이다. 두꺼운 겨울 외투를 옷 정리함에 넣어두고서 봄옷을 꺼내어 옷장에 걸면, 여태까지 잘도 입었던 옷이 어쩐지 추레해 보이기만 했다. 면으로 된 운동화를 꺼내어 신고 발목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천으로 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외출을 했다. 그래봐야 도서관이나 술집을 찾아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게 전부였지만, 고운 햇살이 창 안에 흥건하게 고이는 버스에 앉아 고갯방아를 찧으며 꾸벅꾸벅 조는 일이 전부였겠지만, 그땐 내가 꽃이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봄이 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칙칙한 베일을 벗긴 듯 화사해진 날씨와 피고 지는 꽃들에 조금쯤 주눅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꽃을 보면 예쁘다고 감탄하기도 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꽃은 너무 화려했고 나는 너무 권태로웠다. 꽃길을 걸으며 뺨에 홍조를 띤 소녀들의 깔깔거림을 훔쳐보며 '좋은 시절이네' 하다 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패기가 사라진 내 그림자. 아무리 따뜻한 봄날이어도 겨울의 끝을 문고리 붙잡듯 붙잡고 있는 내 그림자. 그때는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이 좋았다. 비로소 지훈의 시구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피는 꽃으로부터 느끼던 소외감을 억척스럽게 갈무리하고 있다가, 꽃이 지기 시작할 무렵엔 저절로 혼신을 다해 울적해했다. 분분히 지는 꽃을 바라보며 청춘이 지고 있음을 실감할 때 느껴지던 그 비감이 생각해 보면 참 좋았다. 그 이상한 서러움에 밀려 꽃 이야기를 시에다 가장 많이 부려놓은시절이기도 했다.
올해는 삼월이 시작되자마자 장례식장을 많이 다녔다.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혹독한 겨울을 겨우 버티다가 끝내 꽃이 피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검은 상복을 입고 상주가 된 친구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며 둘러앉아 붉은 육개장을 먹었다. 노인들을 저세상으로 가장 많이 데려가는 삼월. 매화가 피기도 전에 노인들이 표표히 이승을 떠나버리는 삼월. 겨울인지 봄인지 알 수가 없는 괴이한 삼월. 겨울보다 추위가 더 삼엄해져 찬 바람이 발목과 슬개골과 목덜미에 스산하게 감기는 삼월. 몇 번이나 세탁소에 겨울 외투를 맡겼다가 다시 꺼내어 입은 올해의 삼월.
우리 동네 골목엔 간신히 핀 목련이 질 준비를 하고 벚꽃이 갓 피기 시작했다. 올해는 유독 꽃 개화기를 표시한 지도를 인터넷에서 뒤졌고, 카메라를 들고 꽃을 찾아 기웃거렸 다. 사람들은 아직도 패딩점퍼 차림이지만 꽃은 천천히 북상하고 있다.
한 친구는 봄나물을 정성스레 무쳐서 식사에 초대했고, 한 친구는 곰취 장아찌를 담가 보내주었고, 나는 시장에 나가 달래와 냉이와 쑥을 사와서 된장국을 끓였다. 아직도 추울 뿐이지만, 봄이 짧아져서 언젠간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봄' 이라는 발음을 입밖으로 자꾸 내어 따스함을 보태본다. 봄은 그냥 봄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기적 중 하나니까." - 김소연(金素延, 1967~ )의 '봄' 전문
아래에 광화문글판 2026년 봄편과 관련하여 '교보생명 뉴스룸' 사이트에 실린 두 편의 글을 옮겨온다.
◆2026 광화문글판 봄편, 김소연 시인 <한 글자 사전> ‘늦추위 이겨낸 새 봄의 기적’ ●늦추위 끝 반가운 봄 인사 전한 광화문글판 봄편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한 글자 사전>에서 발췌 ●새 생명이 자라나는 봄, 기적은 늘 우리의 곁에 있다는 메시지
이번 겨울은 늦추위가 참 유난스러웠죠? 그래서인지 따뜻한 봄 날씨와 함께 찾아 온 이번 광화문글판 봄편이 유달리 반갑게 느껴집니다. 봄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은 양 이번 문안에는 ‘기적’이 담겼습니다. 겨울이 제 아무리 춥더라도 봄이 오면 날이 풀리고, 꽃이 피고 새 생명이 자라나는 것처럼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를 전합니다. 문안은 짧고도 강렬합니다.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단, 11자에 그친 글귀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문안이 실린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은 총 310개의 ‘한 글자’를 시적으로 풀어낸 산문집입니다. 2008년에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산문집 <마음사전>의 출간 10년을 기념해 선보인 작품으로, 작가의 풍성한 시적 감수성과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안을 표현한 이색적인 글판의 디자인도 돋보이는데요. 우리나라 고유의 민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독특한 화풍이 시선을 잡아 끕니다. 봄의 생기와 활기를 닮은 초록 색채의 배경과 자유롭게 뻗은 나무 줄기에 꽃, 새, 구름 등 봄의 생명체들로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었는데요.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봉오리를 피워낸 꽃, 저마다의 목소리로 새 봄을 노래하는 새들은 모두 푸르른 숲 사이에서 추위를 견디고 나온 생명체들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 속에 깃들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 민화풍의 컨셉은 최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바로,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와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 열풍 덕분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도 친숙한 이미지가 광화문글판에 등장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1991년부터 36년간 광화문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온 광화문글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번 광화문글판 봄편이 새봄을 맞이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적 같은 일상의 소중함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곁에 있는 기적! 2026 광화문글판 봄편, 김소연 시인 인터뷰 ●광화문글판 2026 봄편 문안의 주인공, 김소연 시인을 만나다 ●기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 김소연 시인 <한 글자 사전> ●김소연 시인이 생각하는 광화문글판과 문학 이야기
따뜻한 봄기운과 함께, 2026 광화문글판 봄편이 광화문을 찾는 시민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 봄편 문안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한 글자 사전>에서 발췌한 문장인데요.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불과 11자의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도 끝내 봄에 자리를 내어주듯, 기적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김소연 시인은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이후 <극에 달하다>에서부터 <촉진하는 밤>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집을 펴내며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2010년 제10회 노작문학상, 2011년 제57회 현대문학상 시부문, 2024년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죠. 교보생명이 그런 김소연 시인을 서면으로 만났습니다. 2026 광화문글판 봄편 문안에 담긴 의미부터 시를 대하는 그의 생각까지, 지금 함께 들어보시죠.
Q.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시를 쓰며 살고 있는 김소연입니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저에겐 이 세계의 입구를 더 넓게 만드는 즐거운 노동과 같습니다. 때로는 미처 몰랐던 문을 새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Q. 2026 광화문글판 봄편의 주인공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감사한 일이죠. 광화문글판 덕분에 잊고 지내던 지인들로부터 인증샷을 더러 받았네요(웃음). 봄이 왔다는 설렘이 한껏 담긴 안부 인사였는데, 이 문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봄의 안부로 오가는 걸 보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Q. 봄편 문안인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은 어떻게 쓰게 된 문장인가요? 계절변화에 대해 늘 무엇으로든 적어두는 편입니다. 씨앗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힘, 새순이 딱딱한 가지 끝에서 돋아나는 힘 같은 걸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늘 궁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기적이라 불러도 되겠다 싶었어요. 기적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다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시인님의 여러 시 중, 혹시 봄에 어울리는 또 다른 시가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에 수록된 ‘연두가 되는 고통’이라는 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어린 조카가 자그마한 손으로 연둣빛 잎사귀를 가리키며 제게 질문하던 순간을 쓴 시예요.
Q. 스스로를 어떤 시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시인님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젊은 날, 아주 약한 존재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약함 옆에 존재하기 위해 기꺼이 약해지는 것, 저는 그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Q. 역대 광화문글판 문안 중 가장 좋아하는 문안이 있다면요? 유희경 시인의 ‘대화’라는 시를 무척 좋아해요.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다 뒤를 돌아보니 광화문글판에서 이 시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커피잔을 씻는 화자가 등장하는 시인데, 마침 유희경 시인이 직접 운영하는 위트앤시니컬 서점의 작은 개수대에서 제가 마신 커피잔을 씻었던 기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Q. 광화문글판을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다면요? 광화문을 오가며 사람들이 자신의 입술을 움직여 한 번쯤 읊게 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계절감을 넘어 역사적인 아픔과 기쁨, 우리가 오래 함께 기억해야 할 것들을 담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Q. 앞으로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약속을 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약속을 지킨 줄도 모르는 사람 그리고 약속을 또 건네는 사람. 시는 언어로 구성된 창작물이기 때문에 언어가 무엇일까 늘 고민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취약함의 편에 서는 일이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밀려난 소중한 가치들을 건사하는 일이에요. 숱한 예외들을 챙겨 표현함으로써 사회적 맥락 안쪽에 기입해 넣는 일이기도 하고요. 시는 오랜 세월 그 약속을 이 세계에 해왔습니다. 저는 그걸 잊지 않고 싶습니다.
-교보생명 뉴스룸 https://news.kyobo.com/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서
2025 광화문광장 시(詩) 공모전 동시부문 대상 고보경의 '광화문과 나' 게시판이 광화문광장에 세워져 있다. "흩날리는 바람 사이로/ 역사가 흐른다// 과거와/ 지금이 이어지는 문// 왕들의 발자국 위로/ 나의 발자국이 겹친다// 과거와 지금이 만나/ 아름다운 광화문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 광화문 앞에 서면/ 나는 역사를 만난다"
한 글자로 가늠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생의 감촉
시인.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집 읽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다가, 순도 100퍼센트 내 마음에 드는 시는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했던 도서관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쁜 걸음들 속에서 혼자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혼자가 아닌 곳에 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에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보다 내 마음에 드는 시를 꼭 쓰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는다. 소망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내겐 심심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심심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 조금 더 심심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지기 위하여, 오직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시집『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눈물이라는 뼈』『수학자의 아침』『i에게』『촉진하는 밤』과 산문집『마음 사전』『시옷의 세계』『나를 뺀 세상의 전부』『사랑에는 사랑이 없다』『그 좋았던 시간에』『어금니 깨물기』『생활체육과 시』를 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떤 사전으로 남을 수 있을까 : 이『한 글자 사전』이 『마음사전』의 열 살 터울 자매가 되어주면 좋겠다. 자매 둘이서 무릎을 모으고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방바닥은 이제 막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담요 한 장을 나누어 덮고 있다. 언니가 귤 하나를 까서 동생에게 내민다. 작은 방 안엔 두 자매가 내뱉은 한숨과 웃음과 고백 들이 연기처럼 가득 차 있다. 귤 향기와 함께. 둘은 어느 때보다 솔직하다. 속 얘기를 하염없이 꺼내놓는다. 때론 깔깔대며, 때론 어깨를 서로 다독여주며. 『마음사전』이 10년 동안 누군가에게 이 장면에 가까운 자매애를 선물해왔기를 감히 기대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실은 당신이 이야기를 하고 싶게 하는 작용이 되기를. 둘 사이에 이야기가 쌓여가기를. 속 깊은 자매애에 소용되기를. 『마음사전』을 쓸 때도 그랬지만, 부디 『한 글자 사전』도 읽는 이가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를 수 있기를. - '책머리에' 글 일부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 실린 산문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서울=국제뉴스) 이상배 기자 = 이번 광화문글판 봄편 문안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한 글자 사전>에서 발췌했다. 김소연 시인은 1993년 '현대시사상' 겨울호에 시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는 흔히 아는 단어의 의미를 시를 쓰듯 새롭게 정의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 '다행한 일들' 외 4편으로 제10회 노작문학상을,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등 7편으로 제5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문안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새 생명이 다시 자라나는 것을 보며, 기적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걸 환기해 준다. 또 봄을 계기로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디자인은 전통 민화를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눈길을 끈다. 생기가 넘치는 봄에 맞춘 초록색 배경과 힘차게 뻗은 나무 줄기, 꽃과 새 등 계절을 알리는 생명체를 독특하게 담아 냈다.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공간인 광화문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알리고 K-컬처 확산에 힘을 보탠다는 의미도 있다.
특히 이번 광화문글판 봄편 문안은 시민의 추천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더한다. 시민 추천이 문안이 내걸린 것은 이번이 8번째다. 교보생명은 매 계절 광화문글판 문안 선정을 위한 시민 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이 직접 쓰거나 추천한 글귀가 매번 수 천여 편 접수된다. 교보생명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는 시민 공모작과 문안선정위원 추천작 등을 놓고 치열한 토론, 투표를 거쳐 문안을 선정한다. 교보생명은 2000년 12월 시민과 더 많이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다. 문안선정위는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들과 교수, 언론인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표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문안선정위원으로 4년간 활동한 바 있다. 이번 문안을 추천한 이주헌 씨는 "익숙해서 놓치고 있었던 기적이 우리 주변에 매우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며 "광화문글판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숨 고르는 여유를 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