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1
태종 이방원은 권력의 화신이었나?
조국이 불러낸 피 끓는 사나이
 |
|
▲ 헌릉. 서울 내곡동에 있으며 태종 이방원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
|
ⓒ 이정근 |
|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고 세종대왕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을 이야기할 때 태종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600여전 전. 고려가 패망하고 신생국 조선이 태어나던 혼란기에 등장하여 걸출한 족적을 남긴 태종 이방원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성리학의 신선함에 매료되어 학문을 닦던 학동.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문과에 과거급제 한 소년. 전리정랑이라는 말단 관직에 입사하여 청운의 꿈을 펼치던 선비.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열린 눈을 가지고 있던 청년. 그를 그의 조국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치가 그를 부른 것이다. 권력투쟁이 피 끓는 스물한 살 사나이를 끌어들인 것이다.
흔히들 태종은 잔혹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의 화신이라 한다.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피바람을 일으키며 쟁취한 그 권력을 누구를 위하여 어디에 썼느냐가 중요하다.
당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이방원은 세계관에서 일치한다. 북방영토회복이다. 고토회복은 만백성의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갈린다. 정도전은 선정벌 후입국이고 이방원은 선입국 후 영토확장이었다. 물과 기름이다. 의중을 파악한 두 사람은 피 튀기는 투쟁에 돌입한다. 힘이 있어야 꿈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피 튀기는 투쟁을 벌였던 이방원 원나라가 패퇴하고 명나라가 대륙의 맹주로 부상하던 그 때. 요동은 무주공산이었다. 원나라를 무섭게 몰아붙이던 명나라에게 변방 요동은 안중에 없었다. 정도전의 선정벌이 성공할 수 있는 힘의 공백기였다. 몇 년 전 난공불락 요동성을 공략하여 정벌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점령할 여력이 없어 철군했다.
그 당시 대륙에는 무서운 기세로 용트림하던 신흥강국 명나라가 있었다. 태풍도 생성기와 소멸기가 있듯이 한 나라도 융성기와 쇠퇴기가 있다.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붙여 패망시키고 대륙의 맹주가 된 영락제는 이슬람계 환관출신 정화에게 5만 병력과 최신예 함대를 지휘케 하여 서남아시아를 정벌하는 등 이방인 정복에 나섰다.
우리가 요동정벌을 논하던 그때 명나라는 외적으로 원나라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내적으로 형제 조카가 뒤엉켜 내전을 겪고 있었다. 힘의 공백기를 틈타 요동정벌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가정해보는 것은 자유다. 정벌에 성공한다 해도 그 다음이 문제다. 신생국 조선은 요동을 점령 유지할 힘의 여력이 없었다.
그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에는 33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준비된 군사 대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륙을 통일하고 욱일승천 하던 명나라와 맞붙어 대 조선은커녕 명나라 령 조선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 또한 역사의 가정이다.
역사의 가정은 자유다, 모든 백성은 배심원이다 ‘피를 묻히며 쟁취한 권력으로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북방영토 확장에 나서자’ 이방원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시점은 그가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방원은 대륙의 정복자 영락제(당시 연왕)를 면담한 일이 있다. 사람을 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그는 그때 이미 영락제의 정복자로서의 정복욕을 읽었다.
세자 양녕을 폐하면서까지 세종을 등극시키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정사를 돌보던 태종 이방원은 권력의 탐욕이 남아서 일까?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된 조선왕국이 518년 26대왕까지 이어져 올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기 위하여 골육상쟁을 벌이고 외척을 척살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그를 심판할 때, 모든 백성은 배심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청년시절 가슴에 품었던 고토회복은 그의 유지를 받든 세종 때 일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통칭되던 함경도와 평안도를 북방 민족으로부터 평정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선으로 구획 지어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한반도를 뒤흔든 대륙의 지각변동, 과거에서 오늘을 읽다 14세기 말 대륙이 흔들렸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던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가 패망하고 신흥강국 명나라가 대륙의 맹주로 떠올랐다. 지리적 특성상 피해 갈수 없는 지각파가 한반도를 흔들었다. 지도자와 지식인 사이에 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친원 세력과 떠오르는 세력을 맞이하려는 친명세력으로 분열되었다. 600여 년이 흐른 현대도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러한 혼란기에 이방원이 가는 길은 파란만장 바로 그것이었다. 배신과 음모, 권력투쟁이 너울대던 그 시절 그의 족적은 나라의 괘적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다. 해양세력이 쇠퇴하고 대륙세가 부상하는 이때, 선이 굵은 사나이 이방원이 활약했던 역사의 현장 속으로 독자여러분과 함께 들어가 보기로 한다.
신생국 조선임금 이성계의 고민
경천사 석탑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임금님
장풍득수의 천하명당 개경
송악산은 개경의 상징이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일명 숭산(崧山)과 신숭(神崇)이라 불리는 송악산은 백두산에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산의 정기가 마식령산맥을 넘으며 성거산과 정분을 나누다 천마산을 낳고 오관산을 품어 송악을 낳으니 이곳이 개경이다.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서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과 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형국이다. 장풍득수란 물을 얻어 바람을 잘 갈무리한다는 뜻이니 천하의 명당이다.
이렇게 좋은 터에 자리 잡은 개경이 손안에 든 바람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바람을 맞아 바람 잘 날 없으니 지력의 쇠함일까? 외성(나성)과 내성, 그리고 황성과 궁성 등 4중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하늘의 기운이 다함일까?
개경이 바람을 맞아도 큰 바람을 맞았다. 보통 바람이 아니라 대형 태풍급 바람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475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던 왕(王)씨 왕조가 무너졌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람을 맞아도 원상회복이 어려운데 천지조화를 받은 바람을 맞았으니 개경은 망가지는 일만 남았다.
수창궁에 들어앉은 이성계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정도전이 신생국을 설계하고 왕자와 개국공신 그리고 그 자제들이 왕륜동에 모여 충성을 맹세해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 유민과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라진 고려 왕조에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의 질시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모반 사건에 연루된 이첨을 합포로 귀양 보내고 반 혁명사건 관련자 왕화, 왕거, 김가행을 참수형에 처하자 개경 백성들의 저항이 더욱 거칠어졌다. 예정된 수순대로 공양군 삼부자를 삼척으로 유배 보낸 후 교살시키자 개경이 들끓었다. 돌파구는 있었다. 천도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다. 고려의 사직과 종묘가 있는 개경을 이성계는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백성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개경을 떠나자
 |
▲ 국보86호 경천사 10층 석탑. 구한말 일본인 다나까 미쓰아끼가 불법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였다가 반환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세워져 있다. |
|
|
한양과 계룡산을 후보지에 올려놓고 검토하면서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을 흔들어 놓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치렀다. 새 왕조가 마음을 열고 포용하는 의미에서 자격조건을 대폭 낮췄다. 초시를 생략하고 복시와 전시로 직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고려 유생들이 과거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피 묻은 손을 씻기 위하여 이성계는 사찰을 자주 찾았다. 현비 강씨는 잠저시절부터 자주 찾던 집근처 연복사를 좋아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즐겨 찾았다. 현비는 연복사에 5층 석탑을 시주 공양하며 자신이 낳은 방번과 방석의 무병장수를 빌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찾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머리를 식히고 자기 충전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병을 핑계 삼아 한동안 기거하기도 했으며 수창궁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천사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왠지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웅전 앞에 우뚝 솟아있는 10층 석탑을 바라보노라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쩜 오늘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경천사 경내를 산책하던 이성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0층 석탑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듯이 자신을 억누르는 중압감은 명나라였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다.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을 쳐부수며 지리산에 침투한 왜구를 소탕하던 장수는 한낱 조선의 무장일 뿐이었다.
이성계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에게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늘이었으며 천자가 있는 황제의 나라였다. 거역할 수 없는 대국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에서 호출령이 떨어진 것이다. '네가 우러러 본다는 황제에게 그 따위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고 너의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라'는 것이다.
명나라에 들어간 사은사 이염을 황제가 직접 매질하여 초죽음이 되어 보내고, 그래도 잘못했다고 황태자의 생신축하를 빌미삼아 사죄하러 들어가려는 조선의 천추절 사신을 요동에서 요동도사가 황제의 명이라며 아예 돌려보내는 명나라의 행태는 도를 벗어났다. 행패에 가까운 명나라의 태도는 조선에게 굴욕을 요구했다.
약소국 조선을 업신여기는 명나라의 행패는 도를 넘어가고 학자는 논한다. "고비사막을 넘나들며 원나라와 격전을 치르느라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명나라를 상대로 원나라와 연합하여 요동을 정벌했으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고.
학자는 논한다. "오진도에 따른 군사연습은 전술일 뿐, 대명 전쟁에 대한 전략과 전쟁계획이 조선에게 있었느냐?"고.
명나라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표적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은 정도전을 동이화원(東夷禍源)이라 지목해두고 있었다. 즉 정도전이 조선문제의 화의근원이고 걸림돌 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한족 특유의 근성대로 드러내놓고 요구하지 않았다. 변죽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는 이성계는 혁명동지 정도전을 사지에 보낼 수 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
▲ 왕의 자리. 이성계는 신생국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지만 명나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
|
명나라 조정에서는 정도전이 주장하는 요동정벌이 실현 불가능한 국내용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암중모색중인 이성계의 아들들과 개국공신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정도전의 책략이라는 것이다. 대의명분으로 요동정벌을 내걸고 진행한 오진도에 의한 군사훈련과 사병혁파는 이방원을 향한 칼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로서는 차제에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조선을 최대한 압박하여 한반도에 묶어 두려는 전략이었다.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이 국내용이든 국외용이든 소국이 대국을 넘본다는 것은 무엄한 일이요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설혹 그것이 정도전의 외교적인 실수라 하더라도 묵과할 수 없는 신흥강국 명나라의 오만이었다.
포스트 이성계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의 국제전략
이런 기회에 조선을 확실하게 손아귀에 넣고 명실상부한 사대 조공국 관계를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 명나라의 복안이었다. 이는 포스트 이성계와 왜국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의 국제 전략이었다. 이래야만 자국 해안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문제를 조선에 맡겨두고 자신들은 원나라를 상대로 한 통일전쟁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원나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여간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나라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입장에서 요동정도는 잠시 버려 둘 수 있지만 그것은 17세에 고아가 되어 혈혈단신 명나라를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 인물 명 태조 주원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나라에 사대하던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신생국이 명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이것을 어여삐 받아들인 명 황제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려주었지만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변방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취급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불안이고 이성계의 치욕이었다.
이성계는 사선을 넘나들며 전장을 누비고 무공을 쌓아 백성들의 명망을 얻었다. 목숨 걸고 혁명에 성공하여 일국의 왕으로 등극하여 임금노릇 하고 있다. 헌데 권지국사라니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이지만 대안이 없었다. 이것이 이성계를 짓누르는 난제였다. 명나라를 어떻게 넘어야 하나?
그렇다고 명나라가 점찍어 놓은 정도전을 덜컹 내줄 수 도 없었다.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낸다면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조선에서 보낸 사신을 매질하여 되돌려 보내는 주원장의 행태로 보아 불을 보듯 뻔했다. 목숨 걸고 혁명을 같이 한 동지를 사지로 내모는 꼴이었다.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어 인질이 되거나 처형된다면 혁명 동지들의 반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도전은 무장출신 이성계의 싱크탱크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의 선택의 폭을 좁게 하는 것은 정도전의 가치였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성취하는데 두뇌였으며 자신에게 없는 아이디어 창고였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둘도 없는 브레인이었다.
정도전은 개국과 함께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고 신생국 조선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개국 당시 즉위교서를 지었으며 혁명공약에 해당하는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발표한 것이 정도전이었다. 또한 요즘에는 조선 국채의 골격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매달려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으니 정도전이 없으면 혁명과업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명나라를 상대로 한 게임에서 정도전은 이성계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란 것이다. 섣불리 정도전을 내놓았다가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상황에 몰리면 이판사판 전쟁을 하던가 아니면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몰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경천사에서 돌아와 한 달이 다되었지만 뾰쪽한 답이 없었다. 명나라에서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라는 요구가 유효기간은 없었지만 금년을 넘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호미로 막아도 될 일이 가래로 막아야 할 큰 문제로 확대될 것만 같았다. 손을 꼽아 짚어봤다.
이성계에게는 아들이 7명이 있었다. 개국하기 1년 전 돌아간 한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다섯. 현비 강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아들 방우는 이숭인과 함께 고려국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다 아버지의 혁명의중을 파악하고 해주에 잠적하여 은둔생활하다 죽었다.
큰 아들을 대신하여 장남노릇을 하는 둘째아들 방과는 심약했다. 셋째 방의는 청년장교시절말단 군책을 맡아 전선을 떠돌다 보니 가르친 것이 없었고 넷째 방간은 성격이 괴팍했다. 강씨 소생 방번은 어렸고 그보다 어린 막내 방석은 세자로 있었다. 그렇다면 방원?
꼽아보니 이방원... 그러나 말을 꺼낼 엄두는 안나고
손가락을 짚어가던 이성계는 방원에서 멈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 찍어서 방원이 재목인데 명나라에 다녀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원은 고려 말 지식인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성리학을 공부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이색과 함께 고려국을 대표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 정도면 딱 인데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몽주를 격살하며 개국공신 특등인데 공신록에 올려 주지도 못했다. 혁명동지들의 여론이 비등한데도 나이어린 아내 현비 강씨의 눈물작전에 휘말려 막내아들 강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자신의 아들이라면 공이 있고 없고 가릴 것 없이 똑같이 받을 수 있는 당연직 정안군이라는 칭호 하나 붙여서 홀대하고 있으니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정도전의 견제에 밀려 직책하나 주지 못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팠다. 이러한 이방원에게 아무리 아들이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명나라에 다녀오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성계의 고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