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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경우를 꼽아보라면 이런 걸 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굉장히 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일을 나보다도 훨씬 더 잘하는 어떤 사람이 버티고 있는 거죠. 그 사람만 없었다면 내가 그 방면의 최고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텐데 워낙에 실력차가 크다 보니 결국엔 눈물을 머금고 물러날 수 밖에 없는 현실.
백제의 제 17대 임금인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백제가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시기였던 서기 371년에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킨 후로 양국은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만 될 형국에 처해 있었습니다. 특히 391년, 전략과 전술에 능통했던 고구려의 명군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한 이후부터, 백제는 더욱 강력해진 고구려군의 파상 공세를 견뎌내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면 광개토왕과 숙명적 대결을 펼쳐야 했던 아신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조에서는 그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신왕[혹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당시의 사관은 아신왕의 인물됨에 대하여 대단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날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는 묘사는 왕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거니와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여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라는 기록은 아신왕이 패기와 활력이 넘치는 강인한 군주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아신왕은 즉위 직후 고구려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삼국사기> 아신왕 2년(393년)조의 기사는 이러합니다.
“가을 8월, 왕이 진무(眞武)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과인은 이것을 애통해 하니 경은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중략)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성을 둘러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앞서 광개토왕은 백제 진사왕(辰斯王) 시기인 서기 391년, 석현성(경기도 개풍)과 관미성(파주) 등 10여성을 함락시켜 차지한 바 있었습니다. 이에 아신왕은 장인인 진무를 군 최고 사령관 격인 좌장(左將)으로 임명하여 탈취당한 영토를 탈환하도록 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무가 이끄는 백제군은 관미성에 전개되어 있던 고구려군의 철벽같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끝내 군량 문제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아신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어 왕 3년(394년)에 고구려의 수곡성(황해도 신계)을 다시 한번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구려군에게 패퇴하고 맙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은 대 고구려전에서의 연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군사 작전을 결행합니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談德, 광개토왕의 이름)이 직접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아군이 크게 패하였으니 전사자가 7천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 한강)을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와서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아신왕 4년조, 395년)
아신왕 4년, 기사의 내용처럼 왕의 명령을 받은 좌장 진무는 광개토왕이 통솔하는 고구려의 7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진무는 광개토왕의 뛰어난 전술에 말려들어 무려 7천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을 잃고 퇴각하게 됩니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이번에는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왕이 이끌었던 병력과 동일한) 7천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만 난데없는 추위와 큰 눈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게 됩니다. (일이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이 안 되는 수가 있죠.)
지금까지는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공세였습니다. 광개토왕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백제의 침공을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영락(永樂, 광개토왕의 연호) 6년 즉 서기 396년,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58개에 달하는 성(城)을 공취하는데, 이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개토)왕께서 크게 성내시어 아리수(阿利水, 한강)를 건너서 자객을 보내어 (백제의) 城을 핍박하고 ○○편국성을 가로질러 (공격)하니 잔(殘, 百殘을 일컫는 말로써 백제의 비칭) 임금이 지치고 고단하여 남녀 백성 1천인과 세포 1천필을 내어 바치고 왕에게 귀순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이 그들의 어리석은 허물을 은혜롭게 용서하시고 귀순하여온 정성을 기록하셨다. 이리하여 58개 城과 700여개의 촌락을 얻고 (百)殘의 王弟와 大臣 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이켜 환도하였다.”
백제는 이 전쟁으로 인해 실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광개토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에 의해 북쪽의 58개 성과 700여개의 촌락을 빼앗긴 것에 더하여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치욕스런 항복의 예를 올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남녀 1천인과 세포 1천필 등 사실상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하였으며 大臣 10인과 더불어 심지어 왕의 동생까지 고구려에 포로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백제는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천하에 예속된 국가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제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외교적 노력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계획합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신왕) 6년(397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아신왕이 왜국의 도움을 얻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도움이었을까요? 군사를 지원하는 것 즉 원병(援兵)을 통한 도움이었습니다. 물론 왜국이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백제의 원병 요청에 응해줄 리는 없었겠지요. 국가간의 외교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공짜가 없습니다. 당연히 왜국은 군사 원조에 대하여 문화, 경제적 반대 급부를 요구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이러한 반대 급부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태자 전지를 왜국에 ‘인질’로 보냈던 것이지요.
아신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왕 6년 7월, 한강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거행합니다. ‘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고구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각오하고 있어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어서 왕 7년(398년)에는 대 고구려 전에서 잇달아 패배한 진무 대신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임명합니다. 그 해 8월에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켜 북쪽 변경지역에까지 전진하지만 밤중에 큰 별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당시에는 군의 사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만한 사안이었습니다.) 철수하고 맙니다.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왜국에 대한 청병외교가 어떻게 되었나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문>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친하여 내통하였는데 (광개토)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가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地)를 파괴하고 노객(奴客, 신라왕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그 백성으로 삼으니 왕에게 와서 구원을 청하옵니다.’라고 하므로 太王은 은혜롭고 자비로워 그 충성을 칭찬하[였다.]
(영락) 10년(400년) 경자(更子)에 하교하여 기병과 보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서 신라성에 들어가니 倭가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군(官軍, 고구려군을 일컬음)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왜가 다시) 배반하므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잇달아 城을 함락시키니 성들이 곧 항복하여 귀순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399년 왜병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포위하자 신라의 내물이사금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듬 해인 서기 400년 보기(步騎) 5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던 왜병을 쳐서 궤멸시키고 아예 가야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서 여러 성들을 유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요청으로 파병된) 왜군은 왜 신라를 공격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검토해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동아시아는 크게 보아 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한 축과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한 축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신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이전에 자신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친 고구려 국가인 신라를 미리 압박해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내는 등 외교적 책략을 통해 왜병을 조종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광개토왕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의 정예군에게 왜병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초토화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는 와중에 백제의 사정은 매우 악화됩니다. <삼국사기> 아신왕 8년(399년)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쳤고 이 결과로 호구가 줄어들었다.”
전쟁이 없는 시기에도 군 생활은 고생스럽습니다. 하물며 여러 해에 걸친 전쟁, 그것도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머쥐지 못하고 패전만 거듭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군역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호구가 줄어들었다.’는 표현으로 봤을 때 당시의 백제 조정에 대한 민심 이반은 극히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몇 십명 줄어든 것 가지고 역사서에 구태여 그 사실을 써 놓았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꽤 많은 호구가 외국으로 도망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은 종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영락 14년(404년) 왜국의 수군이 대방(帶方)의 경계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대방의 경계’란 오늘날의 황해도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왜군 역시 백제의 사주를 받은 병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박들이 원해(遠海)를 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육지와 가까운 연안을 따라 배를 몰았기 때문입니다. 즉 왜병이 배를 타고 황해도 지역을 치려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의 연안을 거쳐 가야만 했는데 이곳은 백제의 영해이거나 아니면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백제 정부의 조종 또는 방조가 없었다면 왜군의 함선들이 해안선을 따라 황해도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죠. 물론 이 왜병들은 고구려군에 의해 박살이 나고 맙니다.
아신왕은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맞서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인 임금이었습니다. 군사를 키워보기도 하였고 외교를 통해서 적의 배후를 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책들은 하나같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삼국사기> 아신왕조의 인물평에도 나와 있듯이 이 같은 실패는 결코 그가 용렬하거나 유약한 군주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패배의 요인을 말해보자면,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던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로서는 너무나도 벅찬 상대와 겨룰 수밖에 없었고 또 그로 인해 패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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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감사... 그런데 제 생각엔 고구려 19대 왕께는 태왕 호칭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광개토 태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