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창수의 회사는 새로운 제품개발에 한창이다. 지점으로 개설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갖추어야 할 것 들이 많았다. 인력도 충분하지 않았고, 시스템도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창수는 이곳으로 오면서 한 계급 승진을 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실무자로서 위아래 사람들과 조화를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이젠 봄으로 접어드는 3월이 왔다. 바깥바람이 제법이나 시원하게 불어오고 멀리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도 이젠 제법 맑아 보인다.
그동안 선을 보았던 아가씨와는 두 번쯤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는 상태이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토요일 오후이다. 근무를 마친 창수는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을 하고 있다.
(제기랄 갈 데도 없긴 하지만 비가 오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선보았던 아가씨나 불러낼까?)
늦은 점심을 겸하여 근처 중국집에서 배갈을 몇 잔 마셨다. 불현 듯 임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헤어질 건 아닌데. 얼마나 원망을 하고 있을까?)
어느새 창수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걸고 한참만에야 전화를 받는다. 임 여인이었다.
“....누구세요?”
“나..난데..오랜만이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그런데 왜 전화를 했어?”
“잠시 좀 안 나올래? 할애기도 있고.”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어디 있어? 안 그래?”
“아니 한번 나와 봐라. 오해도 있고...”
“....아! 생각하면. 전화도 안 받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그러나 애기라도 좀 해보자. 전번 그 다방에서 기다린다.”
“알아서 해라.”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서면근처의 커피숍에서 한 시간 가량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녀가 나타났다. 옷차림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나 머리를 짧게 쳐서 스타일을 바꾸고 있었다.
“여기 앉아라.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데...우리가 이런 애기 할 사이가?”
“그러지 말고...정말 미안하다. 내가 자리도 옮겼는데 알려주지도 못하고 그랬다.”
“알고 싶지도 않더라. 무슨 볼일이 남았다고...”
“그러지 말고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정말 미안하다.”
“......”
창수는 뒷걸음질을 쳐대는 여인의 손목을 끌고 커피숍을 나와서 가까운 맥주 집으로 향했다. 창수의 생각은 오늘은 분위기도 어둡고 해서 술은 가볍게 마시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엉클어졌던 마음이 술이 조금 들어가자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앙금이 다 풀리지는 않고 있다. 남편과는 싸움도 했지만 이젠 서로가 깊게 관여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임 여인은 언뜻 언뜻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창수를 쏘아보기도 하고 자기 손으로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다. 창수는 그러한 여인을 달래려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씩 마신 술이지만 그래도 횟수가 거듭되다 보니 두 사람 다 얼근해졌다.
창수는 여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보슬비가 한 두 방울씩 내리고 있다. 여인은 아직도 서운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손으로 창수의 가슴을 친다.
비는 일요일이 되자 더욱 세차게 내렸다. 창수는 여인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생각하다가 그만 두기로 하였다. 일요일이라 가족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좀 더 서로가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도 좋겠다고 여겨졌다.
월요일 오후에 선본 아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토요일쯤 한번 만났으면 하는 전화였다. 그러자고 약속을 하였다.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확답을 주어야 할 일이다.
이번 주일은 사무실 일이 매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점장이 바뀌고 주요 간부들의 인사이동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창수는 울산에 출장을 가야했다. 동료한명과 함께 울산에 가서 거래업체와 협상을 하였다. 1박2일로 출장을 계획하여서 시간적인 여유는 많았다. 구룡포 항도 둘러보고 토끼꼬리 지점에 가서 횟집에도 들렀다.
저녁을 먹고 여관에 들었다. 동료는 피곤한 지 자리에 눕자말자 일찌감치 골아 떨어졌다. 창수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여관을 나와 방파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방파제 근처에는 마지막 뱃일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어부들의 모습들이 간간이 보이고는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매우 한적했다. 어느 선가 시원한 바람이 건듯 불어온다. 30분가량 방파제위를 혼자 거닐었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멀리 공중전화박스가 불빛에 보인다. 창수의 발길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전화신호음이 길게 울린다.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고 말을 하려는 찰라 전화가 끊어져 버린다. 창수는 주머니를 뒤져 다시 동전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임 여인의 목소리다. 반가움에 창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난데. 전화 못해서 미안해.”
“어디야?”
“응! 울산에 출장 왔어. 내일 내려 갈 거야.”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저기...나...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뭔데 그래? 이야기 해봐.“”저...나 선본 여자하고...“
“알았어. 난 또 뭐라고 결혼하면 되잖아?”
“아니...화 내지 말고...”“나 화 안내. 그런 것 생각 안 해 본거 아니다.”
“일단 내려가서 이야기 하자. 모레 토요일 날 좀 만나자.”
“네일 네 알아서 해라.”
전화 통화가 끝났으나 창수는 오랫동안 공중전화 박스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와서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토요일이 다가왔다. 날씨는 아침부터 비가 올 듯 잔뜩 흐리지만 기온은 포근한 편이다. 창수는 아침부터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오늘은 선본 아가씨를 만나는 날이다,
그녀와 점심을 같이 하려고 하였는데 집안 일로 우후에야 되어야 한단다. 그래서 오후 4시로 약속을 하였다. 4시에 만나 이야기가 잘 진행되면 데이트를 하다가 저녁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만나면 결혼 약속을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근처 중국집에서 접심을 먹었다. 임 여인에게 전화나 해볼까. 그런데 임 여인을 먼저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가씨와의 결혼이 성사되면 임 여인과의 약속은 어떻게 해야 할까?
창수는 많은 생각에 잠기며 낙동강 제방 방향으로 향하여 걷고 있었다. 어차피 아가씨와 만나는 장소도 사상역 부근이었다. 제방 벤치에 않은 창수는 낙동강의 파란 물결을 바라보고 있다.
저 강물의 근원은 멀리 태백에서부터 내려온다고 한다. 정말 멀리서도 오는 것이다. 제방은 지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저 멀리 나무 아래 아베크족이 벤치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3시가 가까워져 가고 있다. 창수의 가슴은 갑갑하기만 하였다.
다음순간 창수는 길 건너 멀리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전화벨 신호가 가고 임 여인이 수화기를 들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난데. 지금 빨리 사상역 건너 강변 둑에 좀 올래?”
“아니 무슨 일인데?”
“와보면 안다. 지금 바로 와야 된다. 알았지?”
“참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무 말 말고 빨리 와라 끊는다.”
30여분이 지나자 임 여인이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창수는 반가움에 덥석 여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끌어안았다.
“왜 이러는데 무슨 일 있나?”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뭐?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갑자기 그러기에.”
“일단 앉아 봐라 이야기나 좀 하자.”
이야기를 하자고 하여 여인을 벤치에 앉게 하고서는 정작 창수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고 여인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면서 멀리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여인의 어깨를 끌어 당겨 가슴으로 안았다. 여인은 당황해하며 얼굴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서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얼마 후 창수는 여인이 앉자 선본 아가씨와의 진행사항과 오늘 만나서 최종 결정을 짓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서로가 나이도 있고 해서 집에서는 자꾸만 결혼을 종용하고 있으나 자신은 아직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단을 못 내리고 있다고 하였다. 여인은 아무소리 없이 사내의 이야기만 듣고 있다.
비가 오려고 하는지 안개가 끼기 시작하였다. 멀리까지 보이던 강물과 강 언덕의 시야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
“4시에 약속했다며 빨리 가야 안 되나?”
“몰라 모르겠다.”
“어서 가라! 내 걱정 말고.”
“안 가고 싶다.”
“왜 그래? 이러면 안 된다.”
“안 갈 꺼다.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
“난 모른다. 내 땜에 그런다면 나중에라도 나 원망하면 안 된다..”
두 사람은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제방 벤치에서 한동안 소리 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있었고, 시계는 이미 4시를 훨씬 넘어 간지 오래였다.
아직 초봄이라 그런지 해가 짧아 벌써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 도로를 건너 사상역 부근으로 왔다. 매운탕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맥주 3병을 나누어 마시고는 역사 앞 나무 밑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낮 시간이 지나간 역에는 승객이 별로 없고 사상공단의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전해온다. 이래서 사상의 공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10여분이 지나자 역사 안이 시끌벅적하다. 아마도 마지막 완행열차가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서 승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역사 정문에서 조금 벗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남의 눈에 보일일은 별로 없었다.
친구들과 야유회를 갔다가 술이 조금 취한 채로 떠들썩하게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 사람들, 휴일을 맞아 등산을 다녀오는 단체 승객, 그리고 젊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나오는 모습 등 다양하다.
창수는 생각해 본다. 자신의 모습은 저들 속에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고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창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젠 가자.”
“어디로 갈래?”
“늦었는데 집에 가야지. 갑자기 나온다고 집에서 기다리겠다.”
“알았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해라.”
창수는 여인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데 대하여는 훗날 후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