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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다선
자비다선은 차를 응용해서 자비관(慈悲觀)을 하는 차수행법입니다.
자비다선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색향미 한마음차를 공양 올림으로써 행복을 배가하는 행복다선,
원결이 있는 상대방에게 연민심으로 색향미 한마음차를 공양 올림으로써 고통의 원결을 푸는 해원결다선,
불특정의 모든 사람 모든 생명들에게 공양 올림으로써 자비심을 배양하는 자비공양다선이 있습니다.
자비다선은 상상의 힘을 사용합니다.
일체의 차 도구를 갖추는 것과 차공양 올리는 영상을 떠올려 영상화하는 것, 동작하나하나 실제 행하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양하는 상상을 통해서 자비심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다선 홈피(http://www.dasun.org)
1. 다선이란?
우리의 삶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이 속에서 즐거움과 고통이 있고 탐욕과 성냄이 있으며 사랑과 미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고통과 미움이 생기며 왜 즐거움과 기쁨이 일어나느 것일까요? 이는 만남과 헤어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꿰뚫어 볼 때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또한 나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나와 남의 관계란 무엇인지 삶 자체의 본질은 또한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나아가 모든 존재의 비밀을 알게 되고 모든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만남과 헤어짐은 곧 인연관계의 흐름이며 삶과 죽음이자 삶의 모든 현상입니다.
이렇게 인연의 관계를 꿰뚫어 아는 방법이 바로 수행에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과 자신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면 한 잔의 차 마심을 통해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茶 명상이며 또한 다선(茶禪)입니다.
물론 차 마시는 것과 수행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차 마시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茶修行法)은 차를 매개로 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차맛과 혀의 만남, 향기와 코와의 만남, 색깔과 눈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인연관계의 흐름을 아주 쉽고 가깝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만남의 뜻을 알 수 있다면 만남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과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이 있으므로 헤어짐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관계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허상에 매이는 삶에서 현재의 삶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궁극에는 죽음의 이치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차의 색향미를 안다는 것은 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소한 일로 언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경우 대개는 큰 언쟁으로 비화되곤 합니다. 이런 경우 자신이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감정을 억제할 수 있고 자신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인연의 흐름을 알아차림이 생활 속에서 지속되면 모든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이 줄어들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명상이며 수행입니다.
이렇듯이 간단히 차의 빛깔이나 향기 또는 차맛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차맛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로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삶이 온전히 깨어 있게 됩니다. 곧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으로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차명상하는 의의입니다.
2. 첫맛 알기
색향미의 차의 본성을 가지고 공양차(供養茶)의 명상을 하면 과거의 잠재되어 있던 번뇌망상이 정화됩니다.
다시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차의 첫맛과 차맛의 변화를 감지하는 수행에 들어가면 현재 일어나는 번뇌망상의 속박에서 그만큼 벗어나게 되므로 쉽게 법의 성품을 보게 되어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차 맛은 직관이며 선(禪)의 맛 또한 직관이기 때문입니다.
직관(直觀)의 특성은 말이나 생각을 매개하지 않으므로, 차와 선은 서로 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점은 차 맛의 직관은 감각인 반면, 선의 맛은 감각마저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일단 선으로 들어가면 차맛을 포함한 모든 것이 선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한맛으로 모든 것이 관통되기 때문에 차와 선은 한맛, 즉 다선일미가 됩니다.
감각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과거 경험이 감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끼는 순간 좋거나 싫은 느낌을 순간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미술품을 감상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도 이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경험한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를 마실 때 이러한 과거에 맛보았던 경험이 제거되면 차 맛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되고 선의 맛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차맛에 대한 주관적이고 과거적인 맛을 제거하고 제대로 차미(茶味)를 음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차의 첫맛과 차 맛의 변화를 주시하는 것입니다. 즉, 첫맛과 차맛의 변화를 보면서 알아차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마셨던 차맛을 상기하여 지금 느끼는 맛과 비교 분별한다든지 지금의 맛에 홀려 환상이나 공상을 일으켜 미래로 흘러가지 않게 됩니다. 차맛 변화 속에 있는 그대로의 첫맛을 감지하고 그 차 맛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떠난 禪 맛으로 반조됩니다. 그때 차맛과 선은 둘이 아닌 一味가 되는 것입니다.
다선일미가 아니라 일미다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미의 한가지 차맛을 통하여 한맛의 선으로 가기 때문에 일미다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첫맛 알기의 네단계
첫맛을 알아낸다는 것은 정신을 차 맛에 집중하여 정확하게 최초로 일어나는 맛을 감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止)수행에 해당합니다. 정신을 집중하여도 산만하다면 눈을 지긋이 감고 맛을 음미하면 첫맛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맛 알기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차의 첫맛은 그냥 마시면서 느끼는 맛입니다. 이것은 별 생각없이 마시면서 그저 느끼는 차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차를 마시는 순간 맛이 어떠하다고 반응하는 맛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로 일반적인 첫맛의 수준입니다.
두 번째는 차맛과 차맛을 보는 정신작용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단계입니다. 흔히 사물을 볼 때 보이는 사물과 보는 정신작용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상과 대상을 아는 정신작용의 관계는 마치 거문고를 켰을 때 거문고 줄이 진동하고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가 대상에 따라 반응하는 생각의 색깔과 진동폭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정신의 작용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거문고를 거듭 켜지 않는 이상 점차 그 진동은 줄어들면서 마침내 멈춥니다. 이처럼 일어나는 생각의 진동폭을 줄이고 정지시키는 것이 지(止)의 수행법입니다. 이렇게 정신을 차맛에 고정시켜 맛을 보면 생각의 이미지와 진동이 점차 멈추면서 정신작용과 차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차를 마시면 차맛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차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은 한 모금의 차에서도 그 맛이 변한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止)수행을 하면 차마심에 익숙한 것에 관계없이 차맛의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차의 미묘한 맛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차맛의 변화란 곧 차의 미묘한 맛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맛에 고정시켜 맛을 보면 차맛이 변화하는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게 되며 번뇌망상이 끼어들 틈이 없어져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왜냐하면 미묘한 차맛을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맛의 변화를 놓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변화[미묘한 차맛]를 알아차려 아는 것이 곧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이며 존재의 실상(實相)을 깨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이 부분에 관(觀)수행의 차맛 변화알기에서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맛의 공통점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관(觀)이 수반된 지(止)수행입니다. 세 번째의 단계가 차맛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별됨을 아는 것이라면, 이 네 번째 단계는 그 차별된 맛 속에서 공통된 무미(無味)의 한가지 맛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장소나 시간 또는 차의 종류에 관계없이 무미의 맛을 알아낸다면 이는 일미(一味)의 경지입니다.
이 일미 무미의 경지는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이기도 하고 우주의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첫맛 알기에서 알아차리는 경지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4. 차맛 변화알기
차의 첫맛알기 수행은 차맛 변화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는 첫맛과 차맛 변화는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미다선의 두 번째 수행은 차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觀)수행으로 가상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관(觀)은 눈(육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육안으로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눈은 앞과 좌우를 볼 수 있지만 뒤를 보지 못합니다. 또 장애물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구애됨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 없을 뿐더러, 눈의 한계로 인한 오류와 괴로움도 바로잡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보는 힘을 계발하는 것이 관(觀)수행입니다. 관수행으로 심안이 열리면 반야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관수행을 지혜선(智慧禪)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늘 눈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차맛 변화알기의 관수행은 마음의 눈을 키워줍니다. 차맛이 변하는 과정을 알아차려가면서 음미하면 됩니다. 즉 심안의 현상으로 차를 머금은 입안과 혀, 치아 등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의 흐름을 정지하면[止수행] 대상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하면 차창 밖의 경치를 볼 때 다른 생각에 잠기거나 또는 경치마다 분별하다보면 그 경치가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생각에 쫓아가지 않고 무심하게 바라보노라면 경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해 가는 것이 보입니다.
생각의 흐름을 중지시키고 또한 나타나는 대상에 따라가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 속에서 변화를 면밀히 주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止)수행을 통해 변화를 아는 관(觀)수행입니다.
지(止)를 통한 관(觀)수행은 시간적으로는 현상의 이전과 이후를, 공간적으로는 현상의 표피를 꿰뚫어 그 이면(裏面)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맛 변화알기는 곧 꿰뚫어 보는 앎입니다. 그래서 관은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입니다.
관은 관조(觀照)라고도 하는데 관 그대로 지혜이며 깨달음입니다. 관(觀)은 기존의 형상을 깨뜨리고 이면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생각 알아차리기
차맛에 정신을 집중하면 생각의 흐름이 중지되거나 생각의 진폭이 작아지다가 없어지지만, 이에 대항하여 이때부터 갖가지 생각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즉 차맛을 음미하고 잇으면서 다른 생각이 홀연히 일어난다든지 과거에 맛보았던 차맛과 자신도 모르게 비교한다든지 하여 고요한 마음과 맛을 관조하는 상태가 깨어져 버립니다.
차수행의 세 번째 단계는 이렇듯 차맛을 볼 때,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생각을 따라 저쪽 바깥에 가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즉시 차를 음미하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로 조용히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차맛만 남는 체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방법은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놔두고 차맛만을 꾸준히 주시하는 방법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에 쫓아가지
않고 차맛만을 잡다 보면 마치 향연기가 피어올라 허공에서 사라지듯이 생각도 그와 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예를 들어, 차를 마시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나 차소리와 같은 평상시의 소음이 의식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럴 때 동요되지 않고 꾸준히 차맛만을 음미하면 소음이 사라져 버리고 차맛만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꾸준히 거듭 수행하다 보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생각의 크기가 작아지고 엷어지며, 일어나는 회수도 적어져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다시 세 번째 초점을 첫 번째, 두 번째와 비교해 봅시다.
첫 번째 초점인 차의 첫맛을 포착하는 수행은 마음의 고요함을 지킬 수 있으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번뇌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초점인 차맛의 변화를 주시하는 수행에서는 잠재되어 있었던 번뇌가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나타나는데, 그 번뇌를 그대로 가만히 두면 연기가 허공에서 사라지듯이 없어집니다. 때문에 온갖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서 수행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초점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초점수행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처리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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