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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1월 17일, 순국선열(殉國先烈)의 날
시행일 1997년 5월 9일
법정기념일, 비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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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문'은 광복 후 첫번째로 거행된 '순국선열추념식'에서(1945년 12월 23일) 대종교 원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쓰고 백범 김구 선생이 선열제단에 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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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그 #원문 과 #현대어 로 풀어쓴 당시의 #순국선열추념문 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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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추념문(殉國先烈 追念文)-원문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 ?:1950년 납북 이후 불명)
우리 국조(國祖) 형극(荊棘)을 개제(開除)하시고 정교(政敎)를 베푸신 뒤로 면연(綿延)함이 거의 5천 년에 미치는 그 동안 흥폐(興廢)의 고(故)가 어찌 한두 이리요마는, 실상은 한 족류(族類)로서의 대승(代承)이요, 혹 외구(外寇)의 침탈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이 일구(一區)에 그쳐, 환해고윤(桓解古胤)의 내려오는 통서(統緖)는 언제나 엄연(儼然)하였나니, 우리 몸소 당한바 변란(亂)이야말로 사상(史上)에서 보지 못하던 초유(初有)의 참(慘)이라, 광무(光武) 을사(乙巳)로 비롯하여 정미(丁未)를 지나 융희(隆熙) 경술(庚戌)에 와서 드디어 언어(言語) 끊기니 그 참(慘) 됨은 오히려 둘째라, 기치(奇恥)와 대욕(大辱)이 이에 극(極)함을 무엇으로 견준다 하리요. 이러한 가운데 일도 찬란한 국광(國光)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恥辱)의 일에 긍부(矜負)와 비참(悲慘)의 기(期)에 분발(奮發)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과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리는 이에서 을사이후 순국하신 선열(先烈)제위(諸位)를 오매(寤寐)간 잊지 못하나이다. 그동안 일구(日寇)), 차토(此土)에서 육량(陸梁)함이 오래라, 감(監)이라 독(督)이라 하여 패퇴(敗退)하던 날까지 강산(江山) 민인(民人)을 피(彼)는 피(彼)의 점제하(占制下)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선열의 피로써 적과 싸워온 거룩한 진세(陣勢) 사십일 년의 일월(日月)을 관철(貫徹)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장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최후가 천읍(天泣) 지애(地哀)할 거적(巨迹)이 아니시리요.
인(刃)에 절(絶)하였거나 약(藥)에 운(殞)하였거나 다 같은 국가 독립의 발발(勃勃)한 탱주(撐柱)요, 척수(隻手)의 격(擊)이나 일려(一旅)의 戰이나 모두가 광복달성의 열렬한 매진(邁進)이요, 역중(域中)에서 기구(崎嶇)하다가 맹지(猛志)를 뇌옥(牢獄)에 묻었거나, 해외에 표전(飄轉)하면서 고심(苦心)을 노봉(虜鋒)에 끝마치었거나 다 항적필사(抗敵必死)의 강과(剛果)한 결정(決定)이니, 개인과 단체, 자살과 피해가 불일(不一)한 대로, 내어뿜는 민족적 망릉(芒稜)은 일찍이 간헐(間歇)됨을 보지 못한 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이 쉰 적 없고, 이 싸움이 쉬지 아니하매 차토(此土) 마침내 적의 전거(全據)로 돌아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과거 사십일 년을 통틀어 일구(日寇)의 역(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피(彼)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 향내가 항상 이곳에 주기(主氣)되어 온 연고(緣故)니, 이 여러분 선열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원구(圓球)상에 서리요. 삼천리 토양 알알 그대로가 이 여러분 열혈의 응체임을 생각하매, 구한(舊恨)신감(新感)이 가슴에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교구(狡寇)), 대로전승(對露戰勝)의 여위(餘威)를 가지고, 오조의 협약을 떠들던 것이 어젠 듯 하오이다.
국보(國步)는 기울고 대세(大勢)는 가, 앞길의 암흑이 그 즈음을 알 수 없는 그 때, 저 주근(周勤) 뉴유(紐由)의 구원(久遠)한 정기(精氣), 몇몇 분의 선혈(鮮血)로 쫓아 다시 솟아나, 안으로 폐부(肺腑)의 중망(重望)과 원로(元老)와 수의고고(守義枯槁)하던 구신(舊臣)과 격앙(激昻)한 위사(衛士)와 강개(慷慨)한 미관(微官)과 임하(林下)유문(儒門)의 기덕(耆德)들의 순열(殉烈)이 서로 이었고, 밖으로 주차(駐箚)사신(使臣)의 사절(死絶)이 국문(國聞)을 용동(聳動)하였으며, 각 지방으로 의기(義旗) 곳곳에 날려 과혁(裹革)의 시(尸)와 냉산(冷山)의 혼(魂)과 피집(被執)불굴(不屈)의 장사(壯士), 다 적담(敵膽)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해아(海牙)의 의성(義聲)이 내외를 흔듦에 미쳐, 국민마다 강혈(腔血)이 끓는 중, 양위(讓位)의 핍(逼)을 뒤이어 군대의 해산을 보게 되던 날, 굉렬(轟烈)한 대장(隊長)의 자포(自砲)가 그 즉시 조국광복의 활훈(活訓)이 되며, 죽어도 겨누라는 명령이 되어, 마침내 시가일전의 혈성(血腥)이 영구히 민지(民志)의 보람으로 빛나매 무릇 군장(軍裝)을 신상(身上)에 건 이, 거의 의려(義旅)로서 결합되지 아니함이 없고, 학사(學士), 명관(名官)이 함께 기고(旗鼓)를 잡아, 비록 형세 단약(單弱)하나마 자못 운흥(雲興)함을 보았나니, 이에 창이 부러질수록 의(義) 더욱 굳고, 몸이 적에게 잡힐수록 정신은 갑절이나 활발하였나니, 옥중(獄中)에, 황야(荒野)에, 어느 뉘 어귀찬 전망(戰亡)이 아니오리까. 난적(亂賊)을 치려다가 오중(誤中)하여 의구(義軀)만을 상함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어니와, 하얼삔에서 구적(仇敵)의 원악(元惡)을 사살(射殺)하던 장거(壯擧)는 지금껏 남은 늠연(凜然)이 있나이다. 국변(國變) 당시 조야(朝野)를 통하여 열절(烈節)이 계기(繼起)한지라, 수토(守土)의 장리(長吏)를 비롯하여 구원(丘園)에서 간정(艱貞)을 지키던 이, 국교(國敎)로 민지(民志)를 뭉치려던 이, 석학(碩學), 문호(文豪), 고사(高士), 단인(端人), 기근(畿近)으로 산반(散班), 중경(重卿)에 미쳐, 선후(先後)하여 구명(軀命)을 버리어 사적(死敵)의 열(烈)을 밝히셨나이다. 을사년부터 경술에 미쳐 국보(國步) 이미 기우는 것을 대세(大勢)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 죽음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나,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최후에 이르게 된 일면(一面), 붙드신 힘은 그 속에 점점 강고(强固)하여 한번 상란(喪亂)의 최후를 넘자, 하경(下傾)하던 파도를 휘어 돌려 다시 흉용(洶湧)하기 시작하매, 광복의 일로(一路), 바로 전 민중의 분추(奔趨)하는 바 되었나이다. 이에, 앞서부터 만주(滿洲) 남화(南華), 원(遠)으로 미(美), 근(近)으로 노령(露領)에 지사(志士)의 종적(踪跡)이 분포(分布)하더니, 다시 그 규모를 굉활(宏闊)히 하매, 혹단결하여 군려(軍旅)를 배진(倍振)하고, 혹 규합(糾合)하여 당륜(黨倫)을 증장(增長)하여, 혹 단신(單身)으로 고행(苦行)하여 좌원우응(左援右應)하는 그 행사(行事) 또한 백난(百難)을 충모(衝冒)한 바라. 내외 호류(互流)하는 기다(幾多)의 열혈(熱血) 속에 전 민중의 지의(志意), 불타듯이 뜨거워가다가, 기미(己未) 삼월에 와서 총일(總一)의 표로(表露)가 독립(獨立)만세(萬歲)로 터지자, 여기서들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내세우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오늘에 이름이, 하나로부터 만억(萬億)에 이르기, 다 선열이 물려주신 바임은 천추(千秋)하에서도 오히려 유몌(濡袂)의 누(淚)를 자아낼 줄 아나이다. 기미(己未)이후는 우리의 운동이 가장 강하여지니만큼, 만세소리에 응집(應集)하던 그때부터 농촌, 시장, 교회, 부인(婦人), 노년(老年)을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혈풍(血風) 혈우(血雨)가 전토(全土)를 휩쓸었으니, 고(古) 선민(先民)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계(戒), 이에 재흥(再興)함을 이를지라. 피 헛되이 쌓이지 않고, 하늘이 민충(民衷)을 돌아보아 금일 광복의 서색(曙色)을 국토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언제나 순열(殉烈)의 선민(先民)은 유국(有國)의 정간(楨幹)이시라. 그 가운데도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건대, 선열(先烈)은 곧 국명(國命)이시니, 왕왕(往往)히 일인(一人)의 '피'로 인하여 민족의 소소(昭蘇)함을 보게 됨이 어찌 도언(徒言)이리까. 저 강호(江戶)의 추격(推擊)의 계속적 장도(壯圖), 고국(故國)의 사람 있음을 나타냄도 그러려니와, 왕자(往者) 상해(上海)의 난에 왜구의 방자(放姿)하는 공세(攻勢), 우방(友邦)으로 하여금 지한(至恨)을 머금게 하던 때, 우리 의사(義士)의 일발이 군추(群酋)를 진섬(殄殲)하여 거국(擧國)의 원사(援師)보다 오히려 지남이 있어, 우리 독립의 대계(大計) 격랑(激浪)같이 노사(怒瀉)함을 얻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지사는 일사(一死)를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생(生)을 사(捨)하고 의(義)를 취(取)하신데 향하여 비애(悲哀)의 세정(細情)을 붙이고자 아니하며, 더욱이 모든 광복의 원공(元功)이신 바에 무슨 유한(遺恨)이 있으리까마는, 같은 선열이시면서도 혹 현저(顯著)하여 천양(天壤)에 혁혁하기도 하고, 혹 인멸(湮滅)하여 명자(名字)조차 물을 길이 없기도 하니, 전(前)을 행(幸)이라 하면 후(後) 어찌 불행이 아니리까 하물며 무인(無人)궁도(窮途)에서 고훼(枯卉)위에 촉루(燭髏)를 굴리어, 귀화(鬼火) 번득이고 오작(烏鵲)이 난비(亂飛)할 뿐으로, 생전(生前)은 차치(且置)하고 사후(死後)까지 소조(蕭條)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요. 설사 이렇기까지는 아니 할지라도 군행여진(軍行旅進)하다가 함몰(陷沒)한 이들은 누구며, 유칩(幽蟄) 역구(歷久)하다가 유사(瘐死)한 이들은 누구뇨. 다수(多數)로 인하여 특저(特著)가 없는 거기에, 일성(日星)과 병수(竝垂)할 열적(烈蹟)이 많으시려니, 서자(逝者) 아무리 호연(浩然)하다한들, 살아있는 우리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요. 다시 생각하면, 순국선열은 순국(殉國)으로 일체(一體)시니 명자(名字)를 가리켜 인아(人我)를 나누려 함은 오히려 사견(私見)인양 하여 자위(自慰)하고자 하나, 또 설워하는바 있으니, 을사이후, 선열의 보고자 하심이 광복(光復)이라. 차신(此身)의 전전(輾轉)하는 동안 동지(同志)로서 간고(艱苦)에 제휴(提携)하던 이 가운데에도 이미 선열을 따라가신 이 많거늘, 이 날을 어찌 우리만이 보며 더욱이 만드시던 이는 멀리 아득하고, 그 적(跡)을 습(襲)한 우리, 이 서광(曙光)을 바라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요. 우리 국외(國外)에서 성상(星霜)을 지낸지 오래라. 그 때는 생자(生者)들 또한 사로(死路)를 밟아 의의(依倚)하는 바 오직 선열의 혼백(魂魄)이매 거의 인귀(人鬼)의 격(隔)을 잊었더니, 이제 고토(故土)에 돌아와 동포민중의 품에 안기니, 와락, 차신(此身)의 존류(存留)함이 어째 그리 확연(廓然)함을 느끼나이다. 들어오면서 곧 미침(微忱)을 드리려한 것이 오늘에야 겨우 추념(追念)하는 대회를 거행(擧行)하게 되니, 늦으나 오히려 우리의 정을 기탁(寄託)함직 하되, 우리 선열께 바칠 형향(馨香)이 광복의 완성, 즉 독립의 고공(告功)에 있을 뿐이어늘, 이제 여기까지 달(達)함에는 아직 거리 없지 아니할새, 영전에 향하는 육니(恧怩) 자못 무거우나, 몇 십 년 전 암흑(暗黑)뿐이요, 누망(縷望)이 없던 그 때에도 선열은 꺽이지 아니 하셨으니, 우리 이제 수성(垂成)의 업(業)에 헌신(獻身)함을 맹세할 것은 물론이요, 시(時) 금석(今昔)이 있다 할지라도 민시(民是)는 선열의 유서(遺緖)로부터 내려와 의연(依然)할 바니, 우선 현하(現下)를 들어 선열께 고(告)하려 하며, 여러분 재천(在天)하신 영령(英靈)들은 우리를 위하여 경경(耿耿)하실지니, 그 백절불굴하신 의기,
지순(至純)지결(至潔)하신 고조(高操), 민아(民我)무간(無間)하신 성심(聖心), 웅맹(雄猛)탁특(卓特)하신 용개(勇槪)를 전 국민으로 하여금 효칙(效則)하게 하사, 이로써 태운(泰運)을 맞이하여, 위로 국조(國祖) 홍익(弘益)의 성모(聖謨)를 중신(重新)하게 하시여, 아래로 삼천만의 기원(祈願)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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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문 (현대어 해석)
우리의 국조(國祖)이신 단군께서 가시밭길을 열어젖히시고 정치와 교화를 베푸신 뒤로 끝없이 이어져 내려옴이 거의 5천 년에 미치는 동안 흥하고 폐하였던 일이 어찌 한 두 번 이리요마는 그 실상은 한 겨레로서의 이어져 내려옴이요 혹 외적들의 침탈이 있었다 할지라도 한 지역에만 그쳐 환웅과 해모수의 오랜 자손들의 내려오는 계통과 차례는 언제나 엄연하였나니 우리 몸소 근래에 당한 바 변란이야말로 역사상 보지 못했던 처음 있는 비참한 일이라.
광무 을사년부터 정미년을 지나 융희 경술년에 와서 드디어 우리말과 글이 끊기었으니 그 비참함은 오히려 둘째라. 그 부끄러움과 욕됨이 이렇게 극에 달함을 무엇으로 견준다 하리요. 이러한 가운데 찬란한 나라의 빛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부끄럽고 욕된 일에 넘치는 자부심과 비참한 때에 그 분발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과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리는 이에서 을사년 이후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선열 여러분을 자나 깨나 잊지 못하나이다.
그동안 일본 도적이 우리 땅에서 제멋대로 날뛴 지가 오래라. 감시한다, 독려한다하면서 싸움에 져서 물러나던 날까지 우리강산과 인민들을 저들은 저들의 강제 점령 하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선열의 피로써 적과 싸워 온 거룩한 싸움의 형세는 41년의 세월동안 계속 이어져 내려와 몸은 쓰러져도 얼은 나라를 놓지 아니하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장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최후가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할 큰 자취가 아니시리요. 칼로 돌아가셨거나 약(藥)에 목숨이 끊어지셨거나 다 같은 국가 독립의 우뚝 솟은 기둥들이시오 한 손으로 적을 치심이나 한 군대의 싸움이거나 모두가 광복달성의 열렬한 매진이요 이 땅 안에서 고생하시다가 그 높은 뜻을 감옥 안에 묻었거나, 해외에서 떠돌아다니시며 그 아픈 마음을 오랑캐의 칼끝에서 끝마치시었거나 다 항적필사(抗敵必死)의 굳은 결정이셨으니 개인과 단체, 죽음과 피해가 같지 아니한 대로 내어 뿜는 민족의 그 매서운 창끝은 일찍이 멈추지 아니한 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이 쉰 적이 없고 이 싸움이 쉬지 아니하매 이 땅이 마침내 적의 완전한 점거 속에 들어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과거 41년을 통틀어 일제 도적의 역(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저들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 향내가 항상 이곳에 미치어 이어져 온 연고니, 이 여러 어른 선열들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 이 지구상에 서리요.
삼천리 흙 알알이 그대로 이 어른 여러분의 뜨거운 피의 엉김임을 생각하매 옛날의 한과 새로운 느낌이 가슴에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교활한 일본왜구들이 1905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자 그 여세로 을사년에 강제로 5조의 협약을 맺게 한 것이 어제인 듯 하오이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대세는 흘러 가, 앞길의 암흑이 그 즈음을 알 수 없는 그 때, 저 주근 유유의 충성스러움이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의 민족정기가 몇몇 분의 붉은 피로 다시 솟아나 안으로 중앙정부의 중신들과 義로써 옛 전통을 지키던 오랜 신하들과 격앙한 호위무사와 비분강개한 미관말직의 관료와 각처의 유림에 있는 늙은이들의 순국의 매움이 서로 이었고 밖으로 외국에 나가 근무하던 사신의 죽음이 나라의 이름을 크게 솟게 하였으며 각 지방으로 의로운 깃발이 곳곳에 날려 가죽부대에 싸이는 시신과 차가운 산을 떠도는 혼과 결코 굴하지 않는 의병 장사들이 다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헤이그의 의로운 목소리가 국내외를 흔듦에 미쳐 국민마다 배속의 피가 끓던 중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의 협박에 뒤이어 군대의 강제해산을 보게 되던 날, 굉렬한 대장의 자발적인 포격이 그 즉시 조국광복의 산 교훈이 되고 죽어도 겨누라는 명령이 되어 마침내 시가지 일전의 피비린내는 영구히 민족의 뜻으로 그 보람을 빛나게 하매 무릇 군인의 차림을 몸 위에 걸쳤던 이들이 의로운 군사로서 결합되지 아니함이 없고, 학사(學士)와 고명한 관인들이 함께 깃발과 북을 잡아, 비록 형세는 약하였지마는 자못 구름처럼 흥함을 보았나니. 이에 창이 부러질수록 의기는 더욱 굳고, 몸이 적에게 잡힐수록 정신은 갑절이나 활발하였나니 옥중에, 황야에, 어느 누구 인들 그 뜻이 굳고 어귀찬 죽음이 아니오리까. 난을 일으킨 도적을 치려다가 잘못 맞추어 의로운 몸만을 상함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거니와 하얼빈에서 원수의 그 흉악한 원흉을 쏘아 죽이던 장한 의거는 지금껏 남은 늠름함이 있나이다.
나라의 변란 당시 조야를 통하여 매운 절개가 이어진지라. 나라를 지키던 관리를 비롯하여 초야에서 굳은 정렬을 지키던 이, 나라의 가르침으로 민족의 뜻을 뭉치려던 이, 석학, 문호, 높은 선비, 의로운 사람들, 서울 가까이서 멀리서 흩어져 살던 양반, 오랜 공경들에까지 미쳐, 앞뒤로 그 목숨을 버리어 적을 죽이는 매움을 밝히셨나이다. 을사년부터 경술년에 미쳐 나라의 운명 이미 기우는 것을 대세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 죽음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나,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최후에 이르게 된 한편, 오히려 붙드신 힘은 그 속에 점점 강하고 굳어져 한번 돌아가심의 난의 최후를 넘자, 아래로 기울던 파도를 휘어 돌려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하매, 광복의 한 길, 바로 전 민중이 바삐 뛰며 움직이는바 되었나이다.
이에, 앞서부터 만주, 남중국, 멀리는 미국, 가깝게는 러시아 영토에 뜻있는 이들의 발자취가 분포하더니, 다시 그 규모를 넓히매, 혹 단결하여 군부대를 늘려 펼치고, 혹 규합하여 모임의 윤리를 늘려, 혹 홀몸으로 고행하여 왼쪽에서 끌고 오른쪽에서 응하는 그 일들이 또한 백가지 어려움을 무릅쓴 바라. 내외에 섞여 흐르는 그 많은 끓는 피 속에 전 민중의 뜻과 의지가 불타듯이 뜨거워가다가, 기미년 (1919년) 3월에 와서 하나 된 나타남이 독립만세로 터지자, 여기서들 대한민국을 내세우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오늘에 이름이, 하나로부터 만, 억에 이르기. 다 선열이 물려주신 바임은 천년 아래에서도 오히려 소매를 적시는 눈물을 자아낼 줄 아나이다.
기미년 이후는 우리의 운동이 강하여지니만큼, 만세소리에 응하여 모이던 그때부터 농촌, 시장, 교회, 부인, 노년을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피 바람 피 비가 전 국토를 휩쓸었으니, 옛날 앞사람들의 싸움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는다는 계율, 이에 다시 흥함을 이를지라. 피 헛되이 쌓이지 않고, 하늘이 겨레의 정성을 돌아보아 금일 광복의 새벽빛을 이 땅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언제나 순열의 어르신들은 바로 나라의 기틀이요 기둥이시라. 저 일본 땅 동경에서의 추격의 계속적인 장면, 고국의 사람 있음을 나타냄도 그러려니와, 지난 상해의 난에 왜구의 방자(放姿)하는 공세, 우방(友邦)으로 하여금 지한(至恨)을 머금게 하던 때, 우리 의사의 총알 한 발이 여러 왜적을 도륙하여 그 어느 나라의 군사원조보다 오히려 지남이 있어, 우리 독립의 대계(大計) 거친 파도와 같이 성냄을 얻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지사는 한번 죽음을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신데 향하여 슬픔의 가는 정을 붙이고자 아니하며 더욱이 모든 광복의 큰 공(功)이신 바에 무슨 남은 한이 있으리까마는, 같은 선열이시면서도 혹 현저하여 하늘땅에 빛나기도 하고, 혹 사라 없어져 이름조차 물을 길이 없기도 하니, 이를 행(幸)이라 하면 뒤 어찌 불행이 아니리까?
하물며 아무도 없는 막다른 곳에서 마른 풀 위에 남은 뼈를 굴리어, 귀화(鬼火) 번득이고 까마귀만이 어지러이 날 뿐으로, 살아생전은 그만두고 돌아가신 후까지 쓸쓸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오. 설사 이렇기까지는 아니 할지라도 군행여진(軍行旅進)하다가 돌아가신 이들은 누구며, 부득이 숨어 지내다가 근심하며 돌아가신 이들은 누구뇨? 그 가운데도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건대, 선열은 곧 나라의 명(命)이시니, 가끔 한 사람의 '피'로 인하여 겨레가 밝게 소생함을 보게 됨이 어찌 빈 말이리까. 많은 수로 인하여 특별한 나타남이 없는 거기에, 해와 별과 나란히 빛날 선열의 업적이 많으시려니 가신 분들은 아무리 마음이 넓다한들 살아있는 우리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오.
다시 생각하면, 순국선열은 순국으로 일체시니 이름자를 가리켜 남과 나를 나누려 함은 오히려 사견인양 하여 스스로 위로받고자 하나 또 설워하는바 있으니 을사이후 선열의 보고자 하심이 광복이라. 우리 몸이 전전하는 동안 동지로서 어려움과 고통에 묶였던 이 가운데에도 이미 선열을 따라가신 이 많거늘, 이 날을 어찌 우리만이 보며 더욱이 만드시던 이는 멀리 아득하고 그 남기신 발자취를 이어 받은 우리, 이 새벽빛을 바라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오.
우리들이 나라 밖에서 수많은 세월을 지낸지 오래라. 그 때는 살아 있던 사람들 또한 거의 죽음의 길을 밟아 의지하는 바 오직 선열의 혼백이매 거의 사람과 귀신의 차이를 잊었더니, 이제 옛 땅에 돌아와 동포민중의 품에 안기니, 와락, 우리 몸의 살아있음이 어째 그리 넓고 텅 빈 느낌을 갖나이다. 들어오면서 곧 작은 정성을 드리려한 것이 오늘에야 겨우 추념하는 대회를 거행하게 되니 늦으나 오히려 우리의 정을 맡김직 하되, 우리 선열께 바칠 향기로운 바는 오로지 이 광복의 완성, 즉 독립의 공이 완성되었음을 고하는 것이거늘, 이제 여기까지 도달함에는 아직 거리가 있지만 영전에 향하는 부끄러움과 창피스러움이 무거우나 몇 십년 전 암흑뿐이요 실낱같은 희망도 없던 그 때에도 선열은 꺾이지 아니 하셨으니, 이제 우리 이룸의 업적에 몸 바침을 맹세할 것은 물론이요, 비록 오늘과 옛날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른 길은 선열이 남기신 유업으로부터 내려와 전과 다름이 없으니 우선 오늘의 모습을 들어 선열께 고(告)하려 하며, 여러분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들은 우리를 위하여 더욱 빛나실지니 그 백절불굴(百折不屈)하신 의기와 지극히 순결하고 높으신 지조, 남과 나의 구분이 없는 성스러운 마음, 탁월하고 우뚝 뛰어나신 용감하신 기개를 전국민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사 이로써 큰 발전의 대운을 맞이하여 위로 국조(國祖)께서 세우신 홍익인간의 성스러운 계획을 다시 새롭게 하시여 아래로 삼천만의 기원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