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향기 그윽한 백화산 순례길]
설렘 가득한 문경 땅을 다시 밟는다. 상큼하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네 번째로 서울에서 내려온 단골손님을 한 눈에 알아본다. 바람을 대동하고 찾아와 온몸으로 반겨준다. 보고 싶었다며 그윽한 향내로 말도 걸어온다. 난 그런 이곳이 참 좋다.
발걸음 디디는 곳마다 문경 땅은 아는 체를 한다. 2년 전 첫 번째로, 성지 삼총사인 여우목, 진안리, 마원성지를 고리로 연결하여 순례했던 마음을 기억해준다. 문경의 하늘과 바람, 사과 향과 흙냄새에 탄성 올렸던 감격, 깨달음과 다짐이 스미도록 순수함을 되살려준다.
문경 순례 두 번째로, 여우목성지에서 문경 관아까지 순교자들이 끌려가신 18km ‘순교의 길’ 종주코스를 걸을 땐 작은 백색순교를 다짐도 했다. 세 번째는 박해시대 교우들이 한밤중에 문경새재 넘던 길을 기억하며, 오후 늦게 출발하여 밤중까지 ‘어둠과 빛의 길’을 걸었다. 어둠에 빛이 되신 그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네 번째로, 문경에서부터 상주 옥까지 70km가 넘는 길을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간 분들이 걸으신 ‘믿음의 길’을 2박3일로 걸었다. 분향처럼 타오르는 성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순교자의 핏빛 한 방울이라도 스며들기를 기도했다.
이번엔 다섯 번째로, 외국인 신부와 조선 교우와의 감동이 깃든 ‘우정의 길’을 걷는다. 9월 초순, 엄연한 가을임에도 영상 30도가 넘는 기이한 폭염은 기세가 등등하다. 친정인양 안온한 문경성당 피정의 집에 들어서니, 먼저 온 자매가 하뭇 반긴다.
이튿날 아침 8시, 문경성당 마당에 우정의 길 순례를 떠날 자매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안동 용상동성당의 한 봉사단체 10명과 도합 12명이 예수님의 제자처럼 순한 양이 되어 순례를 떠난다. 목자이신 정도영 베드로신부님을 따르는 길이다.
순례 차량은 ‘우정의 길’ 산행 출발지인 한실교우촌 입구에서 내려준다. 맞아도 좋은 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니, 복잡하던 머리와 눈가가 시원하다. 화가 겸제의 산수화인양 겹겹이 포개진 문경의 높은 산들은 회색빛 구름 갓을 썼다. 검푸른 하늘이 구름을 벗어나려 하얀 머리를 내미는 풍경부터 코끝이 찡하다.
마원에서부터 백화산을 넘어 한실 교우촌까지 걷기도 하는데, 우리는 역으로 한실 교우촌에서 출발하여 백화산 8부 능선까지 약 8km 걸은 후, 한실로 환원하는 코스를 종주한다. 백화산 산길 입구에서 내려다보는 한실 교우촌은 탁 트인 초록 세상이다.
백화산은 1,000m가 넘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속해 있어, 인근의 뇌정산, 소백산들과 나란히 험준하고 위험요소가 많다. 특히 백화산은 다른 백두대간의 산들처럼 산악코스로 개발되지 않은 원산 그대로 보존된 곳이어서, 거의 길을 찾을 수 없다. 목자 신부가 사명감 하나로 길을 찾아 매어놓은 밧줄과 눌러 밟은 발자국으로 난 길이 길라잡이를 한다. 목자의 이끄심 아니면 갈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2년 전 마원성지 순례 때의 진한 감동이 떠오른다. 그윽하게 익어가는 문경사과밭 옆으로 대형 십자가 아래 두 사람의 동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선 박해시대 때 프랑스 외방 전교회 칼레 신부와 박상근 마티아 복자와의 뜨거운 우정이 서려있다.
아전 출신인 박상근 마티아는 마원성지에서 백화산을 넘어 한실 교우촌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칼레 신부를 만나게 됐다. 천주교 신자가 모여 있는 그곳에선 칼레 신부가 붙잡힐까봐 마티아는 문경읍내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하지만 며칠 지나서 더 위험해짐을 인지하고, 어두운 밤을 택해 신부님을 백화산의 한실로 다시 모시려한다. 1,000m가 넘는 백화산을 오르는 산중턱에서 마티아는 그만 탈진한다.
칼레 신부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돕는 마티아에게 돌아가라 했지만, 신부님이 혼자 가시다 잡히실까 두렵다며 산 걸음을 강행한다. 신부님 극단의 조치로 돌아가는 마티아와 강제로 돌려보내는 칼레 신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두 분의 애끓는 마음과 헌신의 우정이 눈물겹다. 박상근 마티아는 곧 잡히어, 끝내 30세에 순교하였다.
순례자들과 백화산을 넘어 한실성지까지 이어지는 도보순례코스 ‘우정의 길’을 걷는 내내 비탈진 산길, 칡넝쿨 얽힌 숲길에서 두 분의 뜨거운 사랑이 얼굴을 감싼다. 비에 젖어 푹푹 등산화가 빠지고, 산비탈에 미끄러져 엉덩이가 아파와도, 그분들께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깊숙이 가슴에 스며들어, 먹먹한 채로 걷고 걸었다.
운무와 운해로 백화산을 향하는 길은 안개뿐이었지만, 목자가 설명으로 보여주신 풍경은 그대로 본 듯 눈앞에 상상이 된다. 지금 내 앞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지만, 굳은 믿음과 기도가 있어 주님을 느낄 수 있다. 백화산 정상을 코앞에 둔 전망대 정자에 둘러앉아 산상미사를 드리니, 신부님 산상강론이 곧 주님의 말씀이다.
“여러분, 박해시대 순교자와 지금의 우리들은 신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숨어서 신앙 생활하는 그 어려운 시기에 희생적인 방문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강복을 주시는 신부님께 교우들은 얼마나 많은 걸 드리고 싶었을까요. 하물며, 신부님보다 대단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목숨인들 바치고 싶지 않았을까요? 우리라고 순교자들과 아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주님께서 뜨겁게 오시도록 신앙에 충실하게 되면, 우리도 주님께 자신을 봉헌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슴으로 받아 모시는 산상 영성체와 신부님 강복에 신비스러운 기쁨과 행복이 피어난다. 목자가 안내해주시는 길을 따라 험한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삶의 희망이 솟구친다. 복잡한 마음덩어리 하나를 잘 내려놓은 근사한 순례길이다. 축복받은 나, 이 감사한 마음이 힘든 이들 위해 쓰여 지길 기도하며, 꼭 실천하려 마음먹는다.
*서울에서 어둠에 찾아온 문경성당
*한실 교우촌에서 백화산 출발하며
*양들의 목자 정도영베드로신부님!
*운무와 운해 속 산수화 풍경들
*목자께서 손의 가시를 빼내주신다
*운해 속 산상미사 감동이 밀려오고
*양들은 목자의 산상강론에 젖는다
*산상에서 포도주로 마음을 데우고
*삼각봉 백화산 정상, 운무에 가려도 신부님 설명에 보인다. 보여!
*한실 교우촌 성지를 방문하고
*누리장나무 꽃이 보석을 안겨주고
*보랏빛 칡꽃이 깊은 산속에 곱다
*백화산 순례길 종주, 행복기운 가득 퍼지는 가운데 완주하다.
첫댓글 지난 9월 하순 경, CPBC가톨릭평화방송에서 ‘160년만의 만남(깔레 신부님과 복자 박상근 마티아)’제목의 특집 다큐를 만나보았어요. 순례자들과 동행했던 그 우정의 길 만남의 이야기가 펼쳐지니,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신앙과 인성의 뜨거운 우정, 두 분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보고 다시 봐도 감탄과 감동을 자아냅니다. 깔레 신부님의 고향을 찾아 11월에 프랑스로 순례를 떠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