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욱스 부르그 종교화약과 낭트칙령의 비교하라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이후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성장한 위그노는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던 프랑스 왕정에 의해 계속하여 탄압받아왔다.[4] 1562년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해 위그노의 권리가 일부 인정된 상제르맹 칙령이 선포되었으나 양측 모두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고, 가톨릭 측이 위그노를 살해하기 시작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5]
위그노 전쟁은 이후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570년 양측은 휴전을 맺고 화평의 증거로 위그노인 나바르 국왕 앙리와 가톨릭 진영인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사이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합의하지만, 앙리 2세의 아내이자 신부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결혼식에 모여든 위그노를 한번에 없애기로 결심하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일으킨다. 신랑은 간신히 살아남아 억류되었고 양측은 다시 전쟁을 벌이게된다.[6]1589년앙리 3세가 암살당하자 위그노전쟁은 왕위계승전의 양상을 띄고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잉글랜드는 위그노 측을 지지하였고,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지하였다.[7]
나바르의 앙리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기로 하고 낭트 칙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낭트칙령의 내용
가톨릭은 프랑스의 국가교회이다.
위그노도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위그노는 예배의 자유를 가진다. (단 파리를 포함한 파리 반경 5마일 이내와 주교좌나 대주교좌가 있는 도시는 예외로 한다.)
위그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한다.(학교, 병원, 양노원, 고아원, 구빈원 사용가능)
위그노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철폐한다.(정치인, 공무원 허용)
위그노의 외세와 동맹금지
위그노도 국가에 교회세 납부 할 것.
낭트 칙령이 선포됨으로써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 이후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는 엄벌에 처하며, 이를 밀고한 자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수여하는 개신교 탄압 법률은 폐지되었고,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9]
낭트 칙령의 선포로 위그노 전쟁이 종결되었다.
아욱스부르그 화약; 종교전쟁 결과 1555년 9월 25일에 도이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파와 가톨릭파 사이에 맺어진 화약. 이 조약에 의하여 신구 양 교파의 싸움은 신교파의 승리로 돌아가 두 파의 대립은 일단 가라앉았다
아욱스부르그 화약과 낭트칙령의 비교
둘 다 공존의 원칙에 근거한다.
아욱스부르그 화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구역을 분리함으로 공존의 길 모색
낭트 칙령은 같은 지역 내에서 공존 허용
아욱스부르그 화약을 통해 독일에서는 영주권 강화[영주가 통치하는 중세적 봉건제와
기독교 신권 질서의 자리에 근대적 주권국가가 대신 들어선다]
낭트 칙령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 (프랑스가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구 프롱드의 난 이후 콩데공의 제2의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는데 이를 마자랭이 평정함으로 인해서 모후 안과 루이 14세는 영광속에서 파리로 돌아오며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됨.16세기 말경 프랑스는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강력한 정치를 갈망.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봉건제도가 붕괴됨에 따라 중앙 집권적인 왕권이 자리잡음. 루이 14세는 전형적인 절대 왕정을 확립하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전 유럽에 군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