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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淸(명청) 교체기의 대만 |
대만의 역사는 명청 교체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당시 활발했던 동서양의 교류와 동양 삼국간의 교역을 배경으로, 정성공은 대만을 장악하고 만주족의 청제국에 대항했다.
정성공은 1624년 福建(복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명조의 지방관리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복건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군벌이었다. 당시에는 필리핀의 마닐라와 중국의 마카오 및 일본의 琉球(류구)열도간에 교역이 활발했으며, 그 중간지대인 복건과 대만 부근의 해상권은 그의 수중에 있었다.
정성공이 출생했던 17세기경은 서양과의 빈번한 접촉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교류가 매우 번성했다. 이미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으며, 당시의 해양대국인 스페인은 동북아시아와의 교역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 하나의 해양대국인 포르투갈도 이미 중국의 마카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교역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부산을 떨었다.
일본도 전국시대에 이미 일부 다이묘(大名(대명))들이 국제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통일을 성사시킨 토쿠카와(德天(덕천))정권 아래서도 비록 쇄국령은 실시됐지만, 나가사키(長崎(장기))와 류쿠열도의 히라도(平戶(평호))에서만은 해외접촉이 계속 허용됐다. 이리하여 필리핀,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교역이 16세기 후반부터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일찍부터 상혼이 발달했던 중국인들이 놓칠 리 없었다.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그들은 사무역을 활발히 전개 했으며, 이들의 사무역이란 결국 국가에 의go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불법적인 밀무역일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지역의 삼각무역 체계에서 대만이라는 섬이 차지하는 지정학적 비중은 매우컸다. 서양인들은 일찍부터 대만에 눈독을 들였고, 해양대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가 17세기 초반 결국 이 섬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양인들은 타이완이라는 칭호보다 포르투갈어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포모사(Formosa)라는 명칭을 오랫동안 사용해왔으며, 현재도 그렇게 표기한 서양책들이 많다.
정성공이 태어났을 때 명조는 이미 망해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마침내 李自成(이자성)(1606-1645)이 이끄는 농민군이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만주에서 일어난 청제국이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혼란에 빠진 중국에 대한 정복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드디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격파하고 북경을 장악한 청조는 남쪽으로 피신한 망명정부인 남명정권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정성공의 아버지는 명의 유신으로 망명정권과 함께 청에 대항했다. 이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남명정권의 수도인남경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남경의 망명정권이 붕괴하자 그는 다시 복권으로 돌아왔다. 이때 또 다른 망명정권이 福州(복주)에 세워졌고, 이들 부자는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특히 정성공이 抗淸(항청)에 적극적 의지를 표명하자 이에 감복한 망명정권의 황제는 그에게 주씨의 성을 내렸다.
마침내 청군은 명의 망명정부를 직접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망명권권희 황제는 무기력하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때 정성공의 아버지는 청에 투항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최후까지 만주족에 저항했다.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정성공은 청조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을 모았다. 그의 군대는 복건은 물론 江蘇(강소)와 浙江(절강) 일때까지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처한 저항궁은 곧 한계를 느꼈다. 결국 장기적인 항전을 위해 그는 대만으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미 대만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돼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됐다. 마침내 그는 1661년 2만5천명(일설에는 4만명)을 이끌로 대만수복 전투를 개시해 약 1년만에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승리로 끝맺었다. 이제 대만은 39년의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 중국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대만을 장악한 후 이를 근거지로 청조에 대항하던 정성공은 1662년 사망했다. 정성공의 아들에 의해 계승된 정권은 대만에서 웅거하며 계속 저항전을 폈다. 특히 三藩(삼번)의 난에 대만정권은 적극 동조하여, 한때마나 복건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정권은 다시 정성공의 손자에게로 넘어갔지만, 곧 이어 내부분열에 시달렸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청정부는 막대한 뇌물을 이용하여 내부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드디어 3대동안 지속됐던 대만정권은 1683년 손을 들고 말았다.
대만이 청에 복속된 후, 200여년간 본격적인 농업이민이 전개됐다. 그들은 주로 복건지역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복건지역의 농민들이었다. 대만에는 이들 복건 출신 외에도 廣東(광동)에서 건너온 客家(객가) 사람들이 전체 주민의 약 10% 가량을 차지했다. 이들 이주민들은 대만의 황무지를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