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宗家
김용준/ 수필가
해마다 음력 5월 13일이면 11대 조부 문경공(휘 집) 신독재 선생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러 종가에 간다. 불천위란 임금으로부터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일반적인 제사와는 격이 다르다. 오후에 부산을 출발하여 해거름이 되어서야 충남 연산 종가에 도착하여 사당에 절을 올리고 종손과 인사를 나누었다. 종부가 차려준 저녁상을 물리고 선대로부터 전해온 수백 권 교지와 문집이 고이 보관된 사랑채에 들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묵향은 평생을 서책에 묻혀 사셨던 11대 조부를 떠올리게 한다. 종손과 밀린 인사를 나누고 열린 봉창 사이로 툇마루를 바라본다. 바깥은 어느새 노을이 마당 석등에 깃들어 불을 밝히며 제사준비에 바쁜 걸음을 비춘다.
보통 장손 집안을 종가라고 하는데 정답은 아니다. 수십 대를 이어온 장손 집안이라도 역사학자와 보학연구가들이 거론하는 인문학 관점 몇 가지 기준에 맞아야 한다. 첫째, 부조지전不祧之典이라고 하는 불천위로써 국가에 기여한 공로와 업적이 탁월한 자에게 임금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과 함께 후손에게 벼슬과 토지(사패지)를 하사한다. 정승이라도 불천위가 아니면 국법으로 4대 이상 제사(4대 봉제사)를 지낼 수 없다. 둘째, 정2품 이상 벼슬을 지냈거나, 공적을 인정받아 시호(문원공, 충무공 등)나 봉작(고령군, 달성부원군 등)을 받은 경우. 셋째, 국가가 아닌 지역사회로부터 인품과 학문을 인정받아 향천지위鄕遷之位에 오른 경우. 넷째, 스스로 덕을 쌓아 존경을 받는 경우로 경주 최부자댁이 해당한다. 몇 해 전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를 지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종가의 종부를 모두 초대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를 통틀어 50여 종가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종가의 살아있는 권위와 상징은 종손宗孫과 반려자인 종부宗婦이다. 문중의 모든 행위에 무한 책임을 지는 종손은 종가를 돌보는 것을 우선함으로 구도자 역할과 견주어 별반 다르지 않다. 종가를 지키고 선조 묘소를 돌보며 지손支孫들을 횡적으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통해 가문의 안정과 번영을 갈구한다. 그러므로 지손은 가문 중심인 종손을 나이와 항렬을 떠나 존경하고 예의로써 받들어야 올바른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안동 모 종가에서 나이 지긋한 지손이 새댁인 차종부에게 반말을 하였다가 문중사람들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종가에는 종손이 거주하는 종택宗宅과 가묘家廟인 사당이 있다. 사당은 선조 신위를 모신 신성한 공간으로 종가를 방문하는 지손들이 먼저 예를 올린다. 우리 신독재 종택 규모는 솟을대문에 행랑채 네 칸과 ㄱ자 모양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는 본채, 그리고 충남도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사당이 전부로 단출하기 그지없다. 처음 종택을 방문한 사람들은 요즘 총리급인 종1품 숭정대부를 지내고 효종임금과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장유, 최명길 등 조정의 기라성들을 배출한 스승 가옥이 오늘날 18평 임대아파트 수준의 한빈함에 놀라워한다. 여느 양반가에나 있는 그 흔한 별채 누각도 없다. 그러나 사당은 선생이 불천위인 까닭에 부조묘不祧廟로 다른 한옥에 없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나라에서 성역을 표시하여 잡인 근접을 막고 고관대작이라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다해야한다는 표식이다.
종가에서 치르는 큰일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사를 받들고 종가를 찾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해야 하는 것이 양반가 예법이다. 따라서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려면 가양주家釀酒를 빚어야하고, 음식을 요리하는 다양한 장을 담아야 한다. 우리 종가에서 빚은 가양주를 마시면 다른 곡주에 비해 맛과 향이 깊고 그윽한 것 같다. 그리고 안채 뒤뜰에는 3백여 년을 내려온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담은 어른 몸집만한 옹기 수십 여동이 즐비하다. 종가 양념으로 만든 추어탕을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종가를 방문할 때마다 연로하신 종부를 괴롭힌다. 노종부의 고단하지만 보람도 있는 종부살이가 하루를 갈무리하는 석양처럼 옹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장독대에 가득하고 짙은 감청색 기와담장에 질박하게 어울린다.
연산에 우리 종가 터를 잡은 분은 형조판서를 거쳐 충청도출척관찰사를 역임한 신독재 선생 9대 조부이시다. 서울 황화방인 지금의 중구 정동 옛 대법원 자리에서 태어난 선생이 낙향하게 된 것은 광해군 때이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 등이 아버지 문원공(휘 장생) 사계 선생을 역모로 옭아맸다.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인목대비 폐모사건과 영창대군 살인사건 등을 보고 부자父子는 인륜이 끊어진 세상을 등지고 지금의 종가 아래 숲말에서 학당을 열어 오로지 학문에 깊이 정진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당시 제자들이 아버지를 노선생, 아들을 선생이라 불렀다. 그 연산학당이 효종임금과 현종임금으로부터 두 번 사액을 받은 돈암서원이 되었으며 퇴계의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나라에서 학문업적과 인품을 기려 동국 18현인 문묘와 종묘 효종실에 배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종가는 많은 피해를 보았다. 호남선 철길이 종가 코앞을 통과하고 있다. 종가와 돈암서원이 자리한 임리 지세가 풍요의 상징인 돼지형국이라 일제가 철로를 이용하여 지맥을 끊어 충청도 유림의 상징이자 지주인 돈암서원과 종가를 훼손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을 흠모하는 사람들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며 80년대까지만 하여도 기차를 타고 가던 노인들은 종가 앞을 지날 때 좌석에서 일어나 사당을 향해 절을 올렸다. 충청지방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아직도 그 당시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신독재愼獨齋는 선생 호이자 종가 당호이다. 신독愼獨이란 중용에 나오는 글귀로 ‘낮에는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잠잘 때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생은 평생을 신독을 실천하셨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충청도에서 유탁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유탁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독재 선생 집을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인조임금이 이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하고 피할 줄은 안다.” 하며 감복하였다고 전해져온다. 종가에는 선생 자취가 3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가끔 옆길로 이탈하는 나를 곧추세우곤 한다. 제사를 모실 때면 내 나름 고해성사를 한다. 그동안 잘못된 행동거지를 고백하며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회초리를 내려주시라고 마음으로 청한다. 성심을 다해 모신 제사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마쳤다. 제사를 모셨던 자손들이 모두 둘러앉아 넉넉한 마음으로 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