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대장의 일본 순회집회 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에 정령 허가두사관(Colonel Hoggard, 영국인)에 의해 한국선교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 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어, 1908년 11월 22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번째 교회 (영문, Corps)인 서울 제일영(현 서대문 영문)이 당주동에 개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초대 한국사령관인 허가두 정령의 8년간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09년부터 문서선교로 구세공보가 발행되었으며, 절제호라는 특집호를 발행하여 금주,금연의 절제운동의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이로써 무르익은 절제운동이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두캠페인과 문서 선교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사회사업은 1918년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아동구제시설인 혜천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윤락여성을 위한 여자관과 교육사업인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924년부터 천재지변에 구호를 실시하는 긴급구호를 시작하는 등 선교에 못지않게 사회사업에도 활발한 활동을 펴서 구세군에 대한 관심과 좋은 호응을 갖게 하였습니다. 한편 1928년부터는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자선냄비운동이 시작되어 전국민적으로 사랑 심기운동을 펼쳐 좋은 이웃들을 많이 만들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제 하에서의 선교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41년 일본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 사관들은 모두 귀국조치 시키는 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1943년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구세군은 강제 폐쇄조치되어 지하교회로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해방 이후 1947년 새로운 사령관의 부임과 더불어 사업이 재개되었습니다.
이때 시작한 의료사업(영동 구세병원)은 미국인 리차드 박사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회사업에 새로운 장을 여는 듯 했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으로 당시 구세군 사령관이던 로오드 부장은 피납되었고, 진주영문 담임 사관이던 노영수참령이 순교당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많은 피해를 당하는 수난이 계속되었습니다.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한국구세군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 하는 교단으로 인식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동안 20명의 사령관이 바뀌어 오는 동안 현재 220여개의 영문(교회)과 100,000여명의 교인, 지역사회복지 시설 220여개, 전문 사회사업시설 47개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선교와 사회사업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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