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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요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고요[koyo]
I. 환경적, 생태학적 사유의 등장 I-1. 사회운동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환경문제 I-2. 생태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철학적 방법들 II.현대 생태사상의 특징적 경향 II-1. 현대 생태사상의 네 가지 흐름 II-2. ‘이성비판’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III.철학적으로 건전하고, 실천가능한 생태관을 위한 종교의 역할 III-1. 보편윤리의 한계와 종교 III-2. 종교와 윤리의 상보성 IV.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 IV-1. ‘불교생태학(?)’, 그 개념에 대하여 IV-2. 현대, 탈현대, 반현대의 조건 하에서 ‘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 V.결론―생태학적 불교의 합리성을 찾아서 |
I. 환경적, 생태학적 사유의 등장
I-1. 사회운동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환경 문제
1964년 침묵의 봄으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던 레이첼 카슨(R. Carson), 시(詩)를 통해 환경파괴를 고발함으로써 환경적 관심의 대중화에 기여했던 시인, 게리 시나이더(Gary Snyder), 대지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를 주장했던 앨도 레오폴드(A. Leopold) 등 미국의 환경론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구적인 환경사상가들, 그리고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 슈마허의 얇은 에세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등은 환경오염, 생태계 위기에 대한 감성적 반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환경(자연)보존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환경적, 생태학적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한참 뒤였다. 1970년대 후반 조오지아대학 에슨스 캠퍼스(University of Georgia Athens), 철학과를 중심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1979년 이 대학의 유진 하그로브(E. Hargrove) 교수가 창간한 계간잡지, 환경윤리(Environmental Ethics)는 환경오염에 대한 생물학적, 화학적 원인규명에서 탈피하여 윤리학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환경윤리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같은 해에 나온 패스모어(J. Pass- more)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환경문제에 대한 윤리학적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처럼 80년대부터 생태철학, 환경윤리는 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교재도 교육용 문헌의 형식을 벗어나, 학술 문헌으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히 PPM, BOD 등 화학적, 생물학적 진단과 처방이거나, 아니면 시적(詩的) 감성에 호소하여 환경파괴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약하자면 환경문제, 생태학적 문제에 대한 반성은 맨 먼저 미국에서 일어났고,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환경적 자각은 미국인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의 실패한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 세력이 사회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로 환경문제를 선택함으로써, 환경문제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15년쯤 지나서 철학, 시회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아카데미즘으로서의 환경사상, 생태사상이 어떤 방법론과 지향점을 가지고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I-2. 생태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철학적 방법들
I-2-1. 응용윤리학적 접근 ― 맥클로스키, 애트필드 : 응용윤리는 현대의 과학-기술적 지식에 근거한 인간의 집단적 활동의 부작용에 대한 도덕적 문제제기이다. 기업 활동이 복잡해지고, 전문직 종사자의 의사결정이 전문화되면서 이들을 규제할 행위준칙으로 기업윤리, 직업윤리가 생겼듯이, 환경윤리 역시 인간의 대자연 활동의 부작용을 규제하는 포괄적-규제적인 이념이라면, 여타의 응용윤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논구될 수 있다고 보고, 생명-의료윤리, 기업윤리, 직업윤리로 대표되는 응용윤리의 한 분야로, 기왕에 잘 정립된 응용윤리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환경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환경윤리가 윤리학의 한 부분이 되려면 전통의 규범윤리학적 방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기존의 윤리학 이론과 원칙에 준해서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문제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법을 선호하는 논자들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사유의 틀을 만들고, 거기에 준해서 새로운 윤리적 표준을 세울 필요도 없이 응용윤리학의 방법으로도 충분히 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생태계에 관한 제반 발견들은 윤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고, 생태계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는 도덕적 의무와 권리에 대해 보다 정확한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온건한 방법을 택한다.
I-2-2. 메타윤리학적 접근 ― 베이어드 캘리코트, 마크 세고프, 로버트 엘리오트 : 도덕적 논변은 어떤 태도 표명이나 언명에 대한 처방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즉 도덕적 논변은 진리를 희구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기도 하다. 도덕판단은 개념적 진리와는 상관없이 정당하게 도출될 수 있다는―이른바 ‘도덕적 자연주의’에 반대해서―메타윤리학적 설득전략을 펴는 논자들은 예를 들어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가 도덕적 진리일 수 없다는 도덕적 객관주의를 주장한다. 메타윤리학적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도덕적 정서를 진화의 산물로 이해하고, 내재가치는 인간이라는 주체에 의해 대상에 투사된 것이며, 인간 주체에 의해 대상은 적절히 반응하고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도덕적 상관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이들은 도덕적 지위(moral standing), 도덕적 중요성(moral significant), 도덕적 권리(moral rights) 등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다른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 도덕적 지위를 줄 수 있는가?’에 답하고자 한다. 규범윤리학의 차원에서 어떤 동물의 이익관심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살아갈 서식지도 보존해야 한다. 인간의 욕구만이 아니라, 몇몇 동물의 욕구 충족도 극대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오직 메타윤리학의 차원에서 도덕적인 배려라는 개념이 인간 이외의 존재의 이익관심을 계산에 넣을 때에만 가능하다. 캘리코트의 내재가치(intrinsic values)개념에 대한 찜머만(Michael Zimmermann)과 롤스톤의 비판 역시 메타윤리학적이다. 찜머만은 캘리코트의 가치 객관주의를 비판하면서 메타윤리학적 가치 객관주의를 지지한다: 그에 의하면 자아(the self) 개념을 확대함으로써 자연의 전체성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가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쟁은 여전히 남는다. 메타윤리학적 객관주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가치문제에 있어서 진리 주장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주장의 총합이 어떻게 지식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주장이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지는 않을까? 여하튼 사실로부터 가치에로의 이행은 가능한 것일까?
I-2-3. 서구 전통철학과 모더니티 비판 ― 린 화이트, 존 패스모어, 폴 테일러 : 베이콘과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 과학-기술문명의 무책임과, 19세기 유럽형이상학의 이성중심주의 비판은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가운데 즐겨 사용하는 화두였다. 이들은 근대문명의 탈규범성, 책임의식의 부재를 지적하고, 그 원흉으로 기독교, 근세철학, 근세 자연과학을 지목한다. 이들은 철학의 구조변경을 의도하는데,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우려한다. 칸트와 니체와 하이데거가 했던 식으로 ‘합리적 정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전통 위에서 모더니티 비판이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I-2-4. 새로운 자연형이상학의 정초를 시도하는 사람들 : 환경오염이 심각해지고, 생태계 전반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맨 먼저 등장한 것이 유럽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런 경향은 한편으로는 반과학적 경향을 단호히 배척하지만, 동시에 과학을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을 부추기고, 2O세기 과학을 다양한 신비주의, 유신론, 영성주의와 결부시키려는[이를테면 카프라] 경향에 대해서는 항상 관대하였다. 이런 경향은 잘못된 생태중심적 신비주의(ökozentrische Mystizismus)로 귀결되고 만다. 여기에는 ① 유사-종교적 신비주의, ② 생태학적 신비주의,③ 과학의 형이상학화를 의도하는 포스트모던 과학주의 등의 부류가 있다. 에렌펠드(David Ehrenfeld), 슈마허(E.F. Schmacher), 얼리히(Paul Ehrlich), 시나이더, 네스(Arne Naess), 세션즈(George Sessions), 폭스(Warwick Fox) 등이 여기에 속한다.
I-2-5. 아시아적 사유전통에의 호소 ― 캘리코트, 엠즈, 데이비드 홀, 정화열, 박이문 : 이들은 전통의 서구 형이상학은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태철학은 편협한 대증요법적인 응용윤리보다는 서구의 도덕적-형이상학적 가정을 전면적으로 비판, 개조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그 치료약을 동양에서 구한다. 서구의 환경적 재앙을 치유하려면 서구의 자연관으로는 안되고, 동양적 전통이 대안이 되는 세계관과 일련의 가치를 준비해 준다고 생각하고, 동양적 세계관이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II. 현대 생태사상의 경향
II-1. 현대 생태사상의 네 가지 흐름
생태계 위기, 환경오염에 대한 학술적 관심은 근세의 과학, 기술, 역사,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의 환경론자, 생태주의자들에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 환경사상이 사회운동으로부터 대학으로 전파되었다면, 환경문제, 생태계 문제의 해결은 최종적으로 이성비판, 이성 거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아카데미즘의 모더니티 비판은 역으로 환경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생태계 위기에 대한 학자들의 담론이 이런 경향을 부추기면서, 포괄적인 의미의 현대 생태사상은 반-이성, 반-인간, 반-기술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저술가들[특히 후기 구조주의자], 여성주의자들, 생태주의자들은 이성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뜬구름 같은 것으로 규정한다. 오늘날 이성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설령 그들이 고전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세계화 시대의 다문화주의를 거부하는 수구적이고 독단적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철학과 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이와 같은 이성 불신에는 다양한 조류가 있는데, ① 이성철학 때문에 감정이 억압당하고, 육체가 배제되고 있다는 불평, ② 이성만으로는 인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으며, ③ 이성 때문에 인류문명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대안을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 이성을 해체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성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선택하게 될 대안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노선이 될 것이다: ① 비합리주의로 뛰어드는 방법(니체적 비합리주의), ② 이성과 다른 것(Das Andere) [관념에 대한 사유라는 의미의 이성철학에 반대되는]으로 철학하기: 몸의 철학, 감정의 철학, 자아의 철학, ③ 이성의 파괴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 ④ 동양의 지혜술[명상이나, 참선, 요가, 주술, 신비에 뛰어 드는 방법] 등이다. 아래에서는 그 각각을 간단히 살펴 본다:
II-1-1. 니체적 비합리주의 : 니체는 기독교와 형이상학에 기대어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고상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고 보고, 서양의 철학적 사유전통과 거기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전반에 만연된 주체의 자아확대라는 질병을 비판한다. 그는 객관적 진리에 근거한 전통 철학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성이란 “영리한 동물들이 발명한 하찮은 별”에 불과하며, 이성의 발견이라는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거짓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무참히 매도한다.
니체의 노골적인 인간 경멸과 이성 모독, 은유적 진리관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니체의 독특한 정신과 화려한 문체는 우리를 쉽사리 그의 문학적 궤도 속으로 끌어들이고, 박력있고 생기에 찬 결론으로 미혹시킨다. 실로 물결치는 듯한 은유와 가차없는 언어의 화려함은 우리의 넋을 잃게 만든다.
그는 19세기의 어떤 사상가보다도 탁월한 솜씨로 상대주의―진리의 확실성을 고민하지 않는 주관적·언어적인 상대주의―를 요리하여 자기 사상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니체는 진리를 언어적 전통으로, 사실을 해석으로 환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진리와 사실을 철저히 주관화하고 어떤 객관적인 역사 개념도 거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에게 이성사(理性史)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하고, 변덕스럽고,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지탱해주고 있는 이성 경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성 경멸은 문화적 퇴폐를 낳는다!
II-1-2. ‘이성과 다른 것’으로 철학하기 : 이는 이성 대신에 비합리, 실재 대신에 비실재, 도덕 대신에 악덕, 논리적인 것 대신에 아이러니, 한마디로 이성의 반대편을 주목함으로써 이성의 위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들은 인간의 몸, 환상, 욕망, 감정에 충실함으로써 인간을 이성보다는 자연에 더 가까이 서게 할 수 있으며, 이성의 자율과 자결이라는 계몽주의적 결론과는 달리, 이성은 이성 그 자체로서는 규정될 수 없고, 언제나 다른 것(Das Andere)과 구분, 대비, 논쟁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몸-, 감정-, 자아의 철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확실히 이성에 머물 수 있으며, 행위의 능동과 수동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철학은 자신의 사고와 느낌을 주체에게 내 맡기지 않으며, 몸-의존적, 감정-의존적인 주체(자아)를 자각하고자 한다. 데카르트 이래로 인간을 지배해 온 확실성에 대한 사고라는 집단적 정신착란, 자연파괴를 돕는 자연과학, 고도한 기술문명이 양산해 놓은 낯선(소외된) 문화에 직면하여, 이들은 이런 식으로 이성의 범주를 확대함으로써 이성인간의 자기도취적인 인간상을 허무는 새로운 인류학적 이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들은 차이(Differenz)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다른 것에만 주목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도 달리 있음(Anderssein)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성철학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반쪽 철학이며, 이성적 논증구도에 의지해 있다.
II-1-3.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 : 이성에 대한 공격 중에서 가장 학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환멸―그것은 1차 대전 동안의 독일 제국에 대한, 그리고 실패한 사회주의 운동이다―과 시대의 우울―그것은 생기에 찬 산업화 이전의 사회로부터 창백하고 음울한 상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문화적 과도기에 대한 우울이다―을 노래했던 니체와 하이데거를 대부(代父)로 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관계를 해체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반동적 경향에 대한 똑같은 환멸과 우울의 표현이다.
이성이 진리를 확정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성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이성은 단지 사회의 인위적 구성물일 뿐이며, 단순히 사회적 책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역사마저도 부정함으로써, 현존하는 윤리적 준거와 사회적 의미를 송두리째 박탈해 버린다. 이들에 의하면 문명은 더 이상 이성적 성취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와 인간의 경험을 합리적이고 자유롭게 만드는 이성, 과학, 테크놀로지의 힘에 대한 믿음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기말 이후로 확산되던 아노미와 절망감을 반영하는 허무주의이며, 이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용인하고, 오직 주어진 조건 속에서 별 탈 없이 지내도록 방조는 해체와 상대화의 이데올로기이다.
이성, 논리적 정합성, 역사의 의미를 폄훼(貶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에게 비판적 시각을 제시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 변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 줄 수가 없다. 이는 상대주의를 만연시키고 이성철학자들이 착수한 보편주의적 기획을 해체함으로써 사회적 근시안을 산출할 뿐이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받고 소외된 문화 집단이 겪는 좌절감에 대해 개인적인 저항 수단을 주는[약간의 지적 사기술을 함축한] 나르시시스적 모험일 뿐이다.
II-1-4. 동양의 지혜술에 의지하는 방법: 이들은 서구 문명의 과도한 이성중심주의, 합리성-우선주의로는 현재의 문명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서구의 위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동양적 전통이 대안적인 세계관과 일련의 가치를 준비해 놓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동양사상은 병든 서구를 치유하는 아주 이국적인 지적(知的) 특효약이라는 동양적 반이성(半理性)주의는 동양 종교에 대한 서구적 신비화이다.
신비주의는 대체로 합리적 분석을 초월해 있다고 공언한다. 명백히 반(反)이성적인 이 사조는 논리적인 생각보다는 믿음에 호소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관과 느낌에 귀 기울이라 하고, 세계에 대한 신비의 감정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속에서 살 것을 요구한다. 하나같이 이성혐오적인 허무주의적, 유신론적, 생명중심적, 포스트모던적, 비합리주의적인 주장은 인간의 자기진보의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이성의 권능을 비웃는다.
II-2. 이성비판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어중간한 욕구불만과 불평하는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이성을 경멸하고 빈정거리는 태도를 뭉뚱그려 나는 신비주의(mysticism)라 부르고자 한다. 이성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이 모든 신비주의적 경향은 지적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 이들은 직관과 영성에 대한 노골적인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한 합리적 탐구가 불가능한 유사-종교철학이며, 동시에 반테크놀로지, 반문명적인 성격이 강한 이들의 견해는 인간성 자체를 거부하고, 원시 자연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반인간주의다. 현대의 인간 조건에 대해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성은 소여(所與)가 아니라 구성되는, 필연적으로 성취되어야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며, 이성은 최종적으로 충만되지 않으며, 충만될 수도 없는 것이기에 합리성으로 풀어야할 영원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유의 극치인 과학은 기술을 만들었고, 기술이 지배하는 산업문명은 인류에게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동시에 유례없는 정신적 빈곤을 선사하였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단지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동물이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이성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태학적 이성을 회복할 것이다.
III. 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
III - 1. 불교생태학, 그 개념에 대하여
먼저 이 복합명사가 영어와 한글의 어법상 온당한 표현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① 불교 생태학(buddhist ecology)을 “우리가 사는 중생세간과 기세간,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속에서 연기와 자비의 관점 속에서 연구하는 학문”으로 “욕망의 절제, 문명과 자연의 상생, 생태계에 대한 몰이해와 무자비의 관점을 연기와 자비의 생태관으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 의도된 불(교)학의 한 분야로 정의할 경우, 불교+생태학은 잘못된 결합이다. 왜냐하면 불교 생태학은 영어식 표현에 있어서나 우리의 복합명사 사용규칙에 비추어 보거나, 불교의 한 영역이 아니라, 생태학의 한 분과이기 때문이다.
② 생태학이라는 단어를 어떤 전제조건 없이 사용할 경우, 유기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또 이들이 속한 환경에 대한 관계를 탐구하는 생물학의 하부 분과를 지칭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런 전제 없이 불교+생태학이라고 쓰면, 순수 인문학인 종교학이 순수 자연과학이 되어 버리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학문분야가 탄생하게 된다. “동국대학교를 불교의 생태관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연구되는 불교 생태학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불교가 생태계 위기에 답하는 유력한 철학사상이자 유일한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원래의 의도는 교리의 발생학, 경전 분류학, 종교 행위의 생리학으로 되어 버릴 우려가 있다.
③ 물론 필자가 불교 생태학이라고 명명하는 바, 언외(言外)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 환경 파괴를 고려하면 생태학적 사유에 기초한 불학 연구는 다양한 응용불교의 분과들 중에서 아주 유력한 분야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이 세상 모든 학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지위에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으며, 다른 학문 분야가 그런 지위를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심리학, 불교경제학, 불교정치학, 불교아동학, 불교생태학 등 불학의 영역을 무한 확장하는 일은 의지는 고상하지만,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현재 없는[있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이 미미한]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기왕에 잘 조직된 응응불교의 방법론에 기초해서 생태학적 불교가 비록 문제 영역은 작지만, 치밀한 논증과 정당화를 통해서, 심층생태론, 사회생태론, 에코페미니즘, 사회생물학 등 잘나가는 서양의 대안들에 비해 이론적, 실천적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이 현실적일 것이다.
④ 불교는 종교학의 분과이고, 종교학은 인문학의 한 영역인 바, 인문학이 어떤 매개 없이 순수 자연과학과 동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가 원용하려는 것은 생태학이 아니라, 생태학적 방법론일 것이다. 그러므로 명사 생태학보다는 서술어로 사용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위에 인용한 우리 대학 총장님의 의지를 내가 옳게 이해했다면, 불교 생태학은 생태학적 불교(ecological Buddhism) [생태불교학(ecobuddhism)―줄여서 생태불교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제안일 뿐이다.
III - 2. 현대 ․ 탈현대 ․ 반현대의 조건 하에서 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
III-2-1. 현 대 :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말은 5세기 후반 기독교가 공식화되었던 로마의 현재를 과거의 이교(異敎)적 시대와 구분하는 용어로 처음 쓰였다. 그후 현대는 새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의도적 불연속성이라는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현재가 모방의 모델로 삼고 있는 한 시대[유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적·라틴적 과거]로 소급되는 시대 의식으로서 현대(modern, 혹은 modernity)는 시대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면서 동일한 용어로 거듭 사용되었다.
현대가 현재에 주목한다는 의미라면, 결국 전통과 역사에 의존한 설명과 이해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현대는 최종적으로 이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상화된 과거의 모방 역시 현대성(모더니티) 자체의 규범적 원천으로부터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성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현대성은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비판적-자기비판적 태도로 특징지어지며, 자기실현과 자기입법이라는 윤리적인 관념으로 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서로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하는 소위 주체의 원리가 성립된다. 생활세계의 무한 분화가 이루어지는 조건하에서 현대는 투명성, 친밀성, 신뢰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윤리적 삶에 위협을 가하는 사회적 분열의 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박탈과 위기라는 현대성의 부정적인 귀결을 보다 소상히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현대성의 긍정적인 성취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휴먼의 탄생을 예고하는 기술혁명의 절정기를 살고 있다. 모르는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는, 더 이상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것도 없는 이런 극단의 기술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러나 어떤 이념, 종교, 철학으로부터도 위안받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유토피아적 리쏘오스를 소진한 역사는 더 이상 가장 투명한 인간의 논리가 아니다. 이것이 현대의 조건이다.
현대의 조건 하에서 이기적인 유전자의 장난으로 구성된 이성은 금세기의 야만과 전체주의를 강화하는데 사용되었을 뿐이며, 역사는 의미 있는 무엇이 아니며, 진보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도덕은 인간을 자연과 결합시켜 주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악마적인 힘일 뿐이며······ 현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더니티의 위대한 성취를 타도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문명의 범형이 되고 있다.
III-2-2. 탈현대 : 오늘날 포스트모던하다라는 말은 엄격히 철학, 건축, 문학, 문화양식에 적용되는 학술적 개념이 아니라, 행동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화되었다. 탈현대는 현대를 비판하는 무기로 출발하였지만, 그 자체가 현대의 일부가 되었다. 이처럼 보편적 문화현상이 되어 계몽과 이성을 공격하는 탈현대는 사회가 야기하는 문제를 신비화함으로써 자신들의 병리 상태를 참을만한 것으로 만드는 굴종(屈從)의 이데올로기를 육성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상품화를 통해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관계를 해체하려는 경향에 대한 문화적 후유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다. 노골적인 인간 경멸, 이성 모독, 그리고 진리=메타포라는 탈현대의 등식은 사회적 반동을 낳고, 사회적 반동은 문화적 퇴폐를 낳는다! 프랑스 좌파 강단 비평가들의 시대정신에 대한 환멸은 그 자체가 퇴폐의 표본이다. 진리를 확정하는 통로인 이성을 의문시하고, 단순히 사회적 책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탈현대는 객관적 역사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현재의 윤리적 준거와 사회적 의미를 송두리째 박탈하고자 한다. 문명은 더 이상 이성적 성취가 아니며, 그래서 희망과 사회적 예지(叡智)의 기반이었던 진보의 이념은 빛을 잃어버린다.
탈현대는 사회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이성, 과학, 테크놀로지의 힘에 대한 신뢰를 전면 부인한다는 점에서 허무적 반인간주의다. 탈현대는 진보에의 희망, 진리의 객관성, 역사의 실재성, 세계혁명에 대한 이성의 역할은 그 지위를 상실하고, 역사에 대한 무관심, 사회적 정적주의(quiet- ism)와 사적인 삶으로의 퇴행을 조장하는 허무적 풍조를 키우는 한편, 공적 영역의 강화를 지향하는 행동주의적, 온정주의적 사고를 중화시키는 해체와 상대화의 이데올로기이다.
III-2-3. 세계화와 반현대 : 기든스(A. Giddens)의 정의에 따르면 세계화(Globalization)는 “국지적인 사건이 먼 곳의 사건에 의해 영향 받는 방식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연결하는 범 세계적인 사회관계의 강화”이다. 이는 사람들을 국지적 관계로부터 이탈시키는 동시에 광범위한 맥락에 매몰시키는 추상화 메커니즘이다.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신자유주의라는 경제논리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경제와 정치가 결합된 신자유주의의 결정적인 맹목성은 국가 단위의 정치 행위, 그리고 국가 전체가 경제적 합리성과 경제활동의 지배적 힘에 예속시킨다.
베버 이래로 현대의 핵심적인 성취는 정치와 민주주의가 경제에 대하여 독자성을 갖는 것이었다면, 신자유주의는 이런 현대성의 성취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경제 및 경제활동은 법적, 정치적으로 보증된 민주주의 하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현대와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을 포기하고도 위기에 직면한 경제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명백히 반현대(Antimodern) 프로그램이며, 역근대화의 전형이다.
III-2-4. 현대의 완성을 위한 생태학적 불교 :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필자가 생태학적 불교가 지향할 바를 언급하는 것이 어쩌면 불교학자들의 심층적인 연구를 호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장은 상식의 수준에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관점이며, 현재든 앞으로든 생태학적 불교의 주류 논변이 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리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의 인식 범위는 지구와 인간을 넘어선다. 예를 들면『구사론』의 인식론은 우리의 인식이 우주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의 완성을 위해 생태학적 불교는 출세간, 출출세간의 문제보다는 세간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자아와 세계의 연기적 이해, 정보와 의보의 상생, 무한히 이타적인 자비심, 보편자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보살도를 그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므로 불교는 그 교리적 근원에서부터 매우 환경친화적이고, 생태지향적이다! 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농암(聾巖), 상촌(象村), 연암(燕巖)의 저작 속에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구절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들이 자연주의자라거나, 생태시인이라고 말해서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선조들은 추수할 때 반드시 까치밥을 남기고 추수했으며, 콩을 심을 때에도 반드시 한 구멍에 3개를 심었는데, 이는 굼벵이(땅)에게 한개 주고, 까치(하늘)에게 한개 주고 나머지 한개만 사람이 먹겠다는 표현이라는 근사한 해석을 덧붙인 다음, 이를 근거로 우리 조상들은 “공생적 자연관”을 실천하였으며, 따라서 한국인은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다고 논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과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불교 경전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의 오류는 없다. 다만 그런 교리를 가슴에 아로 새기고 사는 한 불교인의 일상이 저런 경전적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심오한 우주적 진리를 터득한 사람에게만 인과관계가 보이는 그런 현묘(玄妙)한 사건이 아니다. 매우 상식적이고, 구체적이며, 대부분 현재의 과학적, 기술적 지식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불교는 무한한 것보다는 유한한 것에 대하여, 우주적인 것 보다는 지구적인 것에 대하여, 모든 생명계와 무생물계에 대한 긍휼(矜恤)보다는 사람에 대하여, 자손만대의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지금․여기의 쾌적한 환경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지침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모더니티는 이념(자유․평등․박애)이 허술해서 미완의 혁명으로 머문 것이 아니다. 모더니티는 이 이념을 곡해하고, 충분히 논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인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탱하는 이성을 합리적으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미완의 혁명을 완성하는 길은 서구적 합리성, 기독교적 합리성을 불교적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생태학적 불교는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V. 결론 ― 생태불교의 합리성을 찾아서
오늘날 합리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합리성에 대한 의심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세기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다양한 담론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합리성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합리성의 위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글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우리에겐 다른 합리성 말고 다른 무엇이 있는가? 서양적, 기독교적 합리성은 더 이상 교정이 불가능한가? 동양의, 동아시아의 합리적 사유는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생태불교의 합리성은 서양, 동양, 동아시아의 그것과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 이런 물음에 답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필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것이며, 설령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결론의 절에서 필자는 생태불교의 합리성이 어떤 사유패턴일지에 대한 대강의 어렴풋한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불교학자들에게 작은 영감을 주는―가능하다면―데 만족하고자 한다. 서구의 합리성은 개체론적이고, 논리적 질서로서, 과학적 기술적 사실을 해석하는데 유효하며, 동양의 합리성은 전일적(holistic)이며, 미학적(aesthetic) 질서로 표현되기 때문에 현상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유효하다.
동양적 합리성의 한 부분인 생태불교의 합리성을 고려함에 있어서 우리는 본고의 목적과 연관하여 보자면 사물의 이해와 분석, 타산, 연산 등 합리성의 모든 사용처를 두루 열거할 필요는 없다. 생태불교의 합리성이 서양적, 기독교적 합리성과 비교하여 자연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정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만 주목할 것이다.
서양의 합리성은 자연을 본래적(내재적)인 가치나 목적이 없는 필연적 관계이거나 관습적인 규정성이라는 중립적인 체계로 보기 때문에, 자연은 사실이지 가치가 아니다. 그러나 생태불교의 합리성은 영적․정신적 관점에서 자연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한다. 자연을 영적인 존재의 현시(顯示)이거나 영적인 실체에 뿌리를 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예를 들면 베단타철학]. 자연을 존중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내가 자유의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자유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한다. 서양의 합리성은 자연을 영적인 실체의 현상이나 외관으로 보기 때문에, 자유는 필연의 저편에 있는 무엇이다. 반대로 생태불교의 합리성은 자유의 영역에서는 자아(ego)가 소멸하기 때문에 자유는 필연으로부터 나오지만, 존재의 전혀 다른 차원에서 획득된다.
서양의 합리성은 자연은 실체와 분리, 대립해 있으며, 인간은 자연을 능가하고, 자신의 의지 아래 종속시킨다. 위대한 조각가라면, 대리석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일(working at)하지 않고,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서 예술가 자신이 돌멩이가 되어 함께 일한다(mit-wirken). 즉 대리석의 한계, 성질, 가능성을 두루 알고, 조심스럽게 배려하고, 돌멩이의 내면의 리듬[즉 돌멩이의 생명성]에 귀 기울인다. 이런 조각가를 우리는 위대하다고 말한다. 생태불교의 합리성은 바로 이런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처럼 자연의 정연함과 법칙, 그 넘치는 생명력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심미적 합리성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연과의 창조적인 조화 속에 있을 수 있다.♧
[요약문] 본고에서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주제를 다룬다. (1) 현대 생태사상의 등장을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여기서는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초기의 시각을 소개하고, 현대 생태사상의 특징적 경향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의 비판적 관점으로 ‘이성비판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다음으로 (2) 생태계 위기 시대의 종교의 역할을 다룬다. 여기서는 주로 보편윤리의 한계를 지적하고, 종교와 윤리의 상보성을 강조함으로써, 윤리의 실천으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논한다. 이어서 (3) 본 학술 세미나의 주제인 “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우선 ‘불교생태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 현대, 탈현대, 반현대의 조건 하에서 ‘생태학적 불교의 가능성’을 전망한 다음, 결론에서는 “생태 불교적 합리성”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끝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