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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상의 기후와 환경 칼럼
영화 [수라] 동영상 캡처
자연다큐 <수라>를 관람했다. 미군이 관리하는 군산공항과 인접한 갯벌, 수라의 아름다운 경관과 배수갑문 개방으로 회복되는 자연환경을 애절하게 기록한 황윤 감독은 미군의 실질적 소유로 돌아갈 게 뻔한 수라 갯벌에서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전한다.
세계 최장 방조제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 이후 가슴이 아파 차마 다가가지 못한 새만금. 거기에 아직 사람이 방문하고 머문다. 거기 보전해야 할 생태계가 있고 도요새가 찾아오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한 줄기 햇살이 되는 공간을 미래세대에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라 갯벌의 아름다움을 본 죄는 뜨거웠다. 지금은 사라진 옥구 염전으로 밀물이 들 때, 도요새들은 물결을 따라 귓전을 바람처럼 스치며 군무했다. 획 획. 가슴을 미어터지게 하는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한동안 말문 닫게 만든 새만금 갯벌은 이제 매립돼 없다. 단지 수라에 남았다. 가녀리게. 하지만 중국을 노려보는 미군의 공항으로 변할지 모른다. 살아나는 수라 갯벌에 다시 찾아오는 도요새마저 떠날지 모른다, 다큐를 보는 내내 먹먹해지더니 눈매가 뜨거워진다.
부리와 다리의 길이와 생김새로 먹이를 달리하는 도요새는 봄가을로 우리 갯벌을 찾는다. 영겁의 세월이 만든 드넓은 갯벌에 깃든 조개, 게, 갯지렁이는 다채롭고 무궁무진하다.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습성이 다르므로 도요새는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시베리아 벌판과 아무르강에서 호주와 뉴질랜드 해안을 봄가을에 무리를 지어 왕복해왔다, 가장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새라고 칭송하는 노래가 나올 수 있었다.
가을이면 겨울 혹한을 피해 시베리아를 떠난 도요새 무리는 우리 서해안의 갯벌에 앉아 기진맥진한 체력을 서둘러 회복해야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갯벌이 매립되었다. 매립한 자에게 공유수면의 소유권이 넘어가도록 규정한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이 매립을 부추긴다. 눈이 먼 자본과 권력이 앞다투며 도요새, 조개, 게, 갯지렁이의 터전을 탐욕스럽게 메웠다. 굴삭기로 모자라 폐유조선까지 동원했다. 이제 물고기들은 갯벌에 알을 낳지 못한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봄에 마도요를 만나야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비로소 생명의 춤을 추었는데, 요즘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광할해던 갯벌이 보기 어려워지지 않았나. 마오리족은 새만금 해창갯벌에 자신의 신을 모셨다. 그리고 우리 정부에 갯벌을 보전해달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마도요를 비롯해 수많은 도요새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백두대간에서 영겁의 세월 동안 풍화된 모래와 흙이 흐르고 흘러 쌓이고 쌓인 서해안의 갯벌, 그중 새만금은 당대에 모조리 메워 황금알을 독차지해야 할 터전이 아니다. 드넓은 갯벌을 터 삼는 다채로운 생물은 탄소동화작용과 먹이 사슬을 타고 반성했다. 뭇 조상에서 오늘까지, 먹을거리는 물론, 역사와 문화를 독특하게 선사해왔다. 바다에서 육지로 다가오는 재난을 완충해왔고 기후위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자연자산이건만, 사라진다. 미래세대는 위기에 빠진다.
2000년 우리 청소년 100명이 이 땅의 어른에게 항의했다. 말로 노래와 춤으로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으니 절박한 마음을 모아 ‘미래세대 환경소송’으로 법원에 노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어른은 차갑게 외면했다. “원고 부적격”이라고 했다. 미성년자이므로 원고가 될 자격이 없다고 미래 세대의 생존 기반을 내 찬 것이다. 머지않아 새만금은 미군 비행장, 에너지 과소비형 수직 유리 농장, 지붕에 올라가야 할 태양광 패널로 뒤덮일 모양이다. 세계 청소년이 모여 취지와 다른 고생 끝에 떠난 잼버리 야영장은 어떻게 변할까?
2023년 미국 몬태나주 법원은 달랐다. 5세에서 18세 청소년의 소송에 손을 들어주었다. 우리 언론은 계란으로 바위를 깼다고 평하던데, 한 차례로 그칠 ‘역사적 승리’가 아닐 것이다. “기후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화석연료 정책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헌법상 권리를 침해했”으니 위헌이라고, 미국의 어른은 미래세대에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미래세대의 권리는 이제 미국의 법리가 될 것이라면서 미국의 언론은 몬태나주 법원의 판결을 주목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진 21세기, 우리 법원은 어떤 자세를 보일까?
드넓었던 갯벌을 깡그리 메워 초고층빌딩 숲을 화려하게 돋아 세운 인천 송도신도시는 언제까지 휘황찬란할까? 화석연료 과소비로 미국에서 생산한 식량을 거대한 선박으로 수입하는 시대는 언제까지 유효할까? 석유 자본은 머지않아 고갈 실상을 숨기지 못할 텐데, 석유로 생산하는 식량이 수입되지 않으면 갯벌 잃은 우리 미래세대는 생존할 수 있을까? 생태계에서 태어난 인간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신기루에서 독야청청할 수 없는데, 설마 새만금의 미래마저 송도신도시인가?
고인이 된 생태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지구 생태계의 적어도 절반을 비인간 생물에게 돌려주자고 호소했다. 평생을 바친 생태계 연구를 돌이킬 때, 인간은 생태계에 기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리라. 현재 인간은 지구 생태계의 대부분을 독점한다. 포유류를 살피면, 무게의 30%는 인간, 67%는 가축이다. 고래와 코끼리를 포함, ‘동물의 왕국’ 다큐에 등장하는 온갖 포유류를 모두 합해도 3%에 불과하다. 화석 연료 뒷받침이 마감되면, 인류의 삶도 현재 지층에서 마감될 수밖에 없다.
내년 8월 부산 벡스코에서 세계 지질과학 총회가 열린다. 그 총회에서 현 지층의 이름을 ‘홀로세’(Holocene)에서 ‘인류세’(Anthropocene)로 바꾼다는데, 인류세의 시작은 1950년이라고 한다. 그 무렵 인간은 지층에 온실가스, 초미세먼지, 마이크로플라스틱을 마구 내버리기 시작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핵무기와 핵발전소, 그리고 핵실험으로 생태계가 감당할 수 없는 방사성 물질을 지층에 쌓았다. 인류세 이후 지층의 이름은 무엇이 될까? 인류세 이후 지층에 인류는 없다. 아슬아슬한 인류세에 살아남으려면 인류는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할까?
정부 부처에 ‘생태부’가 있는 국가가 있다. 유럽만이 아닐 텐데, 우리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기본 개념에 생태는 없다. 미래세대도 없다. 우리 법리는 철저히 기득권의 이해에 굴종한다. 환경부도 비슷하다. 미래세대의 생존 따위에 통 관심이 없다. 책임 있는 어른이 아니다. 제 자식의 건강한 내일을 생각한다면, 대치동 학원 물색이 아니라 인류세를 직시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기후위기에 능동적으로 대비할 법리가 당장 시급하다. 미래세대의 눈높이에서.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60플러스기후행동 공동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