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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1-15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오늘부터 살필 성경 사사기는 사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사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쇼페팀’은 ‘재판관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사기를 읽어보면 등장하는 열두 사사 중 ‘재판관’ 역할을 하는 건 드보라 한 사람이고 이마저도 간접적입니다. 그래서 사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선 성경 본문이 사사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피는 게 정확합니다. 이때 사사기 2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사사는 구원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사기의 시대 배경은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서 사이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부터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대관식까지가 사사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사기에 나오는 열두 사사의 활동 기간을 단순 합산하면 대략 410년입니다. 이는 여호수아와 사울 사이 기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만, 성경의 오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사기가 연대기순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동시에 두 명 이상의 사사가 같은 시기에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즉, 일부 사사는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가 아니라 제한된 지역의 지도자, 한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 1절에서 3장 6절까지는 서론입니다. 3장 7절부터 16장까지는 본격적인 사사들의 이야기로 첫 사사 옷니엘부터 마지막 사사 삼손까지 열두 사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17장부터 책이 끝나는 21장 25절까지는 결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사기의 서론과 결론이 각각 둘로 나뉘는 점입니다.
서론은 순서대로 정치, 사회 배경을 소개하는 서론과, 종교 배경을 소개하는 서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론은 종교적 타락상을 밝히는 결론이 나온 뒤 정치 사회적 타락상을 밝힙니다. 즉, 전체 구조상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지나며 정치 사회적으로 타락했고, 중심엔 종교적 타락이 자리하고 있음이 구조에서 드러납니다.
이때 열두 사사는 타락하는 이스라엘 역사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다른 민족을 일으켜 이들을 벌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십니다. 그 뒤 사사가 압제자를 정복하면 그 땅에 잠시 안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또다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서 앞의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순환 주기는 갈수록 점점 짧아집니다. 그렇게 사사시대에 드리운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갑니다.
성경이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사사시대를 숨김없이 밝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인간 사사로는 불가능한 구원을 이룰 더 큰 사사를 소망하고 기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무성했던 여름만 아니라 혹독했던 겨울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역사 기록인 사사기도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감추지 않으며, 오늘날 신자들도 이러한 시기를 겪을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이 시기를 통해 자신을 완성의 단계까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손길과 사랑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나의 주로 모시게 됩니다. 앞으로 사사기를 묵상하며 이러한 은혜가 교우님들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연대(1-2절)
사사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 바로 앞의 책 여호수아서의 시작과 같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세의 죽음으로 시작한 여호수아서는 곧바로 후계자 여호수아가 세워지지만, 사사기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사기가 시작부터 하향 선을 탄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앞선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습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1b)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이 보인 모습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9절입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을 것 같으니 대신 좀 듣고 전해달라고 모세에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숨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가까이 나아갔고, 직접 질문했습니다. 지난 3월 첫 주일 4부 예배 후 청년 특강을 진행한 우리 교회 김헌 집사님은 저서 천년의 수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답은 틀릴 수 있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는다.” 정말 그렇습니다. 상대를 헐뜯거나 책잡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면 틀린 질문은 없습니다. 이처럼 비록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분명 어느새 자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께 주도권을 이양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하나님의 생각을 답으로 삼겠다는 의지 표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질문에 하나님이 답하십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지파가 올라가 싸우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넘겨주었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시며, 싸움의 결과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앞서 틀린 질문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건 하나님의 답은 완벽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도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처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가나안 정복(3-9)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하나님께 완벽한 답을 들은 유다는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고 제안했고, 시므온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많은 성경 주석은 이 장면을 보고 유다 지파가 하나님 말씀을 자기 편한 대로 듣고 적용했음을 지적합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셨지 ‘유다와 시므온이 올라가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걸 짚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겪어온 일들을 기억할 때, 과연 유다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지파가 연합해서 가나안 민족과 싸웠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입성 전 요단 동편에 안주하기를 원하며 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했던 르우벤과 갓 자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수기 32장 6절과 7절입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모세는 서로 도와 전쟁하지 않으려 함은 다른 지파의 용기를 꺾어 가나안 정복을 방해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게다가 시므온 지파의 기업은 유다 지파 기업 안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유다 지파는 그동안의 전쟁 방식과 분배받은 기업 특성을 고려해 시므온과 함께 싸우러 간 것입니다. 게다가 유다 지파는 군사가 가장 많은 기업이었고 시므온 지파는 가장 적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유다 지파의 이러한 행동은 오래전 이집트에서 막내동생 베냐민을 위해 유다가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것 같은 깊은 배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형제의 연합을 사사기 기자도 이어지는 4절에서 ‘유다와 시므온이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유다가 올라가매’라고 증언합니다. 이는 시므온 지파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이 행동하면 비록 지파가 달라도 하나가 됨을 밝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한 말씀을 듣고 나누며 생활의 예배화, 예배의 생활화를 이루려 노력하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모여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걷는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아가는 우리는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명령에 순종한 유다 지파는 베섹 지역까지 정복했고, 그곳 왕 아도니 베섹을 생포했습니다.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유다는 사로잡은 아도니 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습니다. 이는 상대의 전투력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무기를 힘주어 잡을 수가 없고,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뛰기는커녕 똑바로 서서 걷기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가나안의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아도니 베섹이 직접 증언합니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아도니 베섹은 일찍이 칠십 왕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며 그들에게 큰 수모를 주었습니다. 가나안에는 이러한 잔혹함이 만연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 베섹이 했던 행동을 지금 이스라엘이 답습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의 진멸을 명하셨습니다. 진멸은 다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임을 당했다가 아닙니다. 즉, 유다는 하나님 말씀을 반만 듣고 반은 듣지 않는 절반의 순종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자라난 믿음을 보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나안 풍습에 물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비춰 오늘 우리도 항상 우리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구역모임까지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며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삶 속에서 온전한 순종 아닌 반쪽짜리 순종으로 이어진다면 그 믿음은 금방 무너지고 마는 믿음이 됩니다.
유다 지파의 한 가정(10-15)
한편, 유다의 진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유다는 예루살렘과 산지로 표현된 사해 서쪽과 남방으로 표현된 사해 남쪽과 평지로 표현된 지중해 연안과 산지 사이 저지대까지 넓은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른 곳은 헤브론입니다.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유다지파는 헤브론에서 가나안 족속 중 세세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 이름은 낯선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15장에 본문 10절부터 15절까지의 이야기가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에 이야기했듯 사사기가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한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는 아낙 자손입니다. 이들은 오래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보고 두려워했던 거인들입니다. 하지만 갈렙을 위시한 유다지파는 그때도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제 직접 제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탈취한 성읍 헤브론의 지명에는 ‘교통, 연합’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이 연합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함으로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의 연합은 그 어떤 풍파에도 끊어지지 않음이 증명됩니다. 유다는 헤브론을 정복한 뒤에는 드빌로 이동했습니다. 이때 유다 지파 지도자 갈렙은 이 도시의 정복과 관련해 특이한 공약을 제시합니다.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정복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딸의 배우자를 고르는 건 부모의 몫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방 사람과 통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딸 악사를 위한 갈렙의 배우자 선발은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동시에 어느새 85세 노인이 된 갈렙이 유다 지파 리더의 자격을 갖춘 이에게 딸을 맡기는 건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사를 얻은 건 갈렙의 조카이자 이후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세워지는 옷니엘입니다. 한편 악사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14-15)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악사는 출가하며 아버지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 지참금으로 남방의 땅과 척박한 그곳을 개간할 때 필요한 샘까지 요청합니다. 이때 악사는 하나님이 선조들과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3:15, 여호수아 1:3). 즉, 악사는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자신들에게 땅을 얻을 권리가 있음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갈렙이 그녀에게 후히 줬다고 기록하면서 악사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앞서 사사기는 점점 어둠이 짙어져 가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 유다 지파는 꽤 좋은 믿음을 가진 걸로 보입니다. 사실 이들은 사사기 후반에 나올 지파와 가정들의 악행을 더욱 드러내는 배경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께 질문하고, 순종하고, 약속을 신뢰하며 좋은 믿음을 가진 자로 남아 계속해서 우리 인생 항로를 무사히 완주할지, 그렇지 않고 인생 항로에서 좌초할지를 정해야합니다. 이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경험하고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사기라는 역사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용기 내어 질문하고 순종하며 바른 방향을 잡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사기의 끝은 짙은 어둠입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 속 하나님이 정면교사로 사용하신 유다 지파와 갈렙의 가정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 편에 서기를 다짐합니다. 나아가 비단 오늘 하루만 아닌 우리 모든 인생 여정 동안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계속 경험하고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사사기를 정경에 포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을 피했던 이스라엘이 어느새 하나님께 질문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요?
3.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시편 133편을 찾아 읽고 묵상하며 오늘 내가 연합할 형제자매를 생각해보세요.
4.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정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립니다. 이러한 은혜를 사모하며 오늘 내가 결단하고 실천할 신앙 행위는 무엇인가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