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 1243(고종30)-1306(충렬왕32)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
중국서도 安子로 추앙한 海東儒宗… 문묘에 배향
‘안향(安珦)’은 고려 시대 인물이기에 우리에게 그리 친근하지 않다. 또한 이름이 안유(安裕)와 안향(安珦)으로 함께 쓰여 혼란스럽다. 그는 이름을 빼앗긴 인물이기도 하다. 원래 그의 이름은 유(裕)였고 나중에 향(珦)으로 고쳐 썼다. 그가 남긴 필적에 분명하게 향이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는 아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휘자인 향과 같아졌고, 당시의 휘법(諱法)에 의해 아명인 유로 고쳐 쓰게 되었다.
안향은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을 시작으로 조정의 관료로 있다가 28세 때는 삼별초의 난을 당해 구금되는 곤욕을 당한다. 30세에 감찰어사, 33세에 상주판관으로 잠시 외직에 나왔다가 36세에 국자감(國子監, 고려의 국립교육기관)에 들어가 후진 양성에 힘쓴다. 46세에 좌승지가 되고 47세 때는 충렬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들어간다. 이 무렵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서 돌아온다.
48세에는 몽고의 침략을 당해 강화도로 몽진했고, 52세 때는 동남도 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했다. 54세에 다시 왕을 수행해 원나라로 들어갔다. 이 무렵 다시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셨다. 56세에 집현전 태학사, 계림부윤이 되었고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58세 때에 벽상삼한 삼중대광이 되었다.
59세 때는 저택을 조정에 헌납하여 반궁(泮宮, 조선의 성균관) 신축에 쓰게 했다. 또한 인재 양성을 위해 61세 때는 백관들에게 은포(銀布)를 갹출하게 하여 양현고(養賢庫) 재원을 확충했다. 이듬해는 섬학전(贍學田)을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장학재단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충렬왕 32년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즉시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헌정했다. 사후 12년 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1542년(중종37)에는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신재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위패를 봉안했으며, 그 7년 뒤인 명종4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에 의해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634년(인조12)에는 여항비(閭巷碑)가, 1639년(인조17)에는 신도비가 각각 건립되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선생은 육경과 논어 연구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주자서를 최초로 도입해 연구한 것을 고려할 때 수준 높은 저작물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이는 사후 4차례에 걸쳐 간행된 선생의 문집 격인 실기(實記)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실기 초간본(47판)이 선생 사후 460년 뒤인 영조42년(1766)에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선생의 글 수집과 편집이 원활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유학사에 크나큰 손실이다.
역대에 안향을 기린 내용을 보면 경이롭다. 그를 중국 곡부의 공자 후손 직할 관청인 공부(孔府)에서 공식적으로 안자(安子)로 의결해 높였고, 공자 종손이 직접 안자사당에 안자묘(安子廟)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이 직접 안자묘 현판을 써서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통치 수단의 한 방법이었겠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안향을 선정해 황해도 종가까지 방문했던 것이다. 현 종손의 선친이 갓을 쓰고 안자묘를 참배한 사이토 총독 일행과 기념촬영을 한 사진도 남아 있다(1924, 대정13년).
퇴계 이황은 소수서원에 제사하면서, ‘안향 선생은 그 공이 학교에 있어 길이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기렸다. 청음 김상헌은 ‘우리 유도(儒道)에 길이 공을 끼쳤다’고 했으며, 택당 이식은 ‘해동유종(海東儒宗)’이라고 했고, 도암 이재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역대 국왕은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영조는 사제문(賜祭文)에서 ‘백세종사(百世宗師)요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했다. 이들은 안향을 유학의 조종(祖宗)이며 후진양성에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로 인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안향을 말할 때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그 공이 빛났다고 한다. 우선 국왕으로부터 선생으로 추앙을 받았고 최초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합호서원(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 도동서원(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치리), 임강서원(경기도 장단군 북면 고량포리)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를 비롯해 전국 230여 개의 향교 대성전에 위패를 봉안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안향은 관과 민의 풍토쇄신과 유학 진흥책으로 신유학 전파에 공이 컸다. 이때 쓴 시는 하나의 상징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곳곳마다 향과 등 밝혀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퉁소 불며 잡신을 섬기는데(簫管家家盡祀神)
외로운 저 두어 칸 공자 사당에는(獨有數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 인기척조차 없네(滿庭春草寂無人)
그에게는 이처럼 국풍 진작이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불교국가에다 미신까지 널리 퍼진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 그에게는 더욱 성리학이 필요했다. 새로운 선비, 이것은 그가 꿈꾸는 고려의 이상을 실현해 줄 것으로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이들은 고려를 멸망시키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했다.
▲ 안향 문하의 六君子
성리학의 본향인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성공 안향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를 육군자라고 해 추앙해 마지않았다. 육군자는 국재 권보, 역동 우탁, 동암 이전, 매운당 이조년, 이재 백이정, 덕재 신천 등을 일컫는다.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이 세상을 떠날 때 백이정, 권보 등 문인들에게 “나는 학문이 그대들보다 못하였다.
그대들은 연상이나 동년이라고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면 우탁을 나와 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라”고 당부했다. 이에 당시 백이정의 문인이던 익재 이제현과 치암 박충좌 등 24인과 권보의 문인이던 가정 이곡, 담암 백문보, 졸옹 최해 등 19인이 모두 역동 우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해 학문적 계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