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 족보서 역문 신유간(1801) 2
이 아래 한 간판(글자를 새긴 판자)은 순흥구보의 제구판이다.
아! 가첩에서 이미 죽산으로 옮겨 봉해졌다는 말을 보았고 여러 묘비에서 더러 본순흥인이란 문자가 있었음을 상고하여 일찍부터 죽산의 선대는 순흥에서 나왔음을 말해왔다. 이제 이 간판을 신빙할 수 있으니 우리 종족의 순흥과의 관계는 공자의 선대는 송공이며 주자의 관향은 휘주임과 같다.
옛날 우리 죽산종족은 죽성군을 시봉의 조로 받들어 오면서 오랫동안 순흥의 세계를 상고하지 못하다가 마침 이 간판이 종인 치달의 집에서 나왔으니 이는 그 증조지인(이재공 8대손 광주동파로 순흥구보 득견 사실이 주기되어 있음. 을사보 1권 68혈 합보9권 35혈 참조 역자주)이 숙종 10년 갑자(1684)에 순흥구보를 공주 안대겸보 집에서 보고 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내주지 아니하므로 공주목사에 제소하여 마침내 선계일본을 등사하고 아울러 공문증명까지 받아 돌아오자 이 간판을 빼내어 용담산중에 갈마두고 족보간행의 날을 기다렸다.
이에 우리 종인들이 모여 이를 보니 구보의 완전함을 미루어 알 수 있고, 또 순흥에서 죽산으로 옮겨진 세계가 자상하여졌으니 이야말로 우리 종족의 구계보라 하겠다. 선조 죽성군은 순흥군(휘 목)의 제 2자로 고려조에 유공하여 죽성군에 이봉되므로 그 자손들이 관을 달리하고 족보도 같이 하지 아니한데다 세대가 더욱 멀어지고 문헌도 희미해지므로 순흥의 세계는 전해지지 못하여 죽산보가 간행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옛날 우리 선대세계가 실전됨은 이에 연유함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이 간판에 의거하고 순흥금보에 징증하여 따라 죽성군 이상 순흥의 6세를 명기한 일판을 실어 선대계통의 유래를 밝힌다. 아! 공자는 공부가를 선조로 하여 위로 송공의 세계에 이었고 주자도 다원에서의 종사에는 반드시 휘주의 옛 관계를 말하였으니 오늘날 오종문의 취한 법은 이를 본받음이 아니겠는가. 이 일판은 한사람의 소장할 바 아니오 불가불 백세에 전해야할 일이기에 보첩 첫머리에 실어 고증의 바탕으로 삼는다.
숭정후삼 임술(순조 2년 1802) 2월 일
죽성군 16세손 수린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