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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34코스 제2부
외현화마을-내현화마을-무안 해운리-함평 석성리-돌머리 전망대
20230125
1.무안과 함평이 어우러지는 함해만 풍경
외현화마을을 빠져나가 들녘으로 나가니 동이 튼다. 여명이 들녘에 스며든다. 들에는 하얀 순결의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고, 빛을 받은 흰 눈이 반짝인다. 평화로이 누워있는 눈밭을 바라보며 태통산 자락길을 걸어 내현화마을로 들어갔다. 맞은편 감방산을 마주하고 앉은 내현화마을은 동녘을 바라보고 자리하고 있다. 바삐 걷는 일행들을 따라가기에 마을을 조금이라도 더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흰 눈이 들에서 하얗게 반짝이고 있다. 아침 빛이 퍼져 순백의 눈빛은 더 순결해 보였다. 어린 시절 겨울 아침,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찬란한 흰 눈빛에 눈이 부신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왔다. 유년의 아이에게 이 눈빛은 세상의 빛이었으며, 이 세상은 오직 맑고 밝은 빛의 세계였다. 이 순결한 빛의 세상이 어느 나이가 되어서 어두운 잿빛 세상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눈빛의 세상, 소년의 가슴에 하얗게 자리잡은 순백의 눈부신 눈빛 세상, 그 세계가 내현화마을 언덕길에 펼쳐져 있다.
그 세상을 만난 듯 흰 들녘 저 너머 동경의 세계 함해만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어린 시절의 꿈들이 아롱지고 있다. 그 꿈들이 날개를 퍼득이며 함해만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슴이 벅차다. 앞선 일행을 뒤에서 강아지처럼 촐랑촐랑 따라가며 동심의 흰 눈빛 세상을 다시금 즐겼다.
현화천을 따라 함해만으로 나아갔다. 현화리와 운해리의 들녘에 흰 눈이 그득하다. 제방의 눈길을 밟으며 함해만의 둥글게 이어지는 해안길을 걷는 아침 기분이 상쾌하다. 그리그의 음악 '아침 기분'의 느낌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이듯,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음악 '터키식 의례 행진곡'의 경쾌함을 따라가듯 아침 눈길을 걸었다. 들길의 설경은 산길의 설경과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산길의 설경은 웅장하고 기기묘묘하며, 고통의 환희, 어려운 산행길에서의 카타르시스의 환호를 느낀다. 반면에 들길의 설경은 광활함과 평온함, 고요와 평화의 적막감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음은 커피를 음미하고, 몸은 행진곡풍의 발걸음으로 하얀 눈밭의 들길을 걸었다.
해운천과 자명천을 건너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로 넘어간다. 아름다운 무안과 작별하는 게 아쉽다. 서해랑길 무안 코스에서 어둠 속에 걸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곳과 무심하게 지나치고 나서 뒤늦게 소중한 곳임을 알게 된 무안 지역들이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무안이 내륙이라고만 생각했던 무지한 탐방객이 서해랑길을 통해 무안의 특이한 지형을 익혔고, 무안이 아름다운 반도와 곶(串), 탄도만과 함해만, 톱머리와 홀통, 조금나루와 도리포가 있는 특별한 곳을 탐방하게 되어 감격한다. 무안이여, 안녕! 서해랑길 탐방에서는 작별하지만, 어느 날, 너를 만나러 다시 오마. 그때 더 웅숭깊은 무안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함평 돌머리 해안에서 함해만 무안 해안을 바라보았다. 걸어온 길은 살아온 시절처럼 아련하다. 그 시절을 하나씩 돌아보듯 길을 톺아본다. 미래의 삶을 내다보듯 저기 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두동마을 언덕에서 지금 이곳 돌머리 해안을 바라보았었다. 이제는 그 현장이 추억이 되어 그립다. 돌머리 해안에서 그 추억을 되짚는다. 용정리 달머리(月頭)마을과 수양리 두동(斗洞)마을, 그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떠있는 두 개의 섬, 소당섬과 승도, 그 풍경이 저곳에 보인다. 도리포항에서 새벽의 어둠을 헤치며 송계산, 망대봉, 범바위산, 삼복산을 힘겹게 걸어서 해제면 만풍리 노문래마을로 내려올 때 동이 텄었지. 이성산 아래를 지나 무안황토갯벌랜드로 가는 방조제에서 엄도 뒤로 솟아오르는 장엄한 해돋이 장관을 감상했었지. 바로 저곳이야. 그리고 오늘 새벽 어둠을 뚫고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을 출발하여 평산리 유수정마을, 현화리 노두목마을을 거쳤었지. 저기에 분명히 보이잖아.
돌머리 해안길 해송들과 낙엽상록수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푸름을 살짝 드러내며 하얗게 반짝인다. 이국적 풍경처럼 낭만적이다. 백설이 날리는 겨울 저녁에는 도심의 거리로 나가 술집을 어슬렁거려야 하지만, 찬란한 아침빛이 해안의 가로수잎에서 분부시게 반짝일 때는 삶의 투명한 의지를 품고 희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돌머리 앞으로 나아갔다. 석두포구는 사라졌고, 농바우도 사라졌다. 대신에 광산 김씨 세장산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리 북쪽으로 함해만이 활짝 열려 있는 칠산바다가 보인다. 지금 이곳에서는 저기가 희망이다. 저곳, 칠산대교와 칠산타워가 세워져 있으며, 칠산바다가 서해 바다로 나아가는 저곳, 미래의 희망이 아침빛에 타오른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2km 중 9.2km
전체 소요시간 : 4시간 20분 중 2시간 20분
평화로움이 넘치는 외현화마을의 벽화를 보면서 골목길을 빠져나가 들녘길로 나간다.
오른쪽으로 태통산이 자리하고 태통산 자락길을 따라 내현화마을로 향한다.
외현화마을 골목길을 빠져 나오니 동이 튼다. 들녘의 하얀 눈이 곱다. 서해랑길 34코스에서 평산리에서 현화리 노두목마을로 들어와 외현화마을을 거쳐 내현화마을로 향한다. 현화리 지역에 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 온다.
"현화리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함평 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감방산 북쪽으로는 칠산바다를 향하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예전에 목포부 현화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지역으로 함평현 다경면과 합쳐져 1914년 무안군 현경면이 되었다. 이후 구산동, 성자동, 내현화동, 외현화동을 병합하여 현화리라 해서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태통산을 중심으로 외현화, 청룡, 내현화, 성자동, 절동, 노두목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 무안문화원
내현화마을 가는 언덕길에서 함해만 방향을 내려다 보았다. 비교적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화2리 지역으로, 청룡, 장자터, 버든, 호두, 광대밭, 학산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청룡마을이 중심을 이루는 것 같다.
"청룡마을은 현경면 소재지에서 현경중학교를 거쳐 함평 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목포부 현화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현경면 현화2리 청룡마을이다. 청룡이라는 마을 이름이 근래에 만들어진 것 같아 호구총수를 봤더니 조선시대에도 청룡마을이 있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오지 않다가 1987년에 다시 마을 이름이 등장한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보면 마을의 지형이 산을 끼고 도는 바다와 함께 마치 용처럼 보여 이름을 청룡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태통산을 중심으로 거대한 용이 서해안을 바라보며 승천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망(주막)내의 꼬리에서 태통산의 몸통 그리고 청룡등을 지나 청룡마을의 임씨 선산에서 머리를 들고 서해안을 향해 용트림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러한 마을의 지형을 보고 맥을 자르지 않으면 이 마을에서 인물이 날 것을 예상해 주망내 꼬리를 자르고 용머리 앞의 물을 없앴다. 즉 청룡마을 앞에 간척지를 조성해 물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이무기가 오랜 기다림 끝에 갑자년이 되어 승천하려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올라가지 못하고 이 마을에 머
무르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청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함해만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현화2리는 청룡, 장자터, 버든, 호두, 광대밭, 학산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청룡은 임씨 선산이 있는 곳을 말하며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장자터는 예전 부자가 살았던 곳이며 지금도 주변에 흙으로 만든 기왓장들이 발견된다. 버든은 버드나무골로 꾀꼬리와 관련된 명당터로 알려졌다. 호두는 호랑이 머리 지형으로 기가 센 곳이며 광대밭은 광대가 피리를 부는 형국이다. 피리는 마을에서 무수바위로 가는 길다란 길을 말한다. 학산은 학이 소나무 위에서 머물고 있다는 지형이다. 학산 마을 앞에는 샘이 있어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한 성씨는 무송(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옛 지명) 유(庾)씨이다. 이어서 영성 정씨들이 들어왔다. 현재는 다른 성씨들이 더 많이 살고 있지만 이 마을 출신 무송 유씨들 중에는 성공한 이가 적지 않다." - 무안문화원
들녘 너머에 현화3리에 속하는 생록마을이 있다. 함해만 건너편은 34코스 목적지인 돌머리 해안일 것이라 가늠한다.
내현화마을 뒤쪽 태통산과 이어지는 출입구이다.
"내현화마을은 김해 김씨와 전주 최씨가 각각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최초 입향조는 김해 김씨 金錫龜(호-玄圃, 1653-1718)다. 현포공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였으며 미수가 직접 그의 호를 지어줄 정도로 스승의 사랑을 받았다. 족보를 보면 현포공은 젊었을 때 주유천하를 했으며 중국에 가 공자묘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 이황의 서원인 도산서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마을유래지에는 ‘그의 조부 때 나주 노안면 금안동에서 무안읍 성동리로 이주하였다가 1683년경 이 마을로 옮겨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감방산 아래 서당터에서 바라보고 잡은 곳이다. 공이 서당터에서 이곳을 보니 푸르스름한 불빛이 보여 ‘배우고 익히며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하고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 공은 마을에 현포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교육하며 여생을 보냈다.
전주 최씨 입향조는 崔仁寬(자-의경, 호-사성재, 1674-1736)이다.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으며 주변의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공은 현화1리인 외현화마을 입향조 최규(자-사욱, 1715-1774)의 할아버지이다. 전주 최씨의 무안 입향은 임진왜란을 피하여 함평 엄다로 왔다가 삼향과 몽탄 그리고 일로를 거쳐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 무안문화원
내현화는 1641년 인조 신사년에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였고, 1707년 숙종 정해년에 현포 선생 김석구씨가 강학소인 현포정사와 유택을 이곳에 창건하였다. 허미수 선생 허목의 문하생으로 풍채가 준수하고 재기가 초범(?)하였으며 경서에 능통하고 현포정사에서 학구강론을 하였고 학식과 덕행이 저세(?)하였다. 선생의 유적은 당대의 명가일 뿐만 아니라 후손에 대대로 소중히 보존하고 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전주 최씨 등 각 성씨가 거주하고 있으나 주로 김, 최 양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웅걸위인이 다수 배출한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우리 마을회관은 1978년 건립된 회관으로 오랜 세월로 폐쇄되어 파옥하고 리장 이하 주민 및 출향인사와 도·군 보조를 얻어 2006년 8월 24일 착공하여 동년 10월 30일 완공하여 후면에 성금을 거출한 방명록을 새기며 갸륵한 뜻을 후세에 길이 기념코자 이 비를 세운다.
2007년 2월 8일 주민일동
앞쪽에 보이는 산이 감방산인 듯. 내현화마을은 태통산에 자리하며 감방산을 바라보고 있다.
"내현화는 현화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현화리 안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현화천이 흐르고 현화천 너머에는 감방산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현경에서 함평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지형은 와우형으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주고 있어 주민들의 넉넉한 심성을 갖고 있다.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의 생록동을 포함하여 현화3리에 속하는 이 마을은 와우형이다. 소의 모습을 살펴보면 꼬리가 지망재에 있으며 몸통은 태통산 그리고 머리는 당앞에 해당된다. 해서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마을의 맞은편에 감방산이 우뚝 서있어 주민들이 기상을 펼치기에는 조금 아쉬운감을 주기도 한다. 두 성씨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텃세를 부리거나 다투지 않고 화합을 이루고 있다. 주민들 말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송사로 지망 잔등을 넘어서 본적이 없다 할 정도로 화목함을 유지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마을회관 앞쪽에 세워져 있는데 입향조 김해 김씨 현포 김석구 선생의 후손인 것 같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은 성재마을인 듯.
내현화마을은 소나무들이 그윽하다. 내현화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 나간다.
"마을이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져 있어 ‘우데미는 구워먹고 아래데미는 씨한다’는 아이들의 동요가 전해지고 있다. 마을 입향조를 기리는 현포정사와 사당이 있다. 현포정사는 현포공이 1707년에 세운 건물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1964년에 초가집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사당은 입향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1837년에 건립하였다. 1964년 초가집이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1칸 측면 1칸이며 내부에는 위패 2기가 모셔져 있다. 그 외에 김석구유허비가 있다. 김석구의 행적과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때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조선국현포선생김공유허비’라 명문되어 있다.
마을에 두 개의 제각이 있다. 김해 김씨의 제각인 추유재는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건물이다. 1959년에 지었으며 주련이 10개, 현판이 두 개 있다. 전주 최씨 제각인 추원재는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1962년에 지었으며 주련이 4개, 현판이 2개 있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 34코스는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에서 무안군과 작별하고 함평군으로 넘어간다. 문화생태탐방로가 거쳐가는 후동마을 5.0km 지점으로, 서해랑길은 후동마을을 거쳐가지 않는 것 같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구간은 총거리 9.3km로,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는 무안군 현경면 운해리 지역까지 이어진다.
감방산 자락에 현화4리 여러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마을을 구분할 수 없지만 현화4리 지역의 백양동(白羊洞), 오동촌(梧桐村), 구산(九山), 성자동(聖子洞) 마을들로 이루어졌으며 성자동(聖子洞) 마을이 중심이 되는 듯하다.
"성자동(聖子洞)은 현화4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명 표기가 두 가지로 쓰여지고 있다.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성자동이란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나오는데 聖子洞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도 聖子洞으로 나온다. 그러나 도중에 일부 주민이 成才洞으로 사용하는데 현재는 다시 聖子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참고로 현경면 용정4리에 成才洞이 있다.
聖子洞은 마을의 입향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안에 최초로 입향한 현풍 곽씨의 입향조는 郭命生(현종 을유 1669년 생-영조 갑자 1744년 졸. 자 - 直夫, 호 - 直菴)이다. 그는 강진군 성전에 살다가 무안읍 신학리로 들어와 살면서 名利를 버리고 자연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또한 평소에 주자의 말씀 중 ‘聖人은 만사를 응하고 천지는 만물을 생할 때에 直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아들은 돈목, 정목, 경목을 두었는데 돈목(숙종 신미 1691년 生-영조 을해 1755년 卒)은 무안읍 대곡리에서 살다가 현경면 현화리 성자동으로 왔고, 정목(숙종 갑술 1694년 生-영조 을미 1775년 卒)은 무안읍 병곡 마을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모두 책을 벗 삼아 생활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 뒤로 무안 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작은 감방산 아래 815번 장군로를 사이에 두고 내현화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마을이 넓고 길어 현경면에서는 가장 긴 마을이다. 白羊洞, 梧桐村, 九山, 성자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에서 구산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 龜山里로 나오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九山洞으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마을 뒤 바우백이에 거북 형태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제강점기 때 그들이 사용하기 쉬운 표기로 바꾼 듯하다. 예전 배암골이라 불렀던 백양동은 뱀이 많았다. 큰배암골과 작은배암골로 이루어진 이곳은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한 발짝 건너서 뱀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뱀구덩이에는 50에서 100여마리의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도 한다. 오동촌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온 이주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마을 곳곳에 오동나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마을 다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 무안문화원
현화로를 따라 현화천을 건너 함해만으로 나아간다.
생록동마을 입구인 줄 알았는데, 화살표 방향은 현화로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표석을 현화로 아래쪽에 세우는 게 좋을 듯.
현화로를 따라 함해만으로 나아간다. 생록동마을은 왼쪽에 있는 것 같다.
감방산 아래 현화4리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보이는 마을은 구산마을인 듯. 마을 뒤 바우백이에 거북 형태의 바위가 있어서 구산(龜山)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사용하기 쉬운 九山洞 표기로 바꾼 듯하다고 한다.
아침 빛이 밝게 빛난다. 순백의 눈으로 아침 빛이 더욱 순결해 보인다.
이곳이 현화3리 생록동인 듯하다. 중앙 맨 끝에 칠산바다의 칠산대교가 흐릿하게 들어온다.
내현화마을은 입향조가 김해 김씨여서 김해 김씨 세거지라고 한다. 뒤쪽에 보이는 마을은 현화4리 성자동마을인 듯하다.
왼쪽은 생록동마을 가는 길인 듯하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현화천으로 내려간다.
언덕 위에 가족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하얀 눈이 덮인 봉분이 아름답다.
함해만 맞은편에 34코스 목적지인 돌머리 해안과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가 보인다.
현화천의 광각1교를 건너 함해만 방향으로 내려간다. 광각교의 뜻이 무엇일까? 들녘이 광각들인가?
현화천을 따라 함해만으로 나아간다. 현화리 들녘은 오른쪽 뒤 현경면 해운리 들녘으로 이어진다.
앞에 보이는 숲 뒤쪽이 내현화마을이며 오른쪽 현화로를 따라 광각1교를 건너왔다. 후동마을 3.9km 지점이다.
현화천 방죽길을 따라 현화천 하구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함해만으로 나갔다가 맨 오른쪽 뒤 해운로로 나간다.
왼쪽 푸른 숲 뒤가 내현화마을, 오른쪽 숲 있는 곳이 생록동마을이라 가늠한다.
현화천이 함해만 바다에 몸을 푸는 곳이다. 방조제 건축으로 오른쪽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함해만 방조제 제방길을 따라간다. 맞은편은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함해만의 돌머리 해안으로, 왼쪽에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이 보이는 곳이 34코스 종점이다.
현경면 해운리 함해만 방조제 제방길을 계속 따라간다. 맞은편에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현화천 하구에서 북쪽 맨 끝에 칠산대교와 칠산타워를 가늠한다. 바로 앞 맞은편은 현경면 수양리 해안이다.
함해만이 칠산바다로 열려 있다. 칠산대교 서쪽 무안의 도리포항과 동쪽 영광의 향화도항, 그리고 칠산타워가 가늠된다. 맞은편 중앙 돌머리 해안에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가 보인다.
함해만은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에서 칠산바다로 쑥 돌출하였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며 구불구불 리아스식 해안을 형성하여 들쑥날쑥, 깊이 굽어지기도 하고 살짝 굽어지기도 한다. 맞은편 해안은 현경면 수양리 해안이다. 서해랑길 33코스에서 해안 안쪽 두동마을, 석북마을, 수양촌마을을 거쳤다.
오른쪽에 현경면 용정리 봉대산과 그 왼쪽에 검무산, 그 왼쪽으로 홀통과 탄도만이 가늠된다. 오늘 아침 출발한 곳은 봉대산 왼쪽 앞인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이다. 어둠 속을 걸어 송정리와 평산리를 거쳐 바로 왼쪽 뒤 현화리 내현화마을을 거쳐 해운리로 넘어왔다. 무안군의 전체 지형이 그려진다.
함해만 제방길에서 현경면 해운리 1321-13 지역 해운로로 나왔다. 시점 11.6km, 종점 5.6km, 후동마을 2.1km 지점이다.
해운로를 따라 파도낙농체험목장 앞으로 올라간다.
파도목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 해운리 들녘으로 이어간다.
해운로 파도목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함해만 방향으로 나아간다. 오른쪽 뒤의 마을은 해운4리 지역이라고 가늠한다.
"후동마을은 현경면 소재지에서 현경중학교를 지나 함해만을 따라 함평 방면으로 7㎞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현경면 해운4리로 원주동 마을과 함께 한다. 후동을 안고 있는 海雲里는 무안의 主山인 감방산의 끝자락으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따뜻한 날씨에 안개가 자주 끼어 붙여진 이름으로 대체로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 마을은 해안 지역이고 난대성 기후 때문에 오래 전부터 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옆 마을인 시목동에는 성터(?)로 추정되는 성벽과 토성제라는 지명이 있으며 해운리의 주산인 두명산 주변에 오래된 무덤들이 많아 도굴꾼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지역이 목포대 박물관에 의해서 문화재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마을 사람들이 밭을 경작할 때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두께의 조개 무덤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에 이미 일정 세력이 자리 잡았던 주거지가 형성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 무안문화원
왼쪽 건너편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돌머리 해안에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함해만이 북쪽으로 열려 있는 곳이 칠산바다이며 왼쪽에 무안 도리포항, 오른쪽에 영광 향화도항, 두 곳을 잇는 칠산대교가 건설되어 있고 향화도항에 칠산타워가 세워져 있다. 바로 앞 함평읍 석성리 돌머리 해안에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가 있다.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들녘의 눈길을 걸어 맞은편 함평읍 석성리로 향한다.
해운리 들녘길을 걸어오다가 돌머리 해안의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와 함평읍 석성리 함해만을 조망한다.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들녘을 걸으며 맞은편 오른쪽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石成里) 성덕마을을 바라보았다.
"함평읍 석성리 성덕(成德) 마을 이름을 현재 '成德'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聖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마을 앞에 임진란 때 토성(土城)을 쌓았기에 성(城) 안의 들을 성들이라 부른데서 '성' 자가 연유되었기에 실은 재 '성(城)' 자를 써야 옳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 함평군청
함평군과 경계가 되는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들녘길을 걸어 함평읍 석성리로 향한다.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해운천은 함평군 함평읍 자명천으로 흘러든다. 건너편 오른쪽 마을은 함평읍 성덕마을이다.
해운리 들녘을 걸어 해운천의 해운1교를 건너왔다.
해운천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자명천 다리로 이어간다. 맞은편은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지역이다.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에서 자명천의 다리를 건너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로 넘어왔다. 맞은편 산은 해운리의 시목동, 해운동, 장군암 마을이 그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두명산일 것이며, 오른쪽 뒤는 감방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함해만 바다로 흘러드는 자명천을 따라 내려간다. 자명천 하구에 자명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신축하고 있다.
자명천의 다리를 건너 이곳으로 내려왔다. 해운천이 자명천에 합수하는 곳이 오른쪽 건너편에 보인다.
함해만의 해안길을 잇는 도로공사가 진행 중인 듯, 앞에 자명천 위로 새 다리가 건설 중이다.
자명천이 함해만 바다에 합수하는 곳에서 함해만을 조망한다. 왼쪽 위에 파도목장이 보인다.오른쪽은 수양리 해안, 중앙 뒤가 출발지인 송정리 상수장마을, 해안으로 돌출한 왼쪽 구릉 뒤쪽에 내현화마을이 가늠된다.
왼쪽 돌머리 해안의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앞으로 진행한다.
푸른 해송 바늘잎에 흰 눈이 쌓여 있다. 아침의 순결한 빛이다.
자명천 하구에 신축 중인 다리 앞을 거쳐 함해만 해안길을 걷고 있다. 건너편 산이 두명산이고 그 오른쪽 산이 감방산인 듯.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가 함해만을 바라보며 두명산 아래 펼쳐져 있다. 오른쪽 언덕 위에 파도목장이 보인다. 갯골이 얼어 있다.
"해운리(海雲里)는 두명산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경면소재지에서 함평 쪽으로 5㎞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동으로는 함평읍 장교리와 남으로는 감방산을 그리고 서로는 함해만과 접해 있다. 본래 목포부 현화면의 지역으로 해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명화촌, 기양동, 원주동, 시목동, 옥동, 후동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 원래는 시목동, 해운동, 월명촌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인구 증가로 시목동, 해운동, 월명촌, 후동, 장군암 등 5개 마을로 분리되었다." - 무안문화원
맨 오른쪽은 수양리 해안, 그 오른쪽 흰 건물 보이는 곳이 출발지인 송정리일 것이라 가늠한다. 갯골이 아름답다.
함평읍 석성리에서 건너편 무안군 현경면 해안을 조망한다. 드넓은 함해만 갯벌바다를 둘러서 있는 현경면 해안이 장엄하다.
현경면 수양리 함해만 해안이 건너편에 북쪽으로 벋어 있다.
앞 해안에 석두포구(石頭浦口)와 오른쪽 언덕에 석두(石頭)마을이 있다.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 앞으로 이어간다.
오늘 새벽의 어둠 속을 걸어온 길이 한눈에 조망된다. 중앙의 송정리 상수장마을에서 출발하여 왼쪽 뒤 현화리 내현화마을에서 아침을 맞았다. 오른쪽 수양리 해안 안쪽으로는 33코스에서 석북마을과 수양촌마을을 걸었다.
오른쪽 뒤 현화리 내현화마을에서 함해만으로 나와 방조제 제방길을 걸어 해운로로 나와 중앙의 파도목장을 거쳐 왼쪽 해운천과 자명천을 걸어 함해만 해안으로 나와 이곳으로 걸어왔다.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돌머리(石頭) 해안으로 진행한다.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이 보이고 왼쪽에 석두포구와 오른쪽 언덕에 돌머리(石頭)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石頭마을은 1789년 호구 총수의 지명에 돌두리(乭頭里)로 표기되어 있다. 1912년의 행정구역명에는 석두(石頭)로 바꿔져 있다. 함평에서 오래된 포구인 석두포(石頭浦)가 있던 마을이다. 그러나 서해가 융기됨으로써 모래가 밀려와 포구의 구실을 하지 못한 지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돌두(乭頭)는 돌머리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 서편 1km 지점에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돌머리라 하였다. 근년에 굴 양식장을 개장하면서 기암괴석을 폭파하여 운치를 잃고 말았으며 농바우 전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달랠 뿐이다. 또 이곳 돌머리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우단이 있었는데 해안초소가 들어서면서 자취가 없어졌다. 석두 입구에서 백제시대의 대형 옹관이 출토되었다. 이는 이곳에 어로와 농경생활을 하던 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석두마을에는 1710년 경 김해 김씨 대한(大漢, 1687년생)이 손불면 학산리 지호에서 이주 정착하여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82년부터 돌머리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교통편이 좋아지고 민박촌이 형성되는 등 마을 모습을 크게 변모시켰다." - 함평군청
사라진 석두포구가 그립다.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 건물 맞은편은 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해안이다.
돌머리 전망대로 가기 전에 잠시 돌머리 해안을 살폈다.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돌머리라 하였다고 하니 이곳이 돌머리가 맞을 듯싶다. 근년에 굴 양식장을 개장하면서 기암괴석을 폭파하였다고 하는데 이 앞쪽이 폭파된 것일까? 그런데 앞에 있는 돌기둥은 무엇일까?
돌기둥이 궁금하여 와서 살피니 '광산 김씨 세장산'碑다. 그렇다면 이 돌머리는 광산 김씨 사유지인가?
앞쪽에 칠산바다의 칠산대교가 보인다. 32코스 탐방 때 칠산대교 왼쪽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 왼쪽 송계산과 망대봉, 범바위산,삼복산을 걸어 해제면 만풍리 노문래마을 앞으로 내려왔었다.
이곳 돌머리에는 옛날부터 농바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농바우 전설은 이렇다. "돌머리 해안에 일명 코주배기라고 불리는 유달리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는 해안이 있다. 여기는 항상 바닷물이 철썩이고, 갯벌에서는 굴과 꼬막 등을 채취하여 갯마을이 부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 바닷가에는 괴이한 암반으로 형성된 바위가 있었는데 괴석이 차곡차곡 쌓여 농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서해 바다의 용신이 평상시에 바다의 보배를 이곳 농바우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바다에 흉년이 들면 조금씩 꺼내어 이 어촌마을의 기근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이에 감사하는 마을 사람들은 용신제를 올렸다." 그런데 굴 양식장을 개장하면서 기암괴석을 폭파하여 이제 농바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앞 바다에 굴 양식장이 조성되어 있는 듯. 맞은편 오른쪽은 무안군 해제면 해안으로 오른쪽은 송계산-망대봉-범바위산-삼복산 능선, 중앙에 이성산, 그 왼쪽에 해제면 유월리 용산마을과 무안황토갯벌랜드, 왼쪽 앞은 현경면 수양리 두동 해안이다.
건편에 현경면 해안이 빙 둘러 있다. 오른쪽은 현경면 수양리, 뒤쪽에 용정리의 봉대산이 솟아 있고, 그 왼쪽 앞 송정리 상수장마을 앞에서 오늘 새벽 출발하여 왼쪽으로 평산리를 거쳐 현화리로 들어왔다. 맨 왼쪽에 현화리의 내현화마을이 가늠된다.
돌머리 해안에서 서쪽 무안군 함해만 해안의 풍경을 조망하고 돌머리 전망대 앞으로 나왔다.
전망대에 올라서 조망하는 함해만 풍경이 일품이다.
서해랑길 35코스 시작점 표지를 찾지 못하여 이곳에서 34코스를 마친다.
34코스를 마치고 돌머리 전망대에 올라 아침을 먹고 함해만을 조망하였다.
함평읍 주포한옥전원마을과 주포항이 오른쪽 뒤에 가늠된다. 건너편은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해안이다.
건너편은 함평군 손불면 석창리 함해만이다.
함평군 손불면 석창리-산남리-월천리-학산리로 이어지는 함해만이 왼쪽 맨 끝 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그곳에 있는 칠산대교와 칠산타워를 가늠한다.
함해만이 무안군과 함평군을 에두르고 북쪽 칠산바다로 열려 있다. 왼쪽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과 오른쪽 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향화도항을 이어주는 칠산대교가 가늠된다. 왼쪽 무안 해안 뒤 송계산과 망대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확인된다.
칠산바다 위 칠산대교와 칠산타워는 명물이 되었다. 지난 32코스 때 도리포항에서 왼쪽 송계산과 망대봉, 그 왼쪽 범바위산과 삼복산을 걸어서 왼쪽 뒤 이성산 오른쪽 해제면 만풍리 노문래마을로 내려왔었다.
맨 오른쪽에 해제면 만풍리 노문래마을과 그 왼쪽에 이성산이 확인된다. 이성산 앞에 보이는 섬 뒤쪽에 해제면 유월리 용산마을과 무안황토갯벌랜드가 가늠되며, 그 왼쪽 해안은 현경면 가입리와 마산리로 이어진다. 이 해안은 뒤쪽으로 빙 돌아서 중앙 앞의 현경면 용정리 월두마을과 그 왼쪽 수양리 두동마을로 이어진다. 33코스 때 두동마을 언덕에서 이곳 돌머리 해안을 조망했었다. 33코스는 왼쪽 수양리 해안 뒤쪽 석북마을과 수양촌마을을 거쳐 맨 왼쪽 봉대산 왼쪽 앞, 사진 맨 왼쪽 송정리 상수장마을로 이어진다. 해안을 조망하며 걸어온 무안 지역을 확인한다.
오른쪽에 현경면 용정리 봉대산이 분명히 확인된다. 오늘 새벽 그 왼쪽 앞 송정리 상수장마을을 출발하여 중앙의 평산리를 거쳐 왼쪽 현화리 내현화마을로 들어왔다. 오늘 새벽에 걸어온 길이 한눈에 조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