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齋 강징(姜澄)선생 墓所
가 . 소재 강징(少齋 姜澄)선생
강징(1466~1536)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서, 자는 언심, 호는 少齋. 심재, 본관은 진주이며, 형조 정랑 이행의 아들이다.
성종 25년(149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 권지 부정자. 예문관의 검열. 대교 홍문관의 저작. 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때 경연관으로 8년동안 재직했는데, 강학을 할때는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이후 사헌부 장령.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의 부승지. 우승지를 역임했다.
연산군 10년(1504) 우부승지로 있을 때 왕에게 사냥을 삼갈것을 말했다가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되었고,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아의 이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해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중종 2년(1507) 형조참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모 봉양을 위해 전주 부윤으로 나갔으며,돌아와서는 지중추부사.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16년(1521) 진하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황제가 뛰어난 글씨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만큼 필법이 당대 으뜸이어서 중종이 명으로 옛 명현들의 명언들의 명언과 시문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 놓고 백관들이 처신의 거울로 삼도록 하였다.
나 . 강징(姜澄)선생 墓所 (안산시 향토유적 제3호)
위치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安山 나들목을 나오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하여 갓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이곳이 양상동 옛마을로 수리산과 광교산의 중앙으로 외부로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수려한 산들이 羅城을 이루고 들어가는 入口를 關鎖하고 있어 아마 진주姜氏들의 先代墓域을 잡은듯하다.
關鎖가 잘되어 있는 마을 入口를 지나 탐량성 아래 새을字(乙)로 내려오면서 평탄 원만한 곳에
후손들의 정성으로 깨끗하게 伐草한 강진선생의 幽宅은 수리산에서 내려온 용맥이 우측으로돌아
巽巳入首로 午坐子向하였으며 수구는 庚破구로 沐浴消水라 할수있겠다.
墓域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장명등. 석인이 있고, 묘 아래에느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神道碑가 위치해 있고, 그 밑에는 응진수가 있으니 명당이라는 징조가 아닐가?.
당대 명필로 칭송되었던 강징선생의 神道碑머리 이수는 雲紋이 너무나 정교하여 볼수 있는 者의 幸運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36cm, 폭 75cm, 두께 20cm이다. 비문은 정사룡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했다.-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