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 부근 탑방(2025. 9. 17) 안내 자료 1. 경주 서악동 고분군(태종무열왕릉, 김인문 묘)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고분을 가리킨다. 고분의 모양은 모두 원형이며 주위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렀던 둘레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모두 깬돌을 사용했다. 대부분 냇돌을 쓴 대릉원 일원의 고분들과 차이를 보인다.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도굴을 굉장히 많이 당한 무덤 형식으로 유명한데 무덤 구조상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아 무덤 내부로 들어가기가 비교적 쉽도록 된 구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경주 서악동 고분 4기
이 고분들보다 작은 고분들이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분 4기(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흥대왕릉)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제23대),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제24대),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제25대),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추 또는 김용수)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인문과 김 양의 묘(태종무열왕릉 도로 앞) *김인문은 신라의 진골 왕족으로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군인이자 관료, 외교관. 그 중 아버지 김춘추를 이어받은 외교관으로서의 행적이 가장 주목받으며, 신라의 대 당나라 외교 전담으로 말하자면 당나라 주재 신라 대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김양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귀족으로 고성군태수, 무주도독 등을 역임한 대신이다. 808년에 태어나 857년에 사망했다. 태종무열왕의 9대손으로 김주원의 증손이다. 대대로 시중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차지한 집안이었다. 836년 제42대 흥덕왕이 죽은 뒤 김균정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하였다. 제44대 민애왕(김제륭)이 제43대 희강왕(김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청해진의 장보고와 함께 모의하여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45대 문성왕 때에 시중과 병부령으로 중용되었다. 사후에 서발한(舒發翰)으로 추증되었고,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2. 서악서원 조선 명종(明宗) 16년(1561년)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경주의 옛 신라 때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했고, 특히 통일 사업의 큰 공훈이 있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에 대해서는 그 무덤을 수리할 뿐 아니라 이들을 받드는 사당을 세우고자, 자신의 스승인 이퇴계(李退溪)에게 자문을 구하니,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까지 세울 필요는 없으며, 각간(김유신)에 대해서만 사당을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경주 서악서원
조선 후기의 문신 임방이 지은 야담집인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의 제사에서 뺀 다음에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얼마 뒤,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서생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 사방에 무기와 갑옷을 갖춘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 3. 도봉서당 도봉서당은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1426-1497)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이 서당은 숭앙문· 도봉서당· 추보재· 연어재· 尙虛堂(빈 것을 숭상하는 집) 등 모두 7개의 건물이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치 형식은 재사를 강당 뒤에 둔 전강당 후재사형인데,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도봉서당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 사당(상허당)은 정면 4칸·옆면 1.5칸이며, 중당 협실로 구성된 바로 볼때 강당 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鳶魚齋)는 남쪽과 동쪽 면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두 개의 정면을 갖게 한 점이 눈길을 끈다. 4. 서악동 바위구멍 유적지 서악동 바위구멍' 또는 성혈 바위라고 불리는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땅 위에 넓게 퍼진 너럭바위에 500여 개의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질 형태가 아닌 인위적으로 조각한 구멍으로 추정된다.
서악동 바위구멍 유적지 서악동 일대는 서천(西川)에 의해 형성된 충적지대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 바위는 가로 780cm, 세로 210cm 크기의 바위에 크고 작은 홈 500여 개가 새겨져 있어 바위구멍 혹은 성혈(性穴 : 선사시대 예술의 일종으로, 돌 표면을 깎거나 파내어 도형을 만듬) 바위라 불린다. 홈 외에도 기하학적인 문양과 여러 선들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바위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데 고인돌의 덮개돌인 경우가 많다. 이 유적의 제작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바위 구멍은 원시종교 및 민간신앙의 산물로 이해하는데, 별자리와 태양숭배, 풍요와 다산의 상징물, 친족체계의 표현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5. 경주 서악동 삼층 석탑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써,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서악동 삼층 석탑 탑신부(塔身部)는 몸돌(塔身)과 지붕돌(屋蓋石)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 : 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동 동ㆍ서 삼층 석탑(보물)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 동 삼층 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6. 불국사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 창건하여 5 천년 장구한 세월 동안 발전해 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의 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이다.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대웅전 오르는 다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불국사 칠보교 연화교(극락전 오르는 다리) 751년 당시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 두 번째 중창이 시작.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 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착공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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