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21:1~16
출처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 '깊은 산에서 흐르는 물도... 산삼이 머금으면, 반대로 뱀이 머금으면...다른 결과' 그래서 필터가 중요.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 누가 잡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져. 한국 교회의 성장 위주의 왜곡 현상도 그것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 같은 물을 빨아드려도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결과는 완전 상반대. 그래서 열매로 알게 된다. 존재의 변화,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 몇 가지 행동으로 알 수는 없다. 힘의 과시가 남느냐, 십자가의 사랑이 남느냐. 부활을 믿는 자는 십자가를 질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결코 질 수 없다. 그러면 부활 신앙을 의심해봐야 함.
배타고 두로항까지 800킬로 선교 여정 바울. 도착해서 제자가 있는가를 수소문.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일주일 머무름. 거기서 혼선이 있음. 그것은 기도하다가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음. 예루살렘에 가는 바울에게 어떤 결과가 생길 지 모른다는 감동. 그런데 해석을 위험할 수 있는 바울을 막는 것으로 이해함.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강권하는 권면을 거절. 제자들도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임에도 바울을 존중함.(4~6절). 성령님이 어떤 일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거기에 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음. 해석이 달랐던 것. 같은 감동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 입장과 처지, 받아들이는 내 성품 같은 것에 따라 달라짐. 제자들은 바울을 보내 줌. 목사님보다 사모님이 운전을 더 잘함. 터프하게 하는 것은 목사님. 그래서 사모님이 손잡이를 꽉 붙듬. 사모님이 운전할 때 젠틀하게 하는데도 목사님이 손잡이 꽉 잡음. 목사님이 더 불완전하면서도 사모님의 운전을 불안하게 평가하는 모순된 행동. 운전대를 쥔 사람은 자신이 결정해서 행동하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그저 '믿음'으로만 견디는 것. 그래서 힘든 것. 사람은 해석과 관점이 성장배경과 기질, 많은 요소로 서로 다양하고 다름.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발생한다는 메시지는 너무나 명백. 바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해짐. 그 메시지는 분명하게 공통적이지만 해석은 너무 다름. 그런데, 누가 옳은가의 문제에서는 '둘 다 옳다.'라고 생각함. 그래서 서로 대화하고 조율하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 필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그래서 따르는 방식과 시기는 항상 '여백'이 있어야 함. 목사님도 예전에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기 위한 여지가 너무 좁았음.
'잘잘못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먼 곳에 들판이 있다. 그대여 거기에서 만나자.' 어떤 유명한 작가의 말. 바울과 두로의 해석은 다르지만 서로 존중하고 서로 대화함. 20:24절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남. 이 마음을 두로의 제자들이 알았을 것임. 바울을 움직이는 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죽음을 넘어선 존재라는 것을 명심했음. 그런 마음을 두로의 제자들이 알고 존중한 것임. 생명을 걸 수 있으면 생명보다 하위의 것들은 통제 가능함. 그것들에게는 힘을 실지 않을 수 있음. 만약 그것이 바울의 이야기가 아니라 디모데의 일이었다면, 막았을 것임.
그런데, 한 번의 반대를 넘어갔는데, 똑같은 반대가 또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볼 것 같음. (21:8~12) 더 강도가 세진 반대. 가이사랴 빌립, 7집사 선발인원 중 하나. 스데반과 친했던. 빌립의 네 딸이 예언자. 그리고 아가보라는 선지자, 바울의 선교팀까지도...강력한 반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복된 반대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음. 그러나 바울의 흔들림은 의지를 꺽은 것이 아니라 동료들의 슬픔 때문임.(13절). 현실에서는 이렇게 권위 있는 이들의 반대가 반복되었을 때는 거의 무너짐. 아주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됨. 거의 100%. 그럼에도 바울은 처음의 의지대로 함. 왜? 바울은 너무 가고 싶었음. 거기서 순교하고 싶었음. 스데반의 죽음이 오버랩되면서. 그 길을 기쁘고 행복했을 것임. 바울이라는 존재가 범접하기 힘든 신앙의 인물이라는 것이 이 대목에서 느껴짐. 그러나 사도행전은 한 명의 인물을 숭상하는 성경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이끄는 가려진 풀뿌리들을 위한 행전임. 그것을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 두로의 제자들이 그렇다. 바울을 환대, 수용했고. 기꺼이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 무엇보다 자신들의 의견이 거절당한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들임. 오히려 바울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으로 대신한. 그들은 바울에게 주눅들지 않음. 왜? 성령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니까. 거절당할 마음으로 괜찮을 마인드로 하는 이들이 성숙함. 내 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 자신들의 의견이 항상 옳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성숙함.(14절).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된다! 는 태도. 심지어 제자들 중에 몇 몇은 바울의 예루살렘행에 참여.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거기에 있던 풀뿌리 신자들의 믿음임(15~16절).
풀뿌리 신자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음. "자기들의 해석과 입장에 자기들의 존재를 심지 않는 자." 니콜라스 xxx(기독교 철학자의 거장) "내가 일하는 철학 분야에서는 사람과 그의 주장을 분리하는 능력이 핵심이다....타인이 반대하는 경우, 존재가 거절당한 듯 슬퍼하기 싶다...예의 있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해야..." 신자란 "내가 옳아야만 하고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기꺼이 돕는 존재. 복음이 옳다는 확신이 주는 여유. 가만히 들을 수 있는 존재."
신자는 그러므로 품는 존재. 예수님은 너무 터무니 없이 떠나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용서하고 품으시는 분. 사도행전은 그런 말씀임.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나.... 다른 성도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신자임. 겸손히 귀 기울이는... 메르켈할 필요가 있다. 메프켈, 독일의 총리. 메르켈이라는 이름이 동사로 쓰이고 있음. '한 걸음씩 눈에 띄지 않게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미임. 끝없이 한걸음씩... 그러나 내가 쓸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나의 사도행전을 적어나가심을 깨닫는.
겸손. 공동체 존중. 한 걸음씩. 두로의 풀뿌리 신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