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골승(埋骨僧)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버려진 시신 수습·매장하며 중생구제 활동 펼쳐
승단 내 출신 낮은 스님들 담당…고려시대 문헌에도 등장
출신성분·업무 평가 무관하게 종교적 소명의식 지녔을 것
조선시대 초엔 국가공무원으로서 대우…사회적 기여 인정
조선시대의 매골승들은 연고 없는 시신들을 매장하는 등 백성들 속에 들어가 자비를 실천했다.
윤두서(1668∼1715)의 ‘노승도’.
지난 글에서 조선시대, 특히 조선 전기의 스님들이
다리를 세우고 기와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을 보았다.
오늘은 매골승(埋骨僧)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매골’이란 뼈를 묻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매골승은 뼈를 묻는 스님,
다시 말해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스님이 되겠다. 그렇다.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거두고 처리하는 일도 했던 것이다.
그 스님들은 누구의 주검을 어떤 방식으로 수습했던 것일까?
또 어떤 스님들이 어떠한 동기로 그 일에 나섰던 것일까?
매골승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퍽 낯선 용어이지만,
과거에는 상당히 익숙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의 문신 이달충(李達衷, 1309~1385)은
공민왕이 개혁정책의 파트너로 삼았던 신돈(辛旽)이 실각하여 죽임을 당한 뒤,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칠언율시를 지으며 제목 옆에
‘신돈은 당초 매골승이었다[旽初爲埋骨僧]’고 또박또박 적었다(‘동문선’ 제16권).
유학자였던 이달충은 이 시에서 신돈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신돈이 본디 매골승이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명시한 것도
그의 미천한 신분을 강조하며 폄훼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에서 매골승은 승단 내에서도
출신이 낮은 승려들이 담당했던 업무(또는 직종)로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는 일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하튼 이 기록은 고려 말에
시신의 수습을 담당하는 일군의 스님들이 존재했음을 잘 보여준다.
글자의 의미로 보건대 사람이 죽은 집에 초청되어 장사 지내는 일을 도와주거나
연고가 없이 거리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매골승이
불교의 자비 이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그 일에 나선 사람들이었는지,
아니면 공권력이 사업 목적을 갖고
스님들을 차출하여 조직한 집단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둘 사이의 어디,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그 일에 종사한 스님들을 공권력에서 흡수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앞서 천민 출신 스님들을 다룬 글에서 소개한 바 있는
조선 초의 장원심(長願心) 스님이
“남이 굶고 떠는 것을 보면 밥을 빌어다 먹이고 옷을 벗어 주었고,
질병이 있는 자를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였다.
죽어서도 주인이 없는 자는 반드시 묻어 주었다.”(‘태종실록’ 12권)고 한 것을 보면,
매골승은 그들의 출신성분이나 업무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무관하게
일차적으로 중생구제라는 종교적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조선 초에는 국가의 행정력이
이러한 개인의 종교적 소명의식을 공적 영역 내로 조직해 들였다는 사실이다.
세종 9년(1427) 예조와 한성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매골승권려사목(埋骨僧勸勵事目)’ 즉 매골승 권장 규칙을 제정해
임금의 재가 하에 시행했다(‘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1일).
1. 전에 정한 승려 10명의 수효가 적으니
이제 6명을 더 정하여 동·서 활인원에 각기 8인씩 소속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한성 5부(五部)와 도성 인근의 10리[城底十里]를 나누어 맡게 한다.
월급으로 소금과 장을 주고, 봄과 가을에 면포(緜布) 1필씩을 지급한다.
1. 활인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매골승들의 업무태도를 살피게 하여
그 중 매골 작업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을 매년 1명씩 뽑아 ○직을 준다[授職].
이것은 ‘실록’에서 매골승이 언급된 최초의 기사이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이미 이전에도 국가 행정력에 의한 매골승의 선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발된 매골승들이 소속된 한양 내 두 곳의 활인원(活人院)은
조선시대에 서민을 대상으로 했던 국립 의료기관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활인원에 소속된 매골승들은
그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장사지내는 일을 맡았을 것이다.
장례 절차의 의례의식이 업무에 포함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매장 또는 필요한 경우 화장 등의 방식으로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이들의 중심 업무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활인원에 소속된 매골승들에게 정기적으로 급료가 지급되고
성과에 따라 포상이 주어지기도 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는 그들이 국가 공무원으로서 대우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포상 조항인 ‘매골 작업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을 매년 1명씩 뽑아 ○직을 준다’는 부분은
한 번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록’ 원문에서 단순히 ‘직을 준다[授職]’라고만 되어 있는 것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에서는 ‘관직을 준다’라고 표현했지만,
맥락상 이것은 승직(僧職)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종 6년(1424) 승정(僧政)기관인 승록사(僧錄司)가 폐지되었으므로
이때의 승직이란 승려의 법계(法階)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즉 승과시험을 통과한 뒤 대선(大選/大禪)에서부터 시작되어
대선사(大禪師)/대사(大師)에까지 오르는 바로 그 승려 승진의 기회를
활인원 매골의 업무성과로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매골승이 더 이상 천시되지 않고
업무의 의미와 사회적 기여도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세종 14년(1432)에는
‘귀후소 매골(승)[歸厚所埋骨]’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세종실록’ 57권).
귀후소, 일명 귀후서(歸厚署)는 조선시대 예조 소속의 관청으로서
관곽(棺槨)을 만들어 판매하고 예장(禮葬)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는 활인원뿐 아니라
귀후서에도 일정 수의 매골승이 소속되어 무연고 시신들을 장사 지내주었던 것이다.
‘매골승’이라는 표현은 세종 대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의 발발로 전국적인 혼란이 극심하던 때에
다음과 같이 매골승의 존재가 다시 소환된다.
“듣건대 서울 안팎에 시체가 쌓여 있는데도
유사(有司)들이 거두어 묻지 못하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승려 가운데에 해골 묻어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기도 했었다. …
그들을 모집한다면 중외의 시체와 해골을
모두 묻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선조실록’ 43권)
매골승을 공권력에서 흡수하여 활용하던 제도는
세종 대 이후 어느 시점에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시신의 수습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매골승들의 활약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이 기사는 잘 보여 준다.
2022년 6월 8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