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수필】
눈길 사로잡는 내 고향 ‘신작로(新作路)’ 풍경
― 인생의 희로애락이 ‘신작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충남 청양 출신
최근에 글을 쓰면서 옛 고향 마을 풍경 사진이 필요했다. 고향 풍경을 촬영하려고 일부러 시골에 갈 수 없어서 청양군청 홈페이지 자료를 검색했다.
마침 내가 구하고자 하는 고향 마을 풍경을 만났다. 이 사진에서 유난히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눈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었으니, 마을 앞길이다. 서울행 버스도 이 길로 다녔다.
▲ 내 고향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가래울 마을 앞으로 난 <신작로>
나의 유년시절에는 ‘도로’라고 하지 않았다. ‘신작로’라고 했다. ‘신작로’라고 하면 요즘 손자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신작로’ 제목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30여 년 전, 그러니까 40대에 쓴 오래된 글이라 인터넷 검색이 가능할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향 신문을 검색해 보았다.
▲ 청양신문에 게재된 필자의 수필 <신작로> 일부 (1995년)
청양신문 인터넷판에 필자의 수필 ‘신작로’가 떴다. 그렇다면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닌 ‘비포장 신작로’를 초등학생 손자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까?
손자와는 이메일로 소통한다. 할아버지가 쓴 ‘신작로’ 제목의 생소한 수필을 소개하면서 손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려면 <그림>이 필요했다.
인공지능 화백(?)에게 내 고향 ‘신작로 풍경’을 부탁했다.
■ 필자의 말 :
대한민국 1960년대 충청도에서 시골길은 ‘도로’라고 하지 않고 ‘신작로(新作路)’라고 했어요. 비포장도로에는 자갈이 깔려 있어 버스가 지날 때는 흙먼지가 날리기도 하였지요.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도 신작로의 운치를 자아냈지요. 마을 앞 비포장도로인 ‘신작로’를 그려주세요.
▲ 흙먼지 날렸던 1960~1970년대 내 고향 <신작로 풍경>(그림=인공지 AI)
■ ChatGPT의 말 :
그려진 이미지는 1960년대 충청도 시골의 ‘신작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갈이 깔린 도로 위로 버스가 지나가며 흙먼지가 날리는 모습과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가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원하시는 느낌이 잘 표현되었나요?
■ 필자의 말 :
잘 그렸어요.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소달구지 그림도 필요해요. 농부가 쌀가마와 씨암탉을 싣고 장터거리로 가는 <신작로 풍경>을 그려주세요.
▲ 소달구지 타고 장터거리로 가는 <신작로 풍경>(그림=인공지 AI)
■ ChatGPT의 말 :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추가 요청하신 소달구지 그림입니다.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 되었길 바랍니다.
♧ ♧ ♧
그러면 내 고향 ‘청양신문’에 게재됐던 필자의 수필 ‘신작로’를 손자와 함께 달려가 보자. ‘신작로’는 승용차보다는 ‘소달구지’가 어울린다.
손자와 함께 소달구지를 타고 ‘내 고향 신작로 풍경’을 감상해 본다. ■
♧ ♧ ♧
청양신문 - 초대수필 1995.11.21.
신작로
윤승원 수필가. 충남 도경 근무, 장평면 중추리가 고향
장날이면 갈지(之) 자 걸음을 걷는 동네 아저씨도 더러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으면 혼자 흥얼거리면서 지나가기 마련이다.
장터거리로 방아 찧으러 가는 김 서방네 달구지에 씨암탉 두어 마리를 실어 놓고 어슬렁어슬렁 뒤따라 가는 건넛마을 아주머니의 여유도 돋보이는 곳.
가용(家用) 마련하려고 어머니가 잡곡 보따리이고 나오면 ‘되멕이 장사’(길가에서 농민들이 가지고 나오는 곡식을 미리 사서 되넘기는 장사꾼을 그렇게 불렀다.)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농산물을 잽싸게 받아서 가로수 밑에 가서 풀어헤쳐 보기도 하는 곳.
어머니는 고갤 저으며 더 안 주면 장터거리 싸전까지 가겠다 하고, 장사꾼은 그냥 넘기라고 하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약삭빠른 장사꾼이 한두 푼 더 얹어 준다는 바람에 순박한 우리 어머니의 보따리는 넘어가고 만다.
그런데 가만히 있자. 저기 가시는 분이 아무개 어르신네 아닌가? 수염이 허연 노인이 지팡이 짚고 경로당 가는 걸 보고 자전거 탄 젊은이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마가 땅에 닿게 절을 하니, 노인네는 남 바쁜 줄 모르고 대소 가내 안부 묻고, 긴 수염 쓰다듬으며 농사 작황은 어떠냐, 아이들 학업은 잘하느냐, 등등 차근차근 묻는다.
그래도 말씀하시는 대로 다 대꾸해 드리고, 맥고(麥藁) 모자를 반쯤 벗었다가 썼다 하면서 서너 번 더 머리 조아리다가 자전거에 올라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신작로를 내다보면서 가장 반가운 것을 빨간 자전거다. 갈색 가방을 흔들거리며 우리 동네로 접어 들어오는 우체부 아저씨가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가방 속에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가장 반가워하실 객지의 형님 편지도 들어 있고, 시집간 누나의 애틋한 사연도 들어 있었다.
편지를 어머니께 두어 번 읽어 드리고 나면, 어머니는 눈가의 이슬을 닦으시며 부엌으로 드신다.
나도 심란한 마음 달래려고 지게 지고 꼴 베러 나가는데, 저만치 지서(支署)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를 지나간다.
더러 장발(長髮) 총각들은 (장발 단속이 심했으므로)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먼 논둑길로 돌아다니는 걸 보았으나, 내 머리는 언제나 이등병 머리처럼 짧았으므로 두려울 게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밀주(密酒)를 담가 골방에 이불 뒤집어씌워 놓은 집이며, 청솔가지를 쪄다가 썩은 새로 덮어놓은 집에서는 지레 겁먹고 순경의 자전거가 어디로 꺾어지는지 동향을 살펴야만 했다.
그런데 웬걸, 청솔가지는 산림감시원이, 밀주 단속은 세무서 직원이 한다는 걸 안 것은 그 뒤로도 한참 뒤, 그러니까 내가 비로소 성년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장마가 끝나면 동네 사람은 모두 괭이와 싸리 소쿠리를 들고 신작로로 나갔다. 이른바 ‘길닦이 부역(負役)’을 나가는 것이다.
노면이 빗물에 씻겨 나가 물창을 튕기는 신작로를 보수하기 위해 가가호호(家家戶戶) 청년들이 동원되었던 것인데, 집 집마다 담당 구역을 표시해 놓고 자갈을 져다 부리는 등 도로 관리를 했다.
제대 후, 신작로를 바라다보는 농촌 청년의 가슴은 마냥 설렜다. 양복 차림에 서류봉투를 들고 늘 바쁘게 신작로를 지나가는 면서기 아저씨도 부러웠고, 굽 높은 구두에 고운 양산 받쳐 든 아리따운 국민학교 여선생님도 신작로 옆 논배미에서 피사리하던 총각의 눈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도 미구(未久)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저렇게 말끔한 양복 입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저기 가는 저 여선생님처럼 아리따운 규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야지. 그것은 정말 신나고 가슴 설레는 꿈이었다.
신작로!
색시가 첫날밤에 신랑이 무서워 벌거벗고 뛰쳐나와 이 신작로를 타고 친정집으로 달려갔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도둑이 훔친 쌀가마를 지고 이 넓은 신작로를 버젓이 활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른 새벽, 차부(車部)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에겐 모두 각자의 보따리가 있다.
서울 공장으로 취직하러 가는 아가씨도 옆구리에 조그만 보따리 하나 끼었고, 청운의 꿈을 안고 대도시로 나가는 학생을 배웅하는 어머니도 머리 위에 보따리 하나 얹어있었다.
이들 보따리 속에는 무슨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타향 객지에서 자식이 고생할 것을 염려하여 챙겨준 어머니의 시름이 그 속엔 가득 들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미리 나와 기다리건만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고, 짚단에 불을 지펴 언 발이 얼추 녹을 즈음에야 고개 너머로 버스의 클랙슨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떠나는 이나 배웅하는 이나 모두 가슴 설레게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신작로는 떠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림 또한 있는 곳이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명절이 되면 객지의 자식이 뻔히 못 올 줄 알면서도 막차의 엔진 소리에 행여나 내다보던 게 신작로가 아니었던가!
▲ 명절이 다가오면 <신작로>를 바라보면서 객지의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 모습(그림=손자 종운)
우리네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신작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장차 무엇이 한번 되어 보고 싶다는 욕망도, 그 어떤 대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신작로를 통해서 비롯되었으며, 우리의 의식을 알게 모르게 바꿔 놓은 신문명(新文明)과 신유행(新流行)도 신작로를 통하여 스며들었다.
또한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이를 만나 얼싸안는 기쁨도, 후행(後行) 술 한잔에 얼큰하여 두루마기 휘날리며 돌아오던 사람들의 불쾌한 얼굴도 모두 신작로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부운(浮雲)이요, 일장춘몽이런가!
만사(輓詞) 거느리고 북망산천(北邙山天)으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장죽(杖竹)의 서러운 행렬도 신작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 상여가 지나가는 내 고향 <신작로 풍경>
우리는 이 행렬을 바라보면서 잠시 숙연해진다. 바라다보는 사람마다 관심도 다르다.
연로하신 어른은 자신의 내일을 보는 듯 착잡한 심경이 되고, 빨래터의 아낙들은 상주의 숫자를 헤아려 보면서 번족(繁族)하다느니, 독자라 외롭겠다느니, 수다를 떨다가, 요령(鐃鈴) 잡이의 구슬픈 만가(輓歌) 소리에 그만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만다.
이처럼 온갖 애환이 전설처럼 되살아나는 내 고향 신작로를 오늘의 나는 승용차로 단숨에 달려올 수가 없다.
천천히, 그리고 잠시라도 내려서 아카시아 잎 따서 손바닥에 날려도 보면서 그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 (청양신문 초대수필 1995.11.21.)
▲ 내 고향 <신작로> 아카시아 가로수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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