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쉬피오네 풀조네
빛과 어둠의 신학은 16세기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소재였다.
중세교회는 전통적으로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어둠으로 표현했다.
‘죄악의 세상은 어둠이다.’라는 도식은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와
<완덕의 길>의 저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와
<어둔 밤>을 쓴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 등에 의해
가톨릭 영성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이냐시오는 <영신 수련>에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세상의 빛을 마음의 문으로 굳게 걸어 닫고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로 물든 본성을 돌아보라고 호소했다.
그는 <영신 수련>에서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
내면의 성찰을 통해 진정한 은총의 빛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이냐시오 성인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설립 초기부터 예술을 통한 신앙의 메시지 전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교육과 선교 분야에서 가톨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던 예수회 사제들은
예술을 사목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이라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실천했던 예수회 사제들은
과학, 수학, 천문학, 연극, 미술, 조각, 건축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는
유럽의 많은 화가와 건축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고,
많은 화가들이 예수회의 후원을 받으며 예술품 제작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예수회가 강조했던 가톨릭종교개혁의 정신을 미술로 승화하게 되었다.
감동적인 예술품은 설교보다 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술 양식이 ‘예수회 스타일’이 되었고,
예수회 화풍은 가톨릭종교개혁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예술적 부흥운동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회 미술의 특징은 적응과 유연성으로 요약된다.
예수회 화풍은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 이후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던 시대정신이 담겨 있었고,
그러한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쉬피오네 풀조네(Scipione Pulzone, 1550-1598)가 1591년에 그린 <애도>이다.
1589년에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 두 번째 경당에 설치될 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16세기 후반 예수회의 시대정신을 담은 모태가 되는 우아하고 경건한 예술품이다.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애도하는 사람들의 구성과 몸짓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정교하면서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극적인 상상력은
신심이 깊은 관람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여인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주검 앞에서 비탄에 잠겨 애도하는 모습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16세기 말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는
승리자 예수님이 아니라 고난 받는 예수님을 강조해서 보여주었는데,
16세기의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회개를 통해 신앙을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그리스도의 장례를 치루는 사람들의 마음을 묵상하다 보면
관람자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신앙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졌다.
그분은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맡긴 채 축 늘어져 있다.
예수님의 피부에 맴도는 창백한 빛깔은
우리 주님께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는 못 박힌 상흔과 창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분의 몸은 너무나도 깨끗하다.
채찍질을 당한 흔적도 없고 가시관의 상처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분의 거룩한 몸은 인간의 죄와 배신으로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두 손 모아 참회의 기도를 올린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들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님은 거룩하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
어머니의 눈가와 콧등은 붉게 충혈 되어 있고,
어머니의 뺨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성모님은 두 손을 꽉 쥐고 우리 죄의 용서를 아들 예수님에게 청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어머니께 도움을 청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넋 나간 표정을 짓고 맥 풀린 두 손으로 예수님의 발을 떠받들고 있다.
마리아는 베타니아에서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우리도 마리아를 바라보며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 마리아 막달레나를 봅니다.
그녀는 당신께서 바리사이 시몬 집에 들어가셨을 때
눈물로 당신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당신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저희도 마리아처럼 상처 받은 당신 발에 눈물을 적시고
당신 발을 닦아주게 하소서.
주님, 마리아는 줄곧 당신 발에 입을 맞추었고,
당신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희도 당신께 큰 사랑을 드러내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소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그리스도의 몸을 흰 천으로 싸서 경건하게 떠받치며
성모님께 몸짓과 시선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바치고 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고,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요셉의 붉은 색 옷은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을 상징한다.
요셉 뒤에는 참회를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은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 사용한 사다리를 거두고 있다.
그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유를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요셉과 니코데모처럼 어머니께 간청한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손에 가시관을 들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다.
성모님과 요한 뒤에는 갈릴래아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세 여인이 서 있는데,
한 여인은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고,
다른 한 여인은 턱을 괴고 슬퍼하고 있으며,
마지막 한 여인은 앞사람의 머리에 얼굴이 가려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이모였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내 살로메를 비롯하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가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배경에는 하루해가 저무는 저녁풍경을 그렸다.
뭉게구름 아래 있는 붉은 노을은 무엇을 암시할까?
풍경과 인물들 사이에 있는 십자가와 사다리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루의 끝자락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묵상해야겠다.
화가는 예수님의 몸을 받치고 있는 흰 천의 가장자리에 금실로 자기 이름을 새겼다.
예수님의 몸을 바치는 흰 천은 제대보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몸이 축성되는 제대보에 우리 이름을 새기면 어떨까?
<애도>는 작품이 걸릴 공간과도 도상학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작품 속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의 몸은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들어 올리는 성체의 높이와 겹치게 된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강조하는 칠성사와
칠성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체성사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대에서 축성된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16세기 말 트리엔트 공의회의 시대정신이
풀조네의 <애도>를 통해 예수회 성당에 표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