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의 비의를 탐사하는 시와 사진
-박지영 시사집(詩寫集) 『평창 가는 길』
박지영의 새 시집 평창 가는 길에는, 시사집(詩寫集)이란 명호(名號)가 붙어 있다. 시와 사진을 하나로 묶어 쓴 시집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우리 선진 예술가들은 화선지에 풍경화를 그리고 꼭 시문 몇 줄을 덧붙여 시화를 이룬 적이 많았다. 사진 기술이 보급된 이후에는 사진에 자유롭게 시를 덧붙인, 사진시(Photo-Poem)란 시의 형식도 있었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스마트폰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누구나 '손안의 작은 우주'를 소유하고 또 거기에 장착된 성능 좋은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되자, 그 사진과 부합하는 몇 줄의 강렬한 시가 연합하여 디카시(Dica-Poem)란 새로운 문예 장르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동시대 영상문화의 확산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로 진입해 온 것이다.
디카시는 사진과 시의 조화로운 만남, 곧 그 양자의 화학적 결합을 지향한다. 순간 포착의 영상과 촌철살인의 시가 상호 조응하여 시너지 효과를 발산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리고 그렇게 생성된 시를, 동호인들이 SNS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기동성을 보인다.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사유(思惟)의 깊이를 담보할 수 있으면, 좋은 디카시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된다. 그런 까닭으로 디카시의 시는 그다지 길지 않은 편이 유리하다. 디카시의 주창자들은 그리하여 시의 분량을 5행 이내로 제한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공모전이나 시상의 심사에서도 이 분량의 준수를 요청해왔다. 당연히 누구나 그에 부응해야 할 일은 아니로되, 또 굳이 거절할 일도 아닌 터이다.
박지영의 『평창 가는 길』이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시사집(詩寫集)'이란 명패를 내걸고 사진과 시를 병합하고 있으나, 디카시의 일반적인 규범을 벗어나기도 하는 상황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적이고 생래적(生來的)인 자유의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작가의 말」에서 "요즘 말하는 '디카시'와는 궤를 달리한다"고 언명(明)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집 전반을 통독해 보면, 많은 이들이 하나의 시대적 사조로 수긍하는 디카시의 창작 유형에서 전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기에 필자는 그의 시들을 디카시의 독법으로 읽을 것이며, 그것이 오히려 그의 시 세계를 더 잘 해명하는 길이 되리라 여겨진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난을 그리는 데 있어서 법이 있다는 것도 안될 말이지만, 법이 없다는 것도 안될 말이다"라는 의미심장한 수사(修辭) 남긴 바 있다. 화필의 운용에 있어서 독창성과 규범성의 존재 양식을 한꺼번에 발화한 기막힌 표현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글쓰기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지금 여기 박지영의 시를 읽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지침이 될 수 있겠다. 오래 시를 써 온 자신의 비유 또는 상징의 창작 방식을, 강렬한 시각의 사진과 결합했을 때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박지영의 시는 여전히 탄력 있고 웅숭깊다. 그의 사진은 한 컷 한 컷 평이한 것이 없다. 오랜 시작의 연장선상에서 문득 새로운 길을 열어나간 듯한 후감이 거기에 있다.
1부에 수록된 시들의 중심을 이루는 언어는 '당신'이다. 그 당신은 기다림과 그리움을 동반하는 연인이자 자아의 각성이며 우주적 생명력이다. 이 엄중한 인식에 그의 사진들이 조력(助力)을 다한다. 「저 길」의 당신은 가로등이 호젓하게 서 있는 어두운 밤길, '대숲을 안고 돌면' 거기 약속처럼 서 있는 존재다. 「손짓」의 잔잔한 시내는 고대가요의 애절한 당신, '백수광부의 처'를 불러낸다. 「솟대」의 당신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직설적이다. 시인은 가늘고 높은 솟대 하나를 세운 다음, "당신을 향해 웃자란 마음이 설레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세상 곳곳에, 가닿는 눈길의 자국마다 당신으로 편만하다면 이보다 절실한 정감은 다시 보기 어렵다.
2부의 시들에서 가장 주목을 요하는 어휘는 '견딤'이다. 그 견딤은 우선 가족사의 기억과 그 아픔 또는 안타까움을 수반하고 나타난다. 「쉼」의 푸른 들녘은 '아버지가 일을 내려놓은' 뒤 끝에 있고, 「가족」의 비에 젖은 외진 길은 시적 화자가 '엄마와 아빠'와 함께 조바심하며 걷던 자리다. 그다음의 시편들을 보면 이 모든 풍경이 시인의 견딤 위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체통」의 적색 외형도 하루를 견뎌야 하고, 「길 위에」의 싱그러운 망초는 줄줄이 가족을 잃은 '나'의 견딤을 부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추녀」의 퇴락은 오래 견디어 온 '눅진한 시절'의 슬픔을 보고 있으며, 「십년」의 휠체어는 '깨어 있어야 견디는 것'임을 증거한다.
3부의 시들은 여행지의 풍경을 시로 살려낸 작품이 주류다. 누군가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라는 언표를 내놓았지만, 시인은 여행의 도중에서 얻은 시와 영상으로 일상 너머의 의식을 발굴하고 또 공유한다. 「섬」에서 연육(連陸)을 가져온 초대형 현수교를 보여주며, 시인은 '신비가 사라진 섬'은 설레임도 사라진다고 단정한다. 「여행 」 에서 섬을 찾아온 시인은 망연자실 내 속의 섬을 찾아 들어왔다고 말한다. 섬과 바다와 하늘은 어느결에 범상한 의식의 옷을 벗고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다. 이 새로운 생각의 지평들을 두루 밟아볼 수 있기에 여행이다. 동시에 여행이 공여하는 '숨겨진 보화'를 발굴하는 기쁨이 거기에 있기도 하다.
4부에 이르면 여러 편의 「폭설」 시편을 만난다. 이 시집의 제목이 '평창 가는 길'로 되어 있는 연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시인은 '고요 속으로 소멸 시효의 길'을 걸어 들어가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 가운데는 가슴에 묻은 '아림이'의 기억도 있다. 그 기억은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내 속의 심장에 난 괭이 하나'인 형국이다. 산중의 폭설만 그러한 깨우침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바다로 발길을 이끈 시인의 눈길은, 「늦가을 대포리」에서 타인의 인생'을 가늠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다시 봄」의 물길에도 '전생의 범문 같은 딸'이 잠복해 있다. 「삶」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 '잠시 머물다 간다. 그러기에 「상사화」의 꽃 한 송이를 보며 '천륜의 바퀴'를 연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공들여 살펴본 박지영의 사진시들은, 궁극적으로 삶의 고단함을 넘어서는 인식의 개방을 지향하고 있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일상의 소소한 경물들을 소중한 사진으로 거두어들이면서, 거기서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생 세간의 이치를 깨우치려 시도한다. 기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힘은, 무슨 엄청난 국면에 결부되어 있지 않다. 작고 소박하지만 품격있고 깊이 있는 각성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가 「순수의 전조」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한 그 형이상학적이고 압축적인 시 정신이 바로 박지영의 세계와 닮아있다. 그의 이 새로운 모형의 글쓰기가 더욱 일취월장하여, 우리가 더 깊고 좋은 시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4. 11. 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