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3)
(양화진외국인묘역∼용산성당, 2023년 2월 8일)
瓦也 정유순
양화진외국인묘역을 나온 발걸음은 합정역교차로에서 독막로를 따라 노고산 성지로 출발한다. 합정역은 1984년 5월 서울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개업하였고, 2000년 12월 6호선이 개통되면서 환승역이 된다. 합정은 과거 조개우물이 있어 붙여졌다. ‘합정(合井)’은 원래 한자로 ‘蛤井’이라 쓰였다. ‘잠두(蠶頭)봉’이라 불렀던 절두산(切頭山)에서 조선시대 망나니들이 칼춤을 추기 전에 칼을 갈고 물을 뿜기 위해 양화진 앞에 우물을 팔 때 민물조개가 많이 나와 조개우물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합정역>
독막로는 지하철 6호선 지상으로 개설한 도로로 마포구 합정역 교차로와 도화동 SK허브그린오피스텔을 잇는 길이다. 상수역을 지나 광흥창역에 당도하기 전인 서강초등학교 부근에는 <공민왕사당>과 <광흥당>이 있어 들러본다. 이곳은 조선시대 초 서강일대에 양곡 보관 창고인 광흥창을 지으려 할 때 창고 관리인에게 현몽한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봉제를 하고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한다.
<공민왕 사당과 광흥창>
<공민왕 사당>
건립 초기에 조선 태조는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을 탐탁하지 않게 여겨 불신동자를 모셔놓고 신당 또는 당이라 불리었으나 약200년 전부터 공민왕사당의 칭호를 되찾았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쟁 직후 주민들이 새로 건축했다. 주위에는 서울시 지정보호수(제48호)인 느티나무 5그루와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다. 민간 전통 건축 자료로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광흥당>
공민왕사당을 나와 서강로를 건너 경의중앙선 서강대역을 지나면 서강대학교다. 서강대학교(西江大學校)는 1948년 한국가톨릭교회 발의 및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1960년 4월 개교하였다. 교훈은 ‘진리에 순종하라’다. 1964년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고, 197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지금은 8개 학부와 12개 대학원으로 약 8천여 명의 학생들이 수학한다.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가 안주한 곳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노고산(老姑山, 106m)자락이다. 교정 안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참수된 3인의 프랑스 신부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세 사람은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앵베르[1797∼1839, 한국명 범세형(范世亨)]주교와 모방[1803∼1839, 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신부 및 샤스탕[1803∼1839. 한국명 정아각백(鄭牙各佰)]신부다.
<노고산 성지>
이들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한강변에 20여 일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신자들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 노고산에 표시도 묘비도 없이 남의 땅에 매장 하였던 곳이다. 4년 후 박 바오로는 자신의 선산인 관악구 삼성산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절두산에서 순교하게 된다. 서강대학교 정문 안 좌측에는 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3인을 기리는 현양비가 있다.
<앵배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현양비를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시성(諡聖)된 성 이냐시오(Ignatius)관이 나온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는 예수회의 설립자로 스페인 북부 비스크지역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기사로 출세하려 했으나,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훌륭한 동료들을 만났고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로마에서 예수회를 창설하여 인가를 받는다.
<성 이냐시오(Ignatius)관>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로 이를 집약하면 예수회 주제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이다. 이러한 이념을 가진 예수회가 전 유럽에서 수도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세운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서강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노고산기슭에는 ‘로욜라 언덕’이 있고, ‘이냐시오 데 로욜라’성인의 동상이 있다.
<성 이나시오관 예배당>
서강대학교에서 나오면서 바로 경의선 숲길로 들어선다. 경의선 숲길은 경의선 및 공항철도가 지하에 건설되면서, 그 상부에 조성된 공원이다. 지하 약 10∼20m 아래에 경의선을 복선으로 건설하고, 그보다 더 아래인 지하 약 30∼40m에 공항철도를 건설하여 공원부지를 마련하였다. 철도부지의 소유권자인 철도시설공단 측과 서울시는 앞으로 무상으로 공원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동안 지역적 단절요소로 남아있던 철길이 새로운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경의선 숲길 - 2019년 5월>
숲길 대부분이 철로를 철거하고 나무 등을 심어 녹색공간이 흐르는 공원화를 하였으나, 일부 구간은 철로를 그대로 남겨 놓아 옛날의 추억을 불러 올 수 있게 만들었다. 마포구 신수동∼대흥동∼공덕동∼도화동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옛길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이웃과의 소통을 열어주었고, 도시인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공덕역 10번 출구 밖에는 경의선숲길공원관리사무소가 있다. <공덕>은 과거 ‘큰덕이, 큰덕’으로 불리던 것이 음이 비슷한 한자 공덕(孔德)으로 된 것 같다.
<경의선숲길공원 관리소>
공덕역에서 효창동으로 넘어가는 새창고개에서 우측으로 꺾어 또 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용산성당이다. <새창>이란 이름은 고개 부근에는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도창고인 만리창을 이곳에 새로 지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옛날에는 인근 마을을 새창마을이라고 불렀다.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
<새창고개 - 2019년5월>
용산구 산천동에 있는 용산성당은 1920년경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삼호정(三湖亭)공소로 출발하여 1942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일제는 한국 교회의 교구장 자리에 일본인 주교를 임명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당시 제9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주교의 노력으로 인해 노기남신부가 제10대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용산성당 출입문>
이후 라리보 주교는 거처를 용산신학교로 옮겨 용산의 성모성심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였으며, 노기남주교의 인정 하에 당시 약현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용산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가 용산본당을 대공포진지로 사용하면서, 신학교 내의 예수성심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려야 하는 시련도 있었다. 광복 이후 훼손된 성당을 복원하였고, 1954년 12월 5일 성당을 완공하여 노기남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용산성당>
특히 이곳에는 초기 사제들과 무명 치명자 등 70여 기의 유해가 안장된 <교구 성직자 묘지>가 있어서 전국의 성직·수도자들과 신자들이 찾아오는 준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또한 2010년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모 순례지 전대사(全大赦) 특전을 부여받아 용산성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도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을 순례한 것과 동일한 전대사가 수여된다고 한다.
<용산성당 안의 성직자 묘>
용산성당 아래에는 <산천동 부군당>이 있다. 이곳은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기 위해 해마다 여름철이면 물놀이 사고와 배의 참몰 등 액운을 없애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들여 떡과 술 등을 마을의 신인 부군(府君)에게 바치며 치성을 드렸다. 약 400년 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부군당은 원래 한강 변 저지대인 산천동 한복판에 있었으나 1980년대 말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산천동 부군(府君)당>
https://blog.naver.com/waya555/223010965355
첫댓글 바쁘신 중에도 우리방에 열심히 게시글 올려주심에 늘 감사드립니다
2월 이벤트 당첨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게시글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