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또 욱신거린다 - 이상아
여간해서는 마침표를 찍기 어려운 문장들이
새벽안개에 밀려다니는 자유로를 지나왔다
과일들은 저마다 가뭄을 원망하며
증오하던 세월만큼의 당도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들을 보며 맛있겠다는 생각 한발 앞서서
차암 아파겠구나 아팠겠구나 가슴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사라지는 동네를 보고 있다
모두들 길을 찾느라 분주한 그 동네에는
여름과 겨울 사이에서 만나는 축이 있다
가만히 기울어 패인 자국처럼 보이는 얼룩
욱신거리면서 익는 시간들이다
그 축을 중심으로 하루는 돌고
말하기 좋아하는 새들은 오늘도
매일 가는 그 자리에 앉아 겪은 흉년이나
가뭄이라고 여겨왔던 시절들을 이야기한다
여간해서는 마침표를 찍기 어려운 문장들이
아직은 입이 되지 못하고 손이 되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한 나의 생각이
아무도 거기까지는 걷고 싶어하지 않는
길 중에 길 사금파리 언덕을 넘으며
으깨어지는 내 살보다
익은 과일들의 단내가 더 아프기만 한 세월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만 욱신거리며 익는다
* 이상아 시집『나무로 된 집』(리토피아, 2004)
[감상]
여름과 겨울사이 욱신거리며 익는 시간들,
익은 과일들의 단내가 더 아프기만한 세월,
아무도 걷고 싶어하지 않는 길 중의 길
사금파리의 언덕을 넘으며
오늘도 그녀는 마디마디 욱신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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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아] 시간이 또 욱신거린다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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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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