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면(馬利面)의 유래
거창군 서부의 남단에 자리하며, 마리면의 동북쪽에 솟은 취우령(驟雨嶺)에서 남쪽 건흥산(乾興山)을 향해 뻗는 산줄기가 동쪽 거창읍과 경계 짓고, 북쪽은 위천면과 맞닿으며, 남서쪽은 기백산(箕白山) 줄기가 함양군 안의면과 군계를 이룬다. 본 면은 조선말까지 위천면, 북상면과 함께 안의군에 따랐다가 1914년에 거창군에 들어왔다. 본 면의 북부는 동리면 (東里面)이라하여 장백 ㆍ 신벌 ㆍ 영승 ㆍ 상율 ㆍ 하율 ㆍ 월화 ㆍ 사동 ㆍ 신기 ㆍ 지동 ㆍ 등동(登洞) ㆍ 주암 11개마을이 있었고, 남쪽에는 고창 ㆍ 구라(仇羅) ㆍ 엄정 ㆍ 고학 4개 마을에 남리면(南里面)을 두었는데, 남리면은 신라 경덕왕 16년(757) 까지 마리(馬利)라하다가 이안현(利安縣)이 되어서 천령군(天嶺郡)에 따랐다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감음현(感陰縣)에 합쳐져서 안음현 ㆍ 안의현 ㆍ 안의군의 남리면이었던 것이 1914년에 동리면과 합하여 마리면이 되어서 거창군에 붙었다. 동리면은 위천 ㆍ 북상과 함께 가야시대까지는 염례 ㆍ 남내(稔禮 ㆍ 南內)라고 하다가 757년에 여선현(餘善縣)이 되어서 거창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감음현에 따랐고, 그 뒤 조선 영조 5년(1729)에서 영조 12년 (1736)까지 거창에 붙여졌던 일 밖에는 1914년까지 안음, 안의현 또는 군이었다. 지금은 영승리 ㆍ 율리 ㆍ 월계리 ㆍ 말흘리 ㆍ 고학리 ㆍ 대동리 ㆍ 하고리 7개 리에 23개 마을이 있다.
영승리(迎勝里)
본 면의 동쪽으로는 취우령(驟雨嶺)이 거창읍과 경계를 이루며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 아래로 위천천이 나란히 흐르는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취락조건을 갖추고 있어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 영승리에는 영승 ㆍ 계동 ㆍ 장백 등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영승리라는 명칭은 3개 마을중 가장 큰 영승마을에서 비롯 되었다.
- 영승(迎勝)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이 마을에서 영접하고 환송하였으므로 영송(迎送)이라 하던 것을 중종 38년(1543)에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살던 처외숙 전철(全轍)과 그때 여기에 우거(寓居)하던 장인 권질(權瓆)이 회갑을 맞게 되므로 이곳을 찾았다가 영승으로 고쳤다. 조선초에 정선에서 정선 전씨가 옮겨오고, 이어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서울에서, 선산 김씨가 함양에서, 파평 윤씨가 서울에서 각각 옮겨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영승리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제일 큰 마을이다.
- 계동(溪東), 초동(草洞)
거열산성 밑 계전(桂田)골짜기 동쪽에 자리하므로, 또는 영천 냇물의 동쪽이라 하여 계동(桂東 ㆍ 溪東)이라 하고, 숲을 치고 마을을 열었으므로 “섶풀” 또는 신벌(薪伐)이라고도 한다. 냇물을 가운데 두고 동쪽을 계동 또는 계전(溪東 ㆍ 桂田)이라 하며 200여년 전에 창녕 조씨가 처음 살았다 하고, 서쪽을 초동(草洞) 또는 “어덕밑” 이라하고 150여 년 전 김해 김씨가, 뒤이어 성산 이씨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 장백(長白)
마을 앞을 흐르는 위천천 주변에 긴 모래밭이 있었으므로 이름되었고, 무신란 때 해주 오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율리(栗里)
본 면의 북동쪽 끝에 자리하여 위천면 당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구(舊) 읍지(邑誌)에 의하면 예부터 이곳에는 율도(栗島)가 있었다고 한다. 율리란 명칭도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상율 ㆍ 풍계 ㆍ 장풍 ㆍ 도동으로 나눈다.
- 상율(上栗), 도동(道洞)
옛날 귀양살이 온 선비가 이 곳에 살면서 위천면의 진동암(鎭洞岩)을 댓섬, 영승 북쪽의 안갱이들을 조개섬이라 하고, 귀양살이 하는 사람은 섬에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곳을 “밤섬”이라 하였다 하며, 일제 때 상율로 고쳤다 한다. 달성 서씨가 터를 잡아 형성되었다 도동(道洞)은 밤섬(上栗)과 위천면 당산(堂山)사이의 큰 길가에 있으므로 도동이라 하고, 매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매바우”라고 부르며 진양 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풍계(豊溪), 장풍(長風)
위천에서 내려오는 영천(위천)과 모동에서 내려오는 냇물경이 합류하여 하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해 “풍계”라 이름했고, 흔히 “핑기”라 부른다. 500여년 전 고성 이씨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윗담 ㆍ 아랫담ㆍ삼태동(三胎洞)ㆍ 장풍 등으로 이루어 졌으나 삼태동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 장풍(長風)에는 조선시대 역원인 장풍원(長風院)이 있던 곳이다. 안의(安義) 반락원(反樂院)에서 고학 쌀다리 ㆍ 창촌 너들다리를 거쳐 여기에서 내를 건너 고제 높은다리,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촌이 있었다.
월계리(月溪里)
마리면 서쪽 기백산의 동북동 능선에 솟은 오두산(烏頭山 : 942m)와 영천과의 사이에 동남향의 터전에 자리한다. 월계는 월화(月華)의 월자와 월화 ㆍ 학동 ㆍ 토점에서 동쪽으로 영천에 흘러 들어가는 여러 가닥의 시내에서 시내계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월화, 영신, 학동, 성락, 토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월화(月華)
조선 선조 때(1601) 하빈인 월담 이정기(月潭 李珽期)가 남하 지산에서 아랫담에 옮겨 와서 그의 호에 ‘월’을 따고, 빛날 ‘화’자를 붙여 이름 지었다. 처음 아래터와 웟터골에 살다가 같이 모여살면서 “새말”이라 했다. 본래 고려말 조선 초에 한양 조씨가 웃담 건너담에 살다가 위천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 영신(迎新)
400여 년 전 하빈인 이정기가 옮겨와서 “새터”라 부르다가 영승으로 가던 퇴계 이황 선생을 여기서 처음 영접했다는 뜻에서 영신이라 한다. 1948년까지 마리면 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고, 일제 때 거창경찰서 마리면 주재소도 이 마을에 있었다.
- 학동(學同)
마을 서쪽 300미터에 있는 산(시루봉)에 흰 바위가 있어 백암(白岩)이라 하다가, 서당골에서 글공부를 하였기에 “학동”이라 하였다. 일제때 배움골이 배암골 사동(蛇同)으로 불러 오던 것을 1992년 “ 학동”으로 바꾸었다. 풍수설에 이 마을터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은 형국이라 사동이라 하고, 뒷산이 황새봉(鶴峰)이므로, 황새가 뱀을 해치지 못하게 마을 가에 숲을 길러서 마을을 가리게 한다는 설이 있다. 정선 전씨가 영승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성락(星洛)
- 별똥이 떨어졌던 곳이라 성락(星洛)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영천 물이 이 마을 터로 흐르는 곳에 소가 있었고, 그 소에 별이 떨어져 “벼락소”라고 하였다. 1945년 거창 유씨가 처음 터를 열었다.
- 토점
- 토점은 옛날에는 “작은 등골(小登谷)”이라 하였는데 1670년대에 옹기를 굽는 가마가 생겨서 “옹기골”이라 하다가 토점으로 바꿨다. 진양 하씨가 처음 터를 열었다
말흘리(末屹里)
본 면의 한가운데 자리하며 고학에서 내려오는 주암천에 의해서 남 ㆍ북으로 나뉘어졌다. 말흘은 마을과 관청의 옛말 “마 ㆍ 마을”에서 나왔고, 가야시대 이 근처의 부족을 다스리던 우두머리가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진산 ㆍ 지동 ㆍ 주암 ㆍ 재음 ㆍ 창촌 ㆍ 원말흘 ㆍ 송림 7마을이 있다.
- 진산(進山)
면사무소 ㆍ 지서 ㆍ 단위농협 ㆍ 마리우체국 ㆍ 마리초등학교 ㆍ 마리중학교 들이 있다. 옛날에는 “지동 아랫담”이라 하다가 마을 뒷산인 마이봉(馬耳峰)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 진산이라 하고 “진살미”라 부른다.
- 지동(池同)
옛날 백제로 사신을 보내면서 꼭 돌아오라는 뜻에서 회동(回洞), “도롱골”이라고 하였다. 마을 동쪽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고, 남쪽에서 북으로 뻗은 앞산을 구유(구시)등이라 하며, 남동쪽산은 속초봉(束草峰)이고, 앞 개울이 구유 앞을 흐르는 형국이므로 1928년에 못을 파서 소가 물을 마시게 하고 이름을 지동(池同)으로 고쳤다.
- 주암(舟岩), 재음(才陰)
마을 뒤편 소류지 우측 작은 산아래에 배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배바우”라 하고 그바위에 주암(舟岩)이라 새겨져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 재음은 이로재(履露齋) 위 산골짜기에 있다. 옛날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어 “독점”이라 하다가 재음으로 이름 하였다.
- 창촌(倉村)
안의현의 동창(東倉)이 있었으므로 “창말”이라 불리다 창촌으로 고쳤다. 200여 년 전 전주 이씨가 거창읍 국농소에서 옮겨 왔다고 전한다.
- 원말흘(元末屹), 송림(松林)
말흘리에서 가장 크고, 먼저 생긴 마을이다. 옛날에는 “먹골 ㆍ 오곡(梧谷)”이라 하다가 일제 때 원말흘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송림사(松林寺)에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150여 년 전에 정선 전씨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고학리(皐鶴里)
본 면의 서쪽끝에 솟은 기백산의 동남기슭에 자리하여 남동쪽 함양군 안의면과 경계한다. 가야시대 마리(馬利)에 따랐고, 마리는 머리(頭 ㆍ 首)의뜻으로 부족장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한다. 8세기 통일신라 때 천령군 이안현(天嶺郡 利安縣)이 되었다가 14세기말 고려 고양왕 때 감음현(感陰縣)에 속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음 ㆍ 안의현의 남리면 소 재지가 되었다. 높은 언덕 앞에 세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개울물은 새 ‘을’자로 모여 흐른다. (高阜前庭 三峯立 泉水合流乙字溪)라는 글귀모양 첩첩산중에 계곡이 아름다운 곳이다. 고학은 높은 언덕이며 풍수설의 산세 모양에서 높을 ‘고’자, 새 ‘학’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병항 ㆍ 고신 ㆍ 고대 ㆍ 상 촌 4개 마을이 있다.
- 병항(柄項)
마을의 동쪽 당봉(堂峰)의 자라바위와 서쪽의 자라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중앙의 목넙 고개터에 자리하고 있어 자래목이라 하다가 일제때 병항으로 고쳤다. 400년전 해주 오씨 구화 오수의 후손들이 터를 열었다고 한다
- 고신(皐新)
약 400년전 띠말리촌(茅旨村)에 해주 오씨가 살기 시작했으나 땅이 높고 경사가 급하여 일상생활이 불편하였고, 산사태로 바위가 무너져 위태로워지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고학에 새로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고신(皐新)이라 칭하다가 일제때 고신(告新)으로 했던 것을 다시 고신(皐新)으로 개칭하였다
- 고대(皐大), 상촌(上村)
신라초에 마리현의 치소가 있었다 하고, 안의군 남리면(고학리, 대동리, 하고리)의 소재지며 고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어서 고대(皐大)라 불렀다가 일제때 고대(告大)로 했던 것을 다시 고대(皐大)라 개칭 하였다. 창녕 성씨가 처음 입동 하였으며 이어서 광산 노씨, 파주 염씨, 평산 신씨가 입동 하였다 한다 상촌(上村)은 고학리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하여 상촌이라 하며 양씨, 이씨가 처음 터를 열었다 한다
대동리(大東里)
본 면의 서쪽 끝 기백산에서 바래기(反樂)재까지 뻗은 능선은 그대로 남동진하여 안의면 귀곡리 ㆍ 초동리와 경계를 이루고, 한 가지는 동북진하여 말흘리로 향하는데 이 두 산줄기의 동남쪽 골짜기와 서쪽 부분이 대동리다. 대동리는 옛 동리면의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신기 ㆍ 시목 ㆍ 엄대 ㆍ 동편 ㆍ 서편 5개 마을이 있다.
- 신기(新基), 삼거리
- 마을 남쪽 황새들과 북쪽 황새밭들 중앙에 위치한 알자리 터라 하여 봉기(鳳基) 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안의군 남리면 새터를 근래 신기라 고쳤다. 영양 천씨가 처음 터를 열었다
- 삼거리는 옛날 안의, 거창, 위천으로 향하는 삼거리 분기점으로 이름 하였다
- 시 목(柿木), 서편(西便)
- 마을 앞산이 관악산(冠岳山)이고, 옆산은 관하산(冠下山)이며, 두 산의 남쪽에 자리하므로 관남동(冠南洞). “감남말”이라 하다가 일제 때 시목이라 하였다. 약 300년전 진양 강씨와 진양 하씨가 비슷한 시기에 등어 왔으며, 창년 성씨가 서편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 서편은 마을 앞 불마개울과 역마두 서쪽에 있으므로 서편이라 하고, 서평(西坪)이라고도 하였다. 창녕 성씨가 터를 닦은 이후 합천 이씨가 위천 강천에서 옮겨 왔다
- 엄대(嚴大)
- 마을 뒷산이 엄정하게 뻗어내려 대와같이 생겼다 하여 엄대(嚴台) 또는 산골의 그늘진 곳이라 하여 엄대(陰垈)라 했다 고 하고, 또는 마을에 살던 반남 박씨 문중에 효성이 지극하고 행실이 엄하고 단정하여 엄대(嚴大), 그가 사는 곳을 “엄정골”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처음 전씨, 허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 동편(東便)
- 마을 앞을 북쪽으로 흐르는 불마개울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편이라 하고, 동평(東坪)이라고도 하였다. 송씨, 김녕 김씨가 처음 들어 왔다고 한다
하고리(下高里)
마리면의 동남단에 솟은 662cm의 망덕산(望德山) 서북 기슭에 자리하며 동쪽은 거창읍 송정리, 남쪽은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와 맞닿인다. 하고는 아래에 있는 소곡과 높은 곳에 있는 고창(高昌)을 아울러서 일컬는 말이다. 고창 ㆍ 세동 ㆍ 소곡 3개 마을이 있다.
- 고창(高昌), 세동(細同)
- 하고리의 높은 재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치이”라 하다가 고창으로 고쳤다. 윗담, 아랫담인 상고(上高)와 하고(下高) 두 담으로 나눈다. 상고창은 동래 정씨가, 하고창은 거창 신씨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
- 세동은 지금 마을의 북쪽 400m 멀미양지골에 허씨가 살았다 하고, 북쪽 600미터 구부골(具富谷)에 구씨라는 부자가 아들 8형 제를 기르며 살았다 하며, 뒤이어 안의 귀곡에서 합천 이씨가 옮겨와서 5가구가 살면서 오가리라 하였고, 고창 옆에 있으므로 고치의 옆대기 라고도 했으며, 집이 늘어나면서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가는골 세동이라 했다.
- 소곡(巢谷)
- 마을 뒤편 노송에 학이 살았으므로 소학실(巢鶴谷)이라 부르다가 소학실이 와전되어 씨악실이 되고 지금은 소곡으로 부르고 있다. 일설은 마을 앞을 흐르는 영천이 씨아의 손잡이 모양으로 구부러졌으므로 씨악실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 청송 심씨, 장수 황씨가 터를 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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