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에
대한
역사사료
?∼846
장보고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통일신라 말기인 서기 790년경 전라남도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고 기록된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장보고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리었고 훗날 일본에서는 재신(財神)을 의미하는 장보고(張寶高)로 높여 부르고 있다.
장보고는 헌덕왕 12년인 서기 810년경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지금의 중국 강소성 서주 지방의 절도사 휘하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하여 이민족으로서는 예외적으로 30세 초반의 나이에 군사 5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무령군중소장'직까지 올라 군인으로서 출세를 하게 되었다.
이후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위치한 적산포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 신라촌의 총수로 성장하였다.
당나라에서 무령군중소장으로 재직시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선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인신매매 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격분한 후 신라인을 구하고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서기 828년 무령군중소장직을 버리고 귀국하여 신라 제42대왕인 흥덕왕을 배알하고 서남해안의 실태를 보고한 후 완도 청해진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으로 소탕할 것을 건의하자 국왕은 군사 1만명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 노예상을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해 있던 군소 해상집단을 평정한 후 중국과 일본내의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신라·당·일본의 삼각해상무역의 실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자위적인 군사력마저 보유하여 동북아시아의 해상교통권과 무역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견당 매물사' 또는 '회역사' 등의 명칭으로 당과 일본에 교관선을 파견하거나 멀리 아리비아 상인들과의 무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명실상부한 해상무역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한편 제42대 흥덕왕 사후 신라 조정은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막강한 군사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장보고의 도움으로 제45대 신무왕에 등극한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벼슬를 하사하고 장보고의 딸과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간의 혼인을 약속하였다. 신무왕이 등극 4개월 만에 사망하고 아들 김경응이 서기 839년 제46대 문성왕으로 등극하자 문성왕은 부왕의 약속에 따라 장보고의 딸을 왕비(차비)로 간택하려 하였으나 장보고의 세력강화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이 장보고는 '해도인'이고 장보고의 딸은 천민이라는 구실로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 부하였으나 장보고를 시기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신분상의 지위향상을 노리고 있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서기 851년에 완전 해체되었으며 장보고의 부하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도피하고 청해진 주민들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제'로 강제 이주되면서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등에 장보고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 있으며 가장 권위 있고 자세히 언급된 역사서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서 9년 6개월 동안 불교수업을 한 일본의 대표적인 구법승 엔닌(円仁)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대부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업적에 대한 내용은 없고 국내의 정치사항만 언급되어 있어 부정적 이미지만 강조되어 있는 실정이다
최인호
소설"해신"에
대해
2002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었고, 2003년 KBS의 5부작 특집 다큐멘터리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최인호의 신작 장편. 당나라와 일본의 삼각무역을 통해 상업제국을 연 해상왕이자 무역왕이었던 장보고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작가 특유의 재기 넘치는 필치로 묘사했다.
소설 속 화자가 일본 역사상 가장 용맹하고 무사다웠던 다케다 가문의 시조였던 미나모토 요시미쓰가 자신의 이름을 성과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바꾸었던 것에 관해 의문을 품고 신라사부로의 비밀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는 매력적인 인간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야망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혁명아라는 오해를 풀고 해신 장보고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 작가 최인호는 “장보고가 한,중,일의 바다를 국경없이 다스렸던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단 한사람의 세계인(世界人)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며 오늘날 일본에서도 신라명신으로 신격화되고 있는 그의 궤적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해신은
총
50부작으로
150억
이상의
제작비를
예상하고있다 타
사극100부작이상을
감안한다면
어마어마한
제작비다
해상왕
장보고
일대기를
그릴
해신
완도를
비롯하여
순천
수원
중국등
해외로케까지
감행되는
본격
해양사극
지금끼지
해양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시도한다는데
이목이
집중된다
▼드라마
해신의
주.조연급
배우들
완도읍
대신리
소쇄포
해신
세트장
건립현장1
도읍 대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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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현장2
도읍 대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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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현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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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현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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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현장8
완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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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장
건립현장9
장보고
시대
때
완도에
몰래 들어왔던
해적선
모형
신라 무역선을 외형적으로 살펴보면 갑판 위에는 뜸으로 지붕을 이은 2∼3개의 '뱃집'(船 室)이 있어 사신(관리)이나 승려·상인들이 지냈고, 나머지 승객은 갑판 아래에 있었다. 이 물에는 닻을 감아올리는 물레가 있어서 돌이 매달린 닻을 감고 풀 수 있다.
이밖에 돛대에 는 '부들'(香浦:일명 돗풀)로 짠 돛을 매달았다. 공교롭게도 돗풀은 한자 '완'(莞)에 해당하고 청해진 본진이 있엇던 형재의 전남 완도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는데 바로 돗자리의 재료다. 이 무역선의 뱃전 난간에 방패를 세우면 일종의 전선(戰船)형태인 방패선이 됐다. 전선들은 보통 한달치 양식을 저장하고 참나무 땔감과 물을 실었다.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항상 찐쌀 과 미숫가루를 준비했다. 지금까지 남도 해안 사람들이 찐쌀을 잘 먹는 것도 이런 전통에서 왔다는 의견이 있다.
장보고
신라무역선
재현세트2
장보고 신라무역선 재현세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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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TV를 안봐서...언제하는지 잘 모르겠네요....함 보면 실감날텐데요...
돈이 마니 드겠는데...
너무 재미있겠네요